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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12 은이면 다 통해




달러는 미국 돈이긴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국제 통화야. 세계 어느 나라에 가든 달러만 있으면 그 나라 돈으로 쉽게 바꿀 수가 있지.

그럼 옛날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사이에도 지금의 달러처럼 국제 통화가 있었을까? 한국이 조선 시대였을 무렵, 세 나라는 교역을 할 때 은화를 주로 사용했단다. 세 나라는 어떻게 해서 은으로 만든 돈을 사용하게 된 걸까?


 

모든 것은 은으로 통한다


중국은 세 나라 중에서 상업과 교역이 가장 발달한 나라였어.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상업과 교역을 위한 돈을 만들어 사용했지. 돈은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었어. 금이나 은으로 만들기도 하고, 구리로 동전을 만들기도 했지. 종이를 이용해서 지폐를 만들기도 했고, 을 돈처럼 사용해서 다른 물건을 사기도 했단다.


이 중에서 가장 즐겨 사용한 돈은 무엇이었을까? 옛날 중국 사람들도 지금처럼 금으로 만든 돈을 가장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아. 금은 너무 귀하고 생산량이 적어서 값싼 물건을 사기에 불편했지. 반대로 동전은 가장 흔했지만 값어치가 크지 않아서 비싼 물건을 사기에는 불편했어. 많이 들고 다니기에는 무거웠을 테니까 말이야. 지폐는 가벼워서 좋았지만, 종이로 만든 돈이라 오래되거나 물에 젖으면 쉽게 찢어졌어. 쌀은 들고 다니며 물건을 사기엔 너무 무거웠어.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차츰 은화를 가장 즐겨 사용하게 되었단다.


은화가 중국 사람들의 대표적인 화폐가 된 건 명나라 때야. 은 광산이 개발되어 은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서, 은화를 많이 만들 수 있게 되었거든. 은화는 점차 일반 백성들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화폐가 되었어.


중국의 상인들이 사용했던 은화야. 모양이 독특하지?


은화의 사용량이 늘자 은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어. 지방 관아 중에서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은으로 내게 하는 곳이 늘어났지. 그런 지방이 점점 더 늘어나자, 명나라는 아예 모든 세금을 은으로 내도록 법을 바꾸어 버렸어.


그러자 은이 점점 모자라게 되었어. 명나라는 더 많은 은을 생산하기 위해 새로운 광산을 계속 개발했지만, 얼마 못 가서 개발할 광산마저 남지 않게 되었지. 그래서 명나라는 조선에게 조공 물품으로 은을 바치라고 요구했단다.




획기적인 은 채굴 기술을 개발하다


조선은 명나라의 요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 당시 조선은 쌀이나 면포를 화폐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화가 별로 필요하지 않았고, 그래서 은을 열심히 채굴하지 않았던 거야.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세종은 명나라가 요구하는 은의 양을 도저히 채울 수 없었어. 그래서 명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지.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척박하여 은이 많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희 정부가 가지고 있는 은도 바닥이 나고 없습니다. 은의 조공을 면제하고 다른 생산물을 바치게 해 주소서.”


결국 명나라 황제는 조선에게 은을 바치라는 요구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단다.


그런데 얼마 후, 조선은 은을 채취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어. 원래 은은 은광석에서 채취해. 은광석에는 은과 함께 납도 들어 있는데, 여기에서 납을 제거해야만 은을 생산할 수 있지. 그런데 1503년 함경도 단천에서 김감불과 김검동이라는 사람이 은광석에서 납을 제거하는 ‘연은분리법’을 개발한 거야. 연은분리법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첨단 기술이었다고 해.


하지만 조선은 연은분리법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았어. 이 기술로 은 생산량을 늘리면, 명나라에서 다시 은을 조공 물품으로 바치라고 요구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조선이 은을 돈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건 임진왜란 때부터야.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사들이 은을 가지고 와서 조선 백성들과 거래를 했는데, 이때 은이 무척 편리하다는 걸 깨달았거든.

임진왜란 후에 은의 사용은 더욱 늘어났어. 하지만 조선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은은 조선이 직접 채굴한 은이 아니었어. 면포나 인삼을 수출하고 받은 일본의 은이 대부분이었지.




