▶ 지금까지 세 나라 사람들이 어떤 길을 통해서 서로 만났는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등 세 나라의 ‘만남’에 대해 넓게 살펴보았어. 세 나라는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문화를 함께 나누어 오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간직하게 되었지. 서로에게 배운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기도 했고 말이야. 이번 회부터는 세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살펴보자꾸나.



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7 공자를 만난 세 나라




“부모님에게 효도해야 한다.” “선생님을 존경해야 한다.” “웃어른께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한 번쯤 들어봤을 이런 말은 사실 공자가 했던 말이야. 공자는 너무 예절을 강조하는 것 같아 고리타분해서 싫을 때도 있어. 하지만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우리가 알든 모르든, 공자의 가르침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어. 이것도 세 나라 교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단다. 



죽었다가 살아난 공자


공자는 2500여 년 전 중국에서 태어났어. 그 무렵, 중국은 수많은 제후들이 땅을 나누어 싸우고 있었어. 왕이 있었지만, 제후들은 왕을 따르지 않고 서로 경쟁하느라 바빴지. 제후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좋은 인재를 등용했어. 인재들은 제후에게 나라를 다스릴 좋은 방법을 이야기했고, 제후의 마음에 들면 높은 관리가 되기도 했단다.


공자도 수많은 인재 가운데 한 사람이었어.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며 공부도 열심히 하고 제자들도 많이 길러냈지. 그러다 보니 공자는 어느새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어떤 제후의 신하가 되었단다. 공자는 제후를 설득했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사회 질서를 먼저 안정시켜야 합니다. 

법보다는 예의와 도덕으로 사회를 안정시키소서.” 


하지만 제후는 예의와 도덕만으로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생각했어. 


“왕을 잘 받들어야 나라가 옛날처럼 편안해질 것입니다.”


제후는 이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 자기가 왕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거든. 


결국 공자는 자신의 꿈을 세상에 펼치지 못하고 말아. 하지만 제자들이 공자가 살아 있을 때 했던 이야기를 정리해서 《논어》라는 책을 만들고, 공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켰어. 이런 공자의 사상을 ‘유가 사상’이라고 부르고, 공자의 학문을 ‘유학’이라고 부른단다.


하지만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유가 사상은 탄압을 받았어. 시황제는 유가 사상이 담긴 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산 채로 땅에 파묻기까지 했지.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세워진 지 60여 년이 흐른 후, 한 무제가 황제가 되고 나서야 유가 사상이 되살아날 수 있었단다. 유가 사상은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해야 사회가 안정된다고 여겼지. 무제는 유가 사상을 널리 알리면,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듯, 신하가 군주에게 충성하듯, 백성들도 황제에게 복종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한 무제는 국립 대학인 태학의 문 앞에 유가 경전을 새긴 큰 비석을 세워놓고, 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관리로 뽑겠다고 선언했지.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비석에 새겨진 유가 경전을 떠내거나 베끼기 위해 줄을 섰어. 이렇게 해서 유가 사상은 점차 한나라 전체로 뻗어나갔단다.

 



조선으로 건너가 종교가 되다


유가 사상이 한반도에 전해진 건 삼국 시대 때야. 하지만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표 종교는 불교였어. 세 나라 모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받아들였거든. 고려 후기가 되어서야 유가 사상이 중요한 사상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고려 후기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받던 때야. 고려의 임금은 몽골의 황족과 결혼해야 했고, 원나라를 자주 드나들어야 했지. 그런 임금을 수행하여 원나라를 오고가는 관리 중에 ‘안향’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당시 고려는 불교 세력의 권력이 매우 막강했어. 그러다 보니 관리와 짜고 부정부패를 저질러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단다. 안향은 중국의 유학을 들여와서 고려를 유학의 나라로 만들면 불교의 부정부패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어.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선비들을 유생이라고 하지.