세 나라에 펼쳐진 은의 길


그래, 명나라는 일본을 통해 부족한 은을 채웠어. 일본은 물자가 풍부한 명나라와 교역하기를 원했어. 특히 명나라의 비단과 생사는 일본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는 물건이었지. 일본은 명나라의 물자를 수입하기 위해, 명나라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은을 많이 생산해서 대가로 지불했단다. 비단과 생사를 원하는 일본과 은을 원하는 명나라의 입장이 서로 잘 맞아떨어진 거야.


일본이 명나라와 교역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은이 필요했어. 하지만 일본의 은 생산 기술은 별로 좋지 않았어. 그때, 조선을 왕래하는 일본 상인들로부터 기쁜 소식이 들려온 거야. 조선에서 연은분리법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이었지.


일본 상인들은 조선의 기술자에게 연은분리법을 배워 일본으로 돌아갔어. 그 무렵 일본 시마네 현의 이와미라는 곳에서 은광이 발견되었지. 일본은 조선에서 배운 기술로 이와미 은광을 개발해서 은 생산량을 엄청나게 많이 늘렸어.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된 은은 은화로 만들어져 일본에서 사용되었고 명나라와의 교역에도 사용되었지. 그래서 일본은 명나라에 은을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단다.




은이 세 나라에 가져다 준 것은?


일본에서 생산된 은은 곧바로 명나라로 흘러들기도 했지만, 조선을 거쳐 명나라로 가는 경우가 더 많았어. 일본 상인들은 조선에 와서 면포와 인삼을 구입하는 대가로 은을 지불했고, 조선 상인들은 일본 상인에게 받은 은을 지니고 명나라에 가서 그곳 물자와 교환했지. 일본에서 조선을 거쳐 명나라의 수도 북경까지 이어졌던 교역의 길을 ‘은의 길’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은을 매개로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의 무역은 더욱 활발해졌어.




*생사 :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뒤 삶거나 익히지 않은 상태의 실.



이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조선 시대에 조선,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두루 쓰였던 화폐로 금화와 구리 동전 사이의 적정한 값어치에 쌀보다 무겁지 않아 오늘날의 국제 통화처럼 통용되던 이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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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04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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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17: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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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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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19: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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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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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1 19: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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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2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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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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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06-08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월엔 글이 안 올라오네요. 연재 끝난 건가요?

2013-06-10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11 세계 지도를 그리다




우리가 지금 흔히 볼 수 있는 세계 지도는 서양의 발명품이야. 하지만 세계 지도를 처음 만든 건 서양이 아니라 동양이었어. 500년 전까지만 해도 동양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더 풍부했고, 지도 제작 기술도 더 좋았거든.



누가 만든 지도일까?


세계 지도는 세계 여러 나라의 모습을 한 장의 지도에 그린 그림이야. 둥근 지구를 평평하게 쫙 펼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본 적이 있을 거야. 세계 지도를 보면 세계 여러 나라의 이름, 수도, 영토의 크기를 알 수 있지.


이 지도 속에는 한중일 세 나라가 있어. 잘 모르겠다고?

가운데 커다란 나라가 중국이고, 오른쪽이 한반도, 그 아래가 일본이야.


이 지도를 한번 살펴볼까? 모양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우리나라와 중국을 그린 지도가 분명해. 

그런데 중국의 왼쪽에도 우리나라와 크기가 비슷한 땅이 있는데, 지명을 읽어 보면 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유럽이 표현된 걸 알 수 있어. 그리고 우리나라의 아래쪽에는 일본이 그려져 있지. 그렇다면 이 지도는 세계 지도구나.


이 세계 지도는 어느 나라 사람이 만든 걸까? 지도 맨 위에 한자가 쓰여 있어. 그렇다면, 한자를 사용한 나라가 만든 세계 지도라는 이야기인데, 중국 사람이 만든 걸까? 아니면 혹시 한국이나 일본 사람이 만들었을까?




조선이 만든 세계 지도?


이 세계 지도는 우리나라가 만든 지도야. 조선 시대 때 만들어진 지도지. 

조선 시대 사람들이 세계 지도를 만들었다니, 놀랍지? 어떻게 아느냐고?