안향은 유가 경전을 직접 베끼거나 공자의 초상화를 그려 고려에 가져왔고, 학자들에게 유가 사상의 이로움을 널리 알렸지. 유학자들이 점점 늘어났고 결국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어. 조선의 지배층이 된 유학자들은 불교를 억압하고 유학을 숭배하는 정책을 폈단다. 특히 과거를 보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유학을 공부해야 했어. 조선의 국립 대학인 성균관은 유학자들을 길러냈고, 공자를 받들어 해마다 제사를 지냈어. 그래서 유가 사상은 하나의 종교처럼 발전하여 ‘유교’라고도 불리게 되었단다.




조선 유학자를 만난 일본 승려


백제의 학자 왕인은 유가의 경전인 《논어》를 일본 야마토 왕조 때 전해 주었지. 하지만 유가 사상은 일본에서도 처음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어. 유가 사상이 일본 곳곳에 널리 퍼지게 된 건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야.


임진왜란 때 끌려간 유학자인 강항은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조선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중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한 일본의 승려가 강항의 집으로 찾아왔어.

당시 일본은 불교의 나라였는데, 일본 승려들은 불교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다른 학문을 공부하기도 했단다. 승려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특히 유학에 관심이 많았어. 그래서 조선에서 온 유학자가 자기 집 근처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갔던 거야.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난 강항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어.


조선에 돌아가려면 돈이 많이 필요해. 글이나 몇 줄 적어주고 돈을 벌어야겠다.’ 


하지만 후지와라 세이카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어. 더구나 유학자인 강항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승려복까지 벗어던지고 왔지.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유학을 제대로 가르쳐 주기로 결심했단다. 그런데 강항은 가지고 온 유가 경전이 없었어. 그래서 자기가 외우고 있는 경전의 내용을 불러 주었단다. 21권이나 되는 내용을 후지와라 세이카는 한 글자도 빠짐없이 받아 적어 책으로 엮어냈지.


강항이 조선으로 돌아간 후, 에도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어. 그 편지는 에도 막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보낸 것이었어. 어지러운 사회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유가 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유학에 정통하다고 소문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에도로 와 달라고 편지를 보냈던 거야.


일본의 서당은 ‘데라코야’라고 해. 절(데라)에서부터 시작되었지. 


후지와라 세이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원을 받아 전국에 유가 사상을 퍼뜨렸어. 지방마다 서당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도 하고, 공자의 조각상도 널리 알렸지. 이런 노력으로 일본에 유가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단다.




이후 세 나라에는 유가 사상이 제대로 자리 잡았을까?


일본에는 과거 제도가 없어서 유가 사상은 조선에서만큼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단다. 관리가 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었지. 대신 자유롭게 유학을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었고, 뛰어난 유학자들을 많이 길러낼 수 있었단다.

한국에는 지금도 유가 사상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어. 그런데 중국은 오히려 한국보다도 유가 사상의 영향이 적게 남아 있는 편이야. 유가 사상을 낳은 나라인데, 이상하지? 중국은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종교가 함께 있는 나라였어. 그래서 유가 사상을 중요하게 여기긴 했지만 다른 종교를 억압하지는 않았거든.


*

제후 : 일정한 영토를 가지고 권력으로 다스리는 사람.

막부 : 일본 특유의 정부 체제로 무신 중심의 정치를 펼친다. 

쇼군 : 막부의 우두머리.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한중일을 포함해서 동아시아를 '유교문화권'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의 공자로부터 시작되어 정치적, 학문적, 종교적 부분까지 생활 곳곳에 퍼져나간 이 사상을 무엇이라 할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3-05-16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7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6 다른 나라에 마을을 세우다




중국 음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그래, 자장면이야. 자장면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건, 인천 차이나타운 덕분이야. 차이나타운은 청나라 사람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지만, 자장면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조선 사람들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장소이기도 했어.



당나라의 신라인 마을


통일 신라 때 수많은 신라 상인들은 당나라로 건너갔어. 당나라 황제를 만나러 가는 사절단을 따라 간 거지. 신라 상인들은 당나라의 값진 비단이나 금속 공예품을 구입해서 신라의 귀족들에게 팔곤 했단다.


당나라와 통일 신라 사이에 교역이 활발해지자, 신라 상인들 중에는 귀국하지 않고 아예 당나라에 머물며 교역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어. 신라 상인들은 당나라에 자기들만의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어. 이런 마을을 ‘신라방’이라고 해. 당나라 정부는 신라방을 인정해 주었고, 신라 사람에게 관직을 주어 신라방을 관리하게 했단다.


신라방은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 곳곳에 생겨났는데 대표적인 곳이 적산촌, 초주, 양주였어.

적산촌은 산동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이었어. 앞에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가다가 산동 반도로 이어지는 바닷길에 대해 설명한 거 기억나지? 적산촌은 당나라와 통일 신라를 오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치는 곳이었어. 그래서 신라방이 생겨난 거야.


적산촌에 세운 신라 사람들의 절인 '적산법화원'이야. 법회를 할 때도 신라의 말을 쓰고, 

신라의 관습을 따랐단다. 많을 때는 200명이 넘는 신라 사람이 법회에 참석했다니

적산촌의 신라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가지?


적산촌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초주라는 곳이 있어. 초주는 동서남북으로 강이 흐르는 교통의 요지야. 초주에서는 물자가 풍부한 남쪽이나, 당나라의 수도 장안, 서해를 통해 통일 신라와 일본으로도 다닐 수 있었지. 그래서 이곳에도 신라방이 있었단다.


초주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양주라는 곳이 있어. 양주에는 이슬람 상인들이 많았지. 이슬람 상인들은 바닷길로 아라비아 반도와 중국 동남부 해안을 오가면서 교역을 했는데, 양주가 이슬람 상인들의 종착점이 되는 곳이었지. 신라 상인들은 양주에서 이슬람 상인들이 가져온 물건을 사서 통일 신라나 일본에 가서 팔았어. 이처럼 신라방은 당나라뿐 아니라 서아시아의 물자를 통일 신라, 일본 등으로 보내는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




조선 시대 삼포의 일본인 마을


조선 시대에는 일본 상인들 중에 조선과 교역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어. 특히 쓰시마 사람들이 많았지. 쓰시마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있는 섬이야. 전체 면적의 97퍼센트가 산이라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어. 그래서 쓰시마 사람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 생계를 꾸려야 했단다. 그중에는 교역을 하기 위해 조선에 오는 상인도 많았어. 


조선은 일본 사람들이 마음대로 조선을 드나들면 나라가 쉽게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부산포, 내이포, 염포 세 곳을 개항하여 이곳에서만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지. 이곳을 ‘삼포’라고 부른단다. 삼포에는 각각 왜관이 설치되어 있었어. 조선 정부는 일본 사람들에게 교역을 할 때만 잠시 삼포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했어.


하지만 일본 상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삼포를 떠나지 않았어. 삼포에 아예 집을 지어 정착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집들도 점점 늘어나더니 작은 마을이 생겨나게 된 거란다. 개항한 지 100년도 채 안 되어 삼포에 사는 일본 사람의 수가 3000명이 넘게 되었지.


그런데 일본 상인들이 돈을 조선 사람들에게 빌려 주고, 그걸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거나, 일본 사람들끼리 이득을 다투며 싸우는 등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 조선은 삼포의 일본 사람들에게 귀국을 명령했고, 교역의 물량을 줄였어. 그러자 불만을 품은 일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조선 사람 272명을 죽이고 집 8900여 호를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했어. 이 사건을 ‘삼포왜란’이라고 해. 결국 조선은 삼포를 모두 폐쇄해 버렸어. 삼포의 일본인 마을은 이렇게 100년도 채 안 되어 사라지고 말았지.




일본 나가사키의 중국인 마을


일본 열도 곳곳에도 명나라 상인들의 마을이 있었어. 그 마을은 ‘당인촌’이라 불렸단다. 명나라는 물자가 풍부한 나라여서 아시아의 여러 상인들은 명나라와 교역을 하기를 원했지. 하지만 명나라는 외국 상인들이 오는 것도, 명나라 상인들이 바다 밖에서 교역하는 것도 금지했어. 조선과 마찬가지로 외국 상인이 자주 드나들면 나라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거든. 