우선 지도 윗부분에 있는 한자를 자세히 살펴보자꾸나. 옛날 한자로 쓴 글은 반드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해. 양쪽 끝이 흐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고 쓰여 있어. 이 세계 지도의 제목인 셈이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란 말은 무슨 뜻일까? ‘혼일混一’은 한데 모아 섞어서 하나로 만들었다는 뜻이고, ‘강리疆理’는 영토, ‘역대국도歷代國都’는 각 나라의 수도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각 나라의 영토와 수도를 한 장에 담아 그린 지도라는 뜻이 되겠구나.


그 한자 밑을 자세히 봐. 깨알 같은 글자들이 많이 쓰여 있지? 이 글이 중요해. 

세계 지도를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되어 있거든.


글을 쓴 사람은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이야. 읽어 보면, 1402년 권근이 왕의 명령을 받아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이 지도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어. 어때? 조선 사람들이 만든 세계 지도가 분명하지?


그런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조선 사람들이 직접 현지답사를 해서 그린 지도가 아니야. 직접 그리려면 전 세계를 해안선을 따라 돌아다니며 직접 측량을 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했겠지?

이 지도는 여러 장의 지도를 한데 모은 후 섞어서 만든 지도야. 

그래서 지도 이름에 ‘혼일’이라는 글자가 붙은 거지.




조선을 실제보다 크게 그린 까닭은?


이 지도의 왼쪽 부분은 중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참고해서 그린 거야. 중국과 아라비아 반도,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 모두 중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에 이미 있었던 거지.


권근이 참고한 중국의 세계 지도는 중국 원나라 때 만든 거야. 그리고 그 지도가 언제쯤엔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권근의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지.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은 황제가 되자마자 세계 지도를 만들기로 결심했어.


“세계의 지도를 모두 모으고 하나로 엮어서, 짐의 영토가 얼마나 끝없이 넓은지 나타내 보여라!”


쿠빌라이 칸은 아라비아 출신의 지도 제작자를 책임자로 임명했어. 당시 아라비아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가 많은 곳이었거든. 아라비아의 지도 제작자는 중국 사람들이 만든 지도들을 모았고, 아라비아를 그린 지도는 고향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지. 유럽과 아프리카 지도는 사신을 파견해서 구해 왔어. 그리고 서로 위치와 크기를 비교하며 한 장의 세계 지도를 만들었단다.


권근은 이렇게 해서 완성된 원나라의 세계 지도를 가지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기 시작했어. 그런데 아주 큰 문제가 있었어. 원나라의 세계 지도에는 조선이 너무 대충 그려져 있었거든. 영토도 잘못 그려졌고 내용도 틀린 것이 많았지.


‘그래. 우리 조선이 만드는 세계 지도인데, 조선 영토를 대충 그려 넣을 수는 없지. 조선 지도는 새로 그려야겠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교해 봐. 우리나라 영토가 실제보다 너무 크지 않아? 중국은 원래 우리나라 남한과 북한을 합친 것보다 영토가 44배나 넓은 나라야. 그런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면, 우리나라가 중국의 4분의 1 정도나 되어 보여. 지금처럼 정확하게 넓이를 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선 사람들은 조선이 중국보다 훨씬 작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지. 


권근은 우리나라를 왜 이렇게 크게 그린 걸까?




세 나라가 함께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원나라의 세계 지도와 조선의 지도를 합쳤지만, 그것으로 세계 지도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어. 

중국 다음으로 중요한 나라가 또 있지? 바로 일본이야.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일본 부분은 어떻게 그려 넣었을까?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완성되기 1년 전의 일이야. 

조선은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박돈지’라는 사람이 있었어. 박돈지는 일본의 수도 교토로 가던 도중에 ‘미나모토 쇼스케’라는 학자를 만났는데, 일본 지도를 갖고 있었어. 박돈지는 일본 지도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고, 미나모토 쇼스케는 박돈지의 요청을 들어주었단다.


박돈지는 미나모토 쇼스케가 보여 준 지도를 보고 감탄했어. 일본의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거든. 박돈지는 이 지도를 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베껴 그리는 것은 허락을 받았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일본 지도는 바로 박돈지가 베껴 그려온 지도를 보고 만든 거야.