그러자 명나라 상인들 중에는 몰래 외국 상인들과 교역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어. 일본이나 동남아시아로 직접 나아가서 교역을 했는데, 특히 거리가 가까운 일본으로 가는 상인이 많았지. 일본에 간 명나라 상인들은 삼포에 온 일본 사람들처럼 점차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어. 일본 곳곳의 항구 도시에 명나라 사람들만의 마을을 만들기 시작한 거야. 그렇게 해서 100년 만에 일본 전체에 수만 명의 명나라 사람이 살게 되었단다.


그런데 이즈음 일본에서도 일본 상인과 외국 상인이 바다를 통해 교역하는 걸 규제하기 시작했어. 그래, 역시 나라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이유였지. 완전히 금지한 건 아니고, 나가사키라는 도시 한 곳을 정해 그곳에서만 교역을 할 수 있게 했어. 그러자 여러 지역의 당인촌에 살던 중국 사람들이 나가사키로 모여들었어. 


그 후 나가사키의 당인촌은 두 나라의 교역 창구 역할을 했어. 이 나가사키 당인촌을 통해 들어온 중국 음식도 있었어. 자장면과 함께 손꼽히는 중국 음식이지. 맞아, 짬뽕이야. 




다른 나라에 꼭 마을을 세워야 했을까?


세 나라 사람들은 보다 활발하게 교역을 하기 위해 안정된 근거지가 필요했어. 그래서 이웃 나라에 마을을 만들었지. 신라방, 삼포, 당인촌, 그리고 최근의 차이나타운까지. 세 나라 교역의 중계지 역할을 한 외국인 마을들은 서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문화를 교류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지.


*

교역 : 주로 나라와 나라가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일.

법회 : 불교의 본뜻을 풀어 전달하는 자리.

왜관 : 일본에서 건너온 사절단을 맞거나 교역 물자를 정리하던 곳.



이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사람들은 보다 안정되게 교역을 하기 위해 주로 다른 나라의 상업, 교통의 중심지에 마을을 만들어 왔다. 이런 외국인 마을 중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에, 명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세워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중국인 마을을 무엇이라 부를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3-05-16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과함께 2013-05-20 11:49   좋아요 0 | URL
정답입니다! 당첨 축하드립니다:D 적립금은 이벤트가 종료되는 6월 2일에 일괄 지급될 예정입니다. 다음 회 퀴즈도 놓치지 마세요^^

2013-05-20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7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5 국적을 바꾼 사람들




자기가 살던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서 사는 사람들이 있어. 그중에는 아예 그 나라 사람이 되어 사는 사람도 있단다. 이들을 ‘귀화인’이라고 해. 옛날 세 나라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어.



당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


고구려 사람 중에는 중국과 전쟁을 하다가 포로가 된 사람이 많았어. 특히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로 끌려가는 고구려 사람이 더욱 늘어났지. 백제 사람들 중에도 당나라로 간 사람이 적지 않아. 백제 역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망했으니까 말이야.


그럼, 한반도에서 당나라로 건너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죽은 사람도 있고, 노예가 된 사람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된 건 아니야. 당나라는 개방적이고 다른 나라의 문화가 많이 어우러진 나라였어. 외국에서 온 사람들도 기꺼이 백성으로 받아들였지. 전투에 능한 사람은 군인이 되게 하고, 그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은 장군으로 삼았지. 장사를 잘 하는 상인에게는 마음껏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뛰어난 지식인에게는 당나라의 과거를 보고 관리가 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었지.


당나라로 귀화한 고구려 사람과 백제 사람 중에는 너희도 알 만한 사람이 있어. 바로 고선지흑치상지야. 


고선지는 원래 고구려의 유민이었어.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아버지가 당나라로 귀화했기 때문에, 당나라 사람이 되었지. 고선지는 당나라의 장군이 되어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정복하며 큰 공을 세웠단다.


흑치상지는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를 다시 일으키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어. 그래서 당나라에 항복하고 당나라의 장군이 되었지. 그 무렵 당나라는 북쪽의 돌궐과 팽팽하게 맞서 있었어. 흑치상지는 돌궐과 전투에 나서 승리하고 큰 공을 세웠단다. 흑치상지는 중국 역사에서는 당나라를 빛낸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단다.




귀화인에게 관직을 주다


한반도에서 중국 대륙으로 귀화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로 귀화한 사람도 있었어. 특히 고려 시대 때는 중국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단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 대륙은 ‘오대십국’이라는 분열의 시대를 맞이했어. 북쪽에서는 다섯 왕조가 들어섰다가 망하기를 되풀이하고, 남쪽에서는 열 개 나라가 존재하던 혼란한 시대였지. 이 시대에 수많은 중국 사람들이 중국 대륙의 혼란을 피해 고려로 왔어. 당시 귀화인이 모두 17만 명이나 되었다는구나. 귀화인들 중에는 중국 사람 중 가장 많은 민족인 한족뿐 아니라 여진족, 거란족 같은 북방 유목민도 있었대.


고려는 당나라처럼 무척 개방적인 나라였어. 고려는 귀화인들 중에서 유능한 사람을 뽑아 관리로 삼았는데, 주로 외교 업무를 맡겼어. 중국어, 여진어, 거란어를 잘할 뿐 아니라 그 나라 사정에도 밝았으니까. 


과거에 응시하는 모습을 담은 조선 시대의 그림이야.

상상했던 것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 않니?


고려로 귀화한 사람들 중에 ‘쌍기’라는 사람은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의 광종의 눈에 띄어 황제의 허락을 받고 귀화하여 관직을 받았단다. 쌍기는 고려의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업적을 남겼어. 중국의 과거 제도를 고려에 소개했거든. 고려의 광종은 왕권을 위협하는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쌍기의 제안을 받아들였단다. 과거 제도는 한반도에 도입된 후 조선 시대까지 1000년 가까이 실시되었지.




일본 사람이 된 조선 기술자들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어. 조선은 건국한 후 큰 외침 없이 200년 동안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어. 반대로 일본은 분열의 시대를 보냈고, 그 분열을 통일하기 위해 100년 가까이 전쟁을 벌인 덕에 일본의 전투력은 무척 뛰어났단다.

일본군은 수도 한성을 지나 평양까지 점령했고, 조선의 왕 선조가 피난을 떠나야 했지만 조선 수군과 의병, 명나라의 구원병까지 힘을 보태자, 일본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어.


1597년에 일본은 다시 조선을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처음부터 조선의 거센 저항을 받아 한반도 남해안에 겨우 머물 수밖에 없었지. 일본군은 전쟁 상황이 불리해지자, 다른 임무를 더 열심히 수행하기로 했어. 조선의 책, 자기, 공예품, 목판 활자본 같은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한 거야.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와 기술자들을 포로로 마구 잡아들였지. 그중에는 유학자도 있었고, 도공이나 공예 기술자, 활자공도 있었어. 물론 일반 농민들도 많이 사로잡았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포로가 무려 10만 명 가까이 되었다는구나.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람들은 포로로서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고, 대부분은 일본 영주들의 노예가 되었단다.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를 스승으로 삼고 싶어 하는 일본 사람, 조선 자기를 좋아하는 일본 영주, 활자를 이용해서 책을 만들고 싶어 하는 관리들은 조선의 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좋은 대접을 하기도 했단다. 조선 포로들 중에는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은 사람들이 많았지. 그렇게 남은 조선 사람들은 대대로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단다.




갈등은 없었을까?


옛날부터 세 나라에는 전쟁 포로가 되어 또는 먹고살기 위해 귀화한 사람들이 꽤 많았어. 처음에는 현지인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겠지만, 차츰 그 나라 사람이 되어갔지. 그리고 고향에서 가져온 학문과 무예, 기술 등을 전하면서 귀화한 나라의 발전에도 이바지했단다.




*

국적 : 한 나라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은 자격이나 공식적으로 소속된 국가를 가리키는 말.

유민 : 없어진 나라의 백성.

과거 제도 : 중국 수나라 때 처음 실시하기 시작한 관리 선발 시험 제도.

외침 : 다른 나라와 같은 바깥으로부터의 침략.