이 세계 지도의 진짜 주인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조선 사람이 만든 지도인 건 분명해. 하지만 이 지도는 원나라가 그린 세계 지도가 없었다면 만들 수 없었어. 그리고 일본이 만든 지도가 박돈지의 손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았다면 완성할 수 없었겠지. 그러니까 이 세계 지도는 세 나라가 함께 힘을 모아서 만든 거라고 할 수 있겠구나.



이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조선이 만든 세계 지도로 원나라와 일본의 지도를 비교해 가며 각 나라의 영토와 수도를 한 장에 담아 그린 이 세계 지도의 이름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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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2: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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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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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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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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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4: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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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별 2013-05-30 13:11   좋아요 0 | URL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천하도를 국사 수업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중국에서 만들었던 세계지도를 바탕으로 그렸다는 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일본에서 베껴 그려온 지도도 이 지도를 제작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는 줄은 몰랐어요. 이 블로그를 알게 된 후 계속 들러서 올려주신 전편을 다 읽어봤는데요. 각각의 키워드마다 분량이 짧고 쉽게 쉽게 설명이 되어 있어서 과거 동북아 세 나라의 관계를 그려보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역사를 지루해하는 아이들도 재밌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2013-06-04 1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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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19: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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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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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10 원조를 뛰어넘은 자기




도자기,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올라? 아마 고려청자가 아닐까? 

고려청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문화유산이야.

세계 최초로 자기를 만든 나라는 중국이야. 그보다 500여 년 뒤부터 만들기 시작한 한국이 2위지. 일본은 한국보다 600여 년 뒤에 만들기 시작했고 말이야. 



송나라 자기를 뛰어넘은 고려청자


중국의 자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통일신라 말기의 일이야. 당시 중국의 선종 불교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어. 그전까지만 해도 불교는 경전의 연구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선종은 고요한 명상을 통해서 불교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파였어. 그런데 명상을 하면 자주 졸음이 밀려왔겠지? 승려들은 맑은 정신으로 명상을 하기 위해 차를 즐겨 마셨단다.


그래서 중국의 선종 불교와 함께 차와 차를 마시는 그릇까지 통일신라에 들어왔어. 당시 승려들은 청자로 만든 그릇을 특히 좋아했지. 차의 은은한 색과 향을 가장 잘 살려 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승려들 사이에 유행하던 중국 청자는 점점 널리 퍼졌고, 통일신라의 높은 신분 사람들도 청자를 좋아하게 되었단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자기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한 건 고려 초기부터야. 당시 중국은 혼란한 시대를 거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로 이주하는 도공들이 적지 않았어. 고려의 지배층은 이 도공들을 고용해서 자기 기술을 전수 받아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던 거야.


고려는 100여 년 동안 자기 생산 기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나갔어. 그 결과 마침내 탄생한 것이 바로 고려청자란다. 고려청자의 수준은 중국 송나라에서도 감탄할 정도로 뛰어났어. 특히 고려 사람들의 상감청자는 중국 송나라에서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하는 자기였지.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신 ‘서긍’은 이런 글을 남겼어.


“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이라고 부른다. 최근 들어서 자기 제작 기술이 더욱 정교해지고 색깔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송나라의 자기도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송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자기 제작이 가장 활발했고 기술도 가장 뛰어난 시대였어. 그런 송나라의 자기가 고려청자보다 못하다고 기록한 걸 보면, 고려청자의 제작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




분청사기와 성 하나를 바꾼 일본 성주


고려청자는 송나라 사람들도 놀라워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했지? 하지만 고려청자는 고려 말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도공들은 조선 초 무렵부터 ‘분청사기’라는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어. 조선 도공들은 옛날의 화려한 고려청자와 똑같은 자기를 다시 만들려고 했지만, 아무리 잘 만들어 보아도 빛깔이 좋지 않았어. 그래서 좋지 않은 빛깔을 감추기 위해서 흰 흙을 하얗게 칠했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분청사기야. 분청사기는 고려청자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고 고요한 멋이 있어서 고려청자 못지않은 예술성을 지닌 자기란다.