이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다른 나라에 살면서 아예 국적을 얻어 그 나라의 사람이 되는 일로, 옛날에는 나라를 잃거나 전쟁 포로가 되거나 먹고살기 위해 떠났다가 이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이를 통해 한국인이 된 외국인들이 있는데 이것을 무엇이라 할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3-05-16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7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4 서로를 배우러 가다




다른 나라로 공부하러 가는 ‘유학’ 알지? 

유학은 비행기가 없던 옛날에도 있었단다. 중국이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당나라 때, 

신라에는 조기 유학 열풍이 불었고, 일본에서도 유학생을 파견했지.



신라의 조기 유학 열풍


통일 신라의 유명한 학자인 최치원도 조기 유학이 유행하던 때에 열두 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났어. 지금으로 치면 겨우 초등학교 5학년 때구나. 최치원의 아버지는 당나라로 떠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어.


“10년 안에 반드시 과거에 급제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넌 내 아들이 아니다!”


당나라에는 최치원처럼 외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많았어. 유학생들은 당나라의 국립 대학이었던 국자감에 입학해서 공부했어. 이 학교에는 특히 신라 유학생이 많았지. 국자감 유학생 중에 통일 신라에서 온 학생만 200명이 넘은 적도 있었다는구나. 


그래서 최치원은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했냐고? 최치원은 열심히 공부해서 5년 만에 과거에 합격했단다. 당나라의 과거에 신라 사람이 합격했다니 놀랍지? 물론 당나라 학생들과 함께 경쟁해서 합격한 건 아니야. 


당나라에는 외국 사람이 치를 수 있는 ‘빈공과’라는 시험이 따로 있었어. 빈공과에 합격한 최치원은 당나라의 관리로 일했어. 그리고 통일 신라로 돌아온 후에는 당나라에서 배운 학문을 바탕으로 통일 신라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지.




당나라에 뼈를 묻다


당나라에는 일본에서 온 유학생도 있었어. 일본 유학생들은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견당사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도착해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단다. 유학을 온 일본 학생들은 20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러야 했어. 자신들이 타고 가야 할 견당사의 배는 20년에 한 번밖에 오지 않았으니까.


일본에서 온 유학생 중에 기비노 마키비와 아베노 나카마로라는 사람이 있었어. 두 사람 역시 견당사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왔고, 신라 유학생들처럼 국자감에 입학해서 열심히 공부했지. 


20년이 지난 후 일본의 견당사가 당나라에 도착하자, 기비노 마키비는 그동안 당나라에서 배운 선진 학문과 제도를 하루 빨리 고국의 발전을 위해 활용하고 싶어 귀국하기로 했지. 하지만 아베노 나카마로는 귀국하지 않고 최치원처럼 빈공과에 합격해서 당나라 황제의 신임을 받는 관리가 되었단다. 기비노 마키비는 당나라에서 가져온 유학, 천문학, 음악, 군사학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을 일본 정부와 지식인들에게 전파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일본의 높은 관리가 되었단다. 


또다시 20년이 흐르고, 일본은 견당사를 파견했어. 이번에는 일본 정부의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도착한 기비노 마키비는 아베노 나카마로와 20년 만에 만날 수 있었지. 아베노 나카마로는 이번에는 당나라의 관직을 그만두고, 귀국하는 견당사의 배에 올랐어. 그런데 기비노 마키비가 탄 배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지만, 나카마로가 탄 배는 그만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단다.


다큐멘터리 <신 실크로드>의 한 장면이야.(출처 바로가기)

일본에서 당나라로 파견되는 견당사와 유학을 떠나는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먼 길을 떠났지.


다행히 아베노 나카마로가 탄 배는 표류해서 저 멀리 남쪽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흘러갔어. 그곳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당나라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아베노 나카마로를 다시 관리로 임명했단다. 


결국 아베노 나카마로는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당나라에서 생애를 마치고 말았지만, 당나라에서 주로 문학을 담당하는 관직을 맡은 덕에 이백과 같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들과 자주 만날 수 있었지. 당나라의 시인들은 자신들이 쓴 시집에 아베노 나카마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남겼고, 그 이야기들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단다.




신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승려


원효의 해골바가지 물 이야기 들어본 적 있지?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어느 동굴에서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어. 그래서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는 의상과 헤어져 통일 신라로 되돌아왔지.


원효가 이런 일을 정말로 겪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지? 

당나라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승려들도 유학을 갔다는 것 말이야. 이들을 유학승이라고 불러.

신라의 승려들 중에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한 사람이 무척 많았어. 의상처럼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통일 신라로 돌아온 유학승도 있었지만, 당나라에 계속 남아서 죽을 때까지 불교를 공부한 사람도 있었어. 원측이라는 승려도 그런 사람이었어.


원측은 열다섯 살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불교를 공부했어. 원측은 당나라의 유명한 승려 현장의 제자가 되었단다. 승려 현장이 누구냐고?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삼장법사와 인도를 여행한 이야기는 잘 알지? 그 이야기를 소설로 엮은 책이 《서유기》인데, 여기에 나오는 삼장법사가 바로 현장이야.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를 혹시 본 적 있니?

《서유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만화영화야.


원측은 현장의 가르침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어. 원측은 중국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등 5개 언어를 할 줄 알아서 수많은 인도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지. 어찌나 실력이 뛰어났던지 당나라 황제에게도 존경을 받을 정도였단다. 불교를 배우러 갔다가, 오히려 당나라의 승려들을 가르칠 정도로 빼어난 승려로 인정받게 된 거지.


통일 신라에서는 원측을 돌려보내 달라고 했지만, 원측을 아꼈던 당나라 황제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고 해. 원측은 결국 통일 신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당나라에 머물며 불교를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어. 원측은 단지 ‘통일 신라의 승려’에 머문 것이 아니라 ‘세계인을 위한 승려’가 되었던 거지.




배움에는 국경도 없다!


세 나라의 문화 교류가 깊어진 건 중국 당나라 때부터야. 잠시 다녀가는 외교관뿐 아니라 오래 머물며 배우는 유학생과 유학승이 늘어났기 때문이지. 각자 다른 나라 사람이었지만, 그들의 활동에는 국경이 따로 없었어.




*

견당사 : 당나라에 보내는 사절단.

이백 : 당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이태백이라고도 불리며 천 여 편의 시를 남겼다.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다양하고 더 많은 지식을 배우러 다른 나라로 가서 머무르며 공부하는 일로, 당나라 시대에도 이것을 하러 먼 길을 떠난 신라나 일본의 학생과 승려가 많았다. 이것을 무엇이라 할까? 



댓글(9)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13-05-03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6 0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16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4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7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3 어떻게 말이 통했을까?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한자가 처음 태어난 곳은 중국이야.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중국 은나라 때 갑골문이라고 부르는 문자가 있었어. 그 갑골문이 점점 발전해서 한자가 되었지. 한자는 중국 대륙에만 머물지 않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도 퍼져나갔어.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왜 한자를 받아들여 사용했을까?



한자는 어떻게 세 나라가 함께 쓰게 되었을까?


“우리도 말을 글로 적을 문자가 필요해. 하지만 우리에겐 문자가 없으니까 중국의 한자를 배워서 사용하자.”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며 한자를 받아들였을까? 

그렇지 않아. 두 나라가 한자를 받아들인 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앞에서 조공 책봉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지?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왕들은 중국과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사신을 자주 파견해야 했어. 사신의 입을 통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중국 황제에게 전달하고, 사신의 귀를 통해서 중국 황제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지.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사신의 입을 통해서만 주고받아도 될까? 그러다가 내용이 잘못 바뀌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잖아? 그런 일을 막으려면 문서로 전달하는 것이 정확했겠지? 그렇다면 어떤 글자를 사용해야 했을까? 두 나라는 중국의 조공국이니까 당연히 중국의 글자인 한자를 사용해야 했단다.





두 나라는 그렇게 해서 한자를 배우기 시작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한자가 오직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만 필요했다면, 한반도와 일본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두 나라는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을 뿐 아니라, 중국의 선진 제도와 학문을 배우고 싶어 했으니 말이야.