분청사기는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았어. 당시 일본 사람들은 차를 즐겨 마셨는데, 조선의 분청사기 찻잔은 고요함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의 취향에 잘 맞았던 거야. 일본은 조선의 분청사기를 수입했지만, 원하는 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어. 그래서 분청사기는 일본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단다.


일본 사람들은 조선의 분청사기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조선을 침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지방 영주에게 상을 내릴 때 땅을 주는 대신 분청사기를 준 적도 있다고 해. 또 일본의 어느 지방 영주는 성 하나와 분청사기 찻잔 하나를 맞바꾸기도 했다는구나.


일본에서 분청사기에 대한 사랑은 점점 커져만 갔어. 그리고 조선의 다른 자기들도 인기를 끌게 되었지. 일본 사람들은 조선의 자기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은 자기를 갖고 싶어졌어.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는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래, 자기를 직접 생산하는 것이었지. 




조선 도공의 손으로 새롭게 태어난 일본 자기 


임진왜란 때의 일이야. 조선에 온 일본 장수 중에 ‘시마즈 요시히로’라는 영주가 있었어. 역시 다른 일본의 영주들처럼 조선의 자기를 무척 좋아했단다. 그래서 전쟁 후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선 도공들을 붙잡아 왔지. 그렇게 조선에서 붙잡아 온 도공들에게 가마를 만들 땅을 내어 주고, 자기를 만들게 했어.


조선 도공들은 고향이 그리웠지만 돌아갈 수 없었어. 조선 도공들은 당장 먹고살기 위해 자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단다. 조선 도공들은 고향에서 만든 것과 똑같은 자기를 만들고 싶었지만 일본의 흙은 조선과 달라서 조선 자기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단다. 조선 도공들은 오랜 시간 동안 좋은 흙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좋은 흙을 찾아서 조선 자기와 비슷한 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 이제 일본도 조선 도공의 노력으로 자기 생산 국가가 된 거야.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 도공들이 만든 자기를 사랑했어. 그래서 일본 곳곳에 자기를 전파했지. 막부의 쇼군에게 바치기도 하고, 다른 지방 영주들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어.


조선 도공들은 대를 이어 자기를 생산했는데, 일본 사람들의 수요에 맞게 만들다 보니, 조선 자기와는 느낌이 다른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게 되었어.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사쓰마 자기’란다.


임진왜란 때 끌려가 일본 사쓰마 지역에 정착한 심수관 가문이 만든 자기야.

조선의 자기에 새로운 기술을 더해 많은 사랑을 받았지. 

12대에 이르러 일본 왕실의 그릇을 생산하는 자격을 얻었고, 

사쓰마 자기라는 이름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어.




최고의 자기는 어느 나라가?


한국은 중국에게, 일본은 한국에게 자기 만드는 기술을 배웠어. 그러나 자기의 품질과 예술적인 수준은 결코 가르쳐 준 나라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지? 한국은 세계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고려청자의 비색을 창조했고, 일본은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여 세계적인 자기 생산국이 되었으니까 말이야.




*

도자기 : 도기와 자기를 합쳐서 부르는 말. 도기는 1000도 정도의 불에 도토(진흙)을 구워서 만든 것이고, 자기는 1300도 이상의 불에 자토를 구워 만든 것. 빗살무늬 토기나 옹기그릇은 도기에 속하고, 앞에서 말한 고려청자나 분청사기, 백자는 자기에 속한다. 도기는 먼 옛날부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자기는 자토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온도를 높이는 기술의 개발이 어려워 쉽게 만들기 어려웠다.

상감청자 : 표면에 검정색이나 흰색 흙, 금, 은 등을 박아 무늬를 내는 기술로 만든 청자.



이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중국에게서 자기 생산 기술을 전수 받은 고려가 100여 년 동안 기술을 발전시켜 만들어낸 자기로, 중국의 사신에게서도 뛰어나다고 인정 받은 이 자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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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4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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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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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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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1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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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9 한중일 최고의 베스트셀러




《삼국지》 읽어본 적 있니? 책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만화나 영화로 보았거나, 삼국지 게임을 해 본 사람은 있겠지? 《삼국지》는 중국에서 탄생한 소설이야.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될 무렵, 그러니까 고려 시대 말기에 나온 작품이란다. 《삼국지》는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와 일본 사람들도 많이 읽었어. 지금도 세 나라 사람들이 꾸준히 즐겨 읽는 소설이지.



이야기꾼, 희곡 작가, 소설가가 함께 만든 작품


《삼국지》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를 바탕으로 쓴 역사 소설이야. 역사 소설 《삼국지》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한번 살펴볼까? 먼저 중국 한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


한나라가 세워지고 400년 정도 지났을 무렵, 조정은 간신들로 들끓었고 지방에서는 큰 반란이 일어났어. 이때 어지러운 나라를 구하겠다며 수많은 영웅이 나섰어. 조조, 유비, 손권이 그런 사람들이었지.


세 사람은 한나라 땅을 셋으로 나누었어. 그리고 조조의 아들 조비는 위나라, 유비는 촉나라, 손권은 오나라를 세웠지. 위, 촉, 오, 세 나라의 역사는 나중에 역사책에 기록되었는데, 그 역사책의 이름이 《삼국지》였어. 역사 소설 《삼국지》와 이름이 같지? 역사책 《삼국지》를 통해서 세 나라의 재미있는 사건이나 개성 강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알려졌단다.


역사책 《삼국지》는 어떻게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걸까? 당시에는 말재주가 뛰어난 이야기꾼이 많았어. 길거리에서 청중들에게 돈을 받고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들이었지. 이야기꾼들은 청중들을 모아놓고는 《삼국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어.


이야기꾼들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을 지어내기도 하고 영웅들의 활약을 더욱 실감나게 꾸미기도 했단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늘어났고,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아졌어. 영웅들이 실제로는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생겨났지. 그래서 어떤 희곡 작가는 배우를 등장시켜 연극을 상연하기도 했단다.


중국의 전통 연극인 경극에 등장한 관우와 유비의 모습이야.


역사책 《삼국지》가 이야기꾼과 연극을 통해 퍼져나간 지 1000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무렵, 나관중이라는 사람이 역사책 《삼국지》에 이야기꾼과 희곡 작가가 지어낸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아 한 권의 소설책으로 엮었어. 그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바로 세 나라의 스테디셀러가 된 역사 소설 《삼국지》야.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소설 《삼국지》의 제목은 잘못된 거야. 원래 나관중이 지은 제목은 ‘삼국지연의였어. ‘삼국지연의’를 짧게 줄여서 ‘삼국지’라고 하다 보니, 《삼국지》로 잘못 알려진 거지. 이렇게 줄여 말하면 역사책 《삼국지》와 제목이 같아져 무척 혼란스러울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지금부터는 ‘삼국지연의’라고 고쳐 부르기로 하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명나라와 청나라 때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이었어. 수많은 출판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이 책을 출간했지. 그때 나온 《삼국지연의》는 100종이 넘을 정도였다고 해. 출판사마다 자기네가 낸 《삼국지연의》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책에 재미있는 그림을 넣기도 했다는구나.




“전하, 이 책은 절대 읽지 마소서!”


《삼국지연의》는 이웃나라 조선에도 전해졌어. 누가 언제 처음 조선에 가져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명나라를 다녀온 조선 사절단 일행이 가져오지 않았을까? 북경에 갔다가 서점에서 잘 팔리는 걸 보고 호기심에 사 왔을지도 모르지.


《삼국지연의》는 조선에서도 인기가 많았어. 첫 독자들은 양반들이었지.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한자를 몰라서 책을 읽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조선은 유학을 숭상한 나라라고 했지? 유학에서는 역사 공부를 중요하게 생각해. 하지만 소설을 읽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했어. 《삼국지연의》는 역사를 바탕으로 쓴 책이지만, 어쨌든 이야기를 지어낸 소설일 뿐이잖아? 그래서 조선 유학자들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가득한 소설이라며 《삼국지연의》를 비판하곤 했단다.


그래도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어. 양반들도 겉으로는 “이런 책은 나쁜 책이야. 읽어서는 안 돼!”라고 말하면서 혼자서는 몰래 훔쳐보며 영웅들의 무용담에 흠뻑 빠져 들곤 했지. 이렇게 양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삼국지연의》는 왕실에도 전해졌고, 심지어는 왕도 읽는 책이 되었단다.