외교 현장의 숨은 일꾼


세 나라가 한자를 사용하게 되고, 교류가 더욱 잦아지자 전문적으로 통역사를 길러냈어. 옛날에는 통역사를 ‘역관’이라고 불렀어. 역관은 자기네 나라 말은 물론이고 상대 나라 말까지 잘하는 관리였지. 세 나라는 사신을 보낼 때 항상 역관도 함께 보냈어. 역관은 사절단 일행을 늘 따라다녔는데, 특히 방문하는 나라의 황제나 왕을 만날 때면 반드시 옆에서 통역을 해야 했단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 가운데 역관들의 모습이야. 역관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역관은

앞에서 가마를 타고, 보통 역관은 말을 타고 이동하고 있구나.


역관은 단순히 통역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상대 나라의 문화와 풍속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어. 지금으로 치면, 중국 전문가, 일본 전문가, 한국 전문가쯤 되었지.


그래서 세 나라의 문화 교류 분야에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어. 사실 조선 시대 역관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책을 구입하는 것이었지. 특히 중국에 간 역관은 외교 업무를 마친 후에 주로 북경(베이징)의 서점가를 돌아다녔어. 왕이 명령한 책들을 사기 위해서 말이야. 중국에서 어떤 학문이 유행하고 있는지, 어떤 책이 새로 나왔는지도 조사했지.

     



글로 나눈 대화


사절단은 나랏일을 마치고 나면 다른 활동을 즐기기도 했어. 각자 현지의 학자들을 만나 서로의 학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 나라의 사정에 대해 묻기도 했지.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 

세 나라 사신들은 현지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어.

 

역관이 도와주면 되지 않으냐고? 하지만 역관이 늘 따라 다니며 도와줄 수는 없었지. 

그래서 사신들은 현지 학자들과 만날 때 필담을 했어. 글로 써서 이야기를 나눈 거지. 

세 나라는 모두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필담을 하면 말로 대화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리지 않을까? 

그렇지 않았어. 당시 세 나라 학자들은 늘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무척 빨리 쓸 수 있었거든.


조선시대의 실학자인 홍대용이야.

홍대용의 청나라 친구인 엄성이 이 초상화를 그렸다지.


청나라 사절단의 일행으로 북경에 도착한 홍대용은 서점 거리를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청나라 사람들을 만났어. 과거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는데, 홍대용은 그들과 금세 친구가 되었단다.


홍대용은 청나라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었어. 물론 필담이었지. 이들은 두 나라의 학문이 어떻게 다른지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어.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지만, 대화가 점점 깊어져 토론으로 발전했지. 그런 만남은 일곱 번이나 계속되었어.




필담을 나눈 후에는?


필담을 나눈 종이는 점점 쌓여 갔지. 나중에 그 종이는 어떻게 했을까? 그냥 버렸을까? 

필담을 나눈 종이에는 두 나라 학자들이 나눈 깊이 있는 토론 내용이 담겼어. 나중에 다시 살펴보면 공부가 될 내용이 무척 많았지. 홍대용과 청나라 친구들은 필담을 나눈 종이를 사이좋게 반씩 나누어 가졌단다.




*
외교 : 다른 나라와 정치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교류하는 것.


이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다른 나라의 말을 유창하게 할 줄 아는 데다가 다른 나라의 문화와 풍속에도 전문가인 관리로 다른 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꼭 함께 파견했던 이 관리의 이름은 무엇일까?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3-05-0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답은 역관입니다.

2013-05-20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2 0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noch 2013-05-02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매우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라 생각 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저도
이렇게 아이들의 상상을 자극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미있는 책을
아이들에게 권하고 싶고, 스스로도 읽고 싶어지네요.
어제는 일본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서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어요.
낼은 중국 선생님들도 만날텐데 그동안 저 자신은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려는 시도를 별로 하지 않았었어요.
일본 선생님들이 한국 오기 전에 공부를 하고 왔다는 말을 듣고 많이 부끄러웠지요.
이제 부터 시작하면 되겠지요?

2013-05-02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2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16 2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7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