어느 날, 선조 임금이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삼국지연의》의 한 장면을 떠올렸어. 


“장비가 장판교에서 큰소리로 꾸짖어 조조의 군사들을 달아나게 했지…….” 


그러자 어느 신하가 “전하, 《삼국지연의》는 황당무계한 소설일 뿐입니다. 무뢰배들이나 읽는 책이니, 절대 읽지 마소서!”라며 임금을 나무랐어.


신하의 잔소리를 들은 선조의 기분은 어땠을까? 무척 자존심이 상했겠지? 하지만 이런 상상도 해보게 돼. 선조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은 그 신하도 어쩌면 《삼국지연의》를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그래놓고는 나쁜 책이라며 왕에게 잔소리를 해댄 건 아닐까?




컬러 그림이 들어간 《삼국지연의》


일본에서도 《삼국지연의》의 인기는 우리나라 못지않아.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역사 소설이지. 일본 사람들은 언제부터 《삼국지연의》를 읽었을까?


《삼국지연의》의 첫 장은 '도원결의'야.

복숭아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는 부분이지.

삼국의 사람들은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영웅들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중국의 《삼국지연의》가 일본에 전해진 건 임진왜란이 끝난 후쯤이야. 조선을 통해서 들어왔을 수도 있고,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접 전해졌을 수도 있지. 당시에는 중국에서 유학하며 공부하고 있는 일본 승려가 많았어. 어쩌면 일본 승려들이 귀국하면서 《삼국지연의》를 가져왔을지도 몰라.

《삼국지연의》는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어. 일본은 조선보다 더 일찍 자기네 나라 말로 번역해서 출간했어. 그 정도로 백성들 사이에서 빠르게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지. 


일본에서는 특히 그림이 들어간 《삼국지연의》가 큰 인기를 끌었어. 일본은 판화가 발달한 나라였어. 특히 색이 화려한 컬러 판화가 유행했지. 일본에서 나온 《삼국지연의》 중에는 400개가 넘는 컬러 그림이 들어간 책도 있었다고 해. 글만 읽어도 재미있는데 컬러 그림까지 함께 보면서 읽으면 얼마나 재미있었겠어?




세 나라가 함께 즐긴 《삼국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한 《삼국지연의》는 세 나라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어. 특히 외적의 침입이 잦았던 조선에서는 《삼국지연의》를 읽으며 영웅이 나타나 외적을 막아주길 바랐고, 일본에서는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보며 충성과 절개를 가슴 깊이 새기곤 했단다.



*

간신 : 거짓으로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 제 이익만 찾는 간사한 신하.

무뢰배 : 예의 없이 불량한 짓을 일삼으며 다니는 무리.



이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나관중이 역사책 《삼국지》의 내용에 이야기꾼과 희곡 작가들이 《삼국지》를 바탕으로 덧붙인 이야기를 모두 모아 엮은 역사 소설로 흔히 《삼국지》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는 이 책의 이름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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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0 1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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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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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0 18: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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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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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1 2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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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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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7 1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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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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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스푸가 들려주는 세 나라의 교류 이야기

#8 함께 만든 대장경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뛰어난 가치를 지녔지. 하지만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만 만든 것은 결코 아니야. 그리고 우리나라의 불교에만 영향을 끼친 문화유산도 결코 아니고 말이야.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들려줄게.



세계 최초의 대장경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야. 부처가 태어난 인도에서 탄생했지.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건 한나라 때의 일이야. 그리고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단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 때 불교를 받아들였다는 거 알고 있지?


불교에도 기독교의 《성경》처럼 경전이 있어. 부처의 가르침을 적어 놓은 경전을 불교 경전, 즉 불경이라고 부른단다. 처음에는 부처의 가르침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어. 하지만 입으로만 전하면 내용이 사라질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가르침을 글로 옮겨 적기 시작했단다. 


하지만 일일이 옮겨 적으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 그래서 목판에 새긴 후 종이에 찍어 인쇄를 하기 시작했지. 물론 목판을 새기는 건 글로 적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을 거야. 하지만 한 번 새겨 놓으면 원하는 대로 찍을 수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지.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은 오로지 경판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지.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이런 건물을 '장경각'이라고도 해.


중국은 목판 인쇄술을 가장 먼저 개발한 나라야. 목판 인쇄술 발달에 기여한 건 불교 승려들이었어. 당나라의 승려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목판에 새기고, 인쇄를 해서 다양한 불경을 만들었어. 그러니 자연스럽게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게 되었지.


불경의 인쇄가 늘어난 건 송나라 때의 일이야. 송나라 승려들은 전국에 있는 불경들을 모두 모아, 마치 백과사전을 만들듯 순서를 정해서 하나로 묶었어. 그리고 수많은 목판에 경전의 내용을 전부 새겼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대장경이란다. 세계 최초의 대장경이었지. 송나라 사람들은 이 대장경을 ‘개보대장경’이라고 했어.  




고려가 처음 만든 대장경


《팔만대장경》의 원래 이름은 《재조대장경》이야. ‘다시 만든 대장경’이라는 뜻이지. 그런데 전체 경판의 수가 8만 장이 넘기 때문에 흔히들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거란다. 몽골군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아 내기 위해 만든 거라고 하는데, 만드는 데 16년이나 걸렸고, 8만 장이 넘는 목판에 모두 5200만 자 정도가 새겨졌다는구나.


그런데 《팔만대장경》이 ‘다시 만든 대장경’이라면, 그보다 앞서 만든 대장경도 있냐고? 맞아, 고려 시대 사람들은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전에 《초조대장경》을 만든 적이 있단다. ‘처음 새긴 대장경’이라는 뜻인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몽골군이 침략했을 때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말았거든.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만든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었어.


《초조대장경》은 1011년에 시작해서 70년이 넘게 걸려 만든 대장경이야. 만들기 시작한 날로 따지면 《팔만대장경》보다 200년도 더 앞서 만든 셈이지. 《초조대장경》을 만든 건 거란족 요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서였어. 


《초조대장경》은 고려 사람들이 직접 불교 경전들을 모으고 순서를 정해서 새긴 것이 아니야. 앞에서 이야기한 송나라 《개보대장경》의 인쇄본을 수입해서 그걸 바탕으로 삼아 만들었지. 이 얘기에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어. 《초조대장경》 제작 과정에서 《개보대장경》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완성도를 높였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해서 《초조대장경》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이 되었단다.


하지만 《초조대장경》은 100여 년이 흐른 후 몽골군이 침입했을 때 불에 타서 사라지고 말아. 그래서 고려 승려들은 대장경을 다시 만들기로 했어.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재조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이란다.




대장경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초조대장경》은 몽골군에게 불에 타서 사라졌다고 했지? 그런데 1965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어느 한국의 학자가 일본에 있는 책들을 조사하다가 일본 교토의 ‘난젠지’라는 절에서 《초조대장경》을 발견한 거야. 물론 이미 불에 타버린 목판을 발견한 건 아니고, 인쇄한 종이 두루마리를 발견한 거였어.


발견된 인쇄본은 전체 《초조대장경》 6000권 중에 1800권 정도였지. 그리고 얼마 후 일본 쓰시마에서 600권 정도를 더 찾아냈단다. 이후 한국에서도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300권이나 찾아낼 수 있었어.


일본에 남아 있는 《초조대장경》 인쇄본은 경판이 불에 타기 전에 고려 사람들이 찍어둔 것 중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겠지. 그럼, 일본은 왜 고려의 초조대장경을 가져간 걸까?


당시 일본은 고려 못지않게 불교가 발전한 나라였어. 하지만 송나라나 고려와 달리, 당시 일본은 대장경판을 새길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어. 그래서 일본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초조대장경》 인쇄본을 받아왔던 거야. 그 인쇄본이 교토의 난젠지와 쓰시마에 남게 된 거고.


대장경을 모으는 일본의 열정은 고려 시대가 끝나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식을 줄 몰랐어. 일본은 예전에 고려에 요청한 것처럼, 조선에도 대장경 인쇄본을 요청했어. 이번에는 《초조대장경》이 불탄 후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을 요청했지. 


《팔만대장경》은 1488년 즈음에 완성된 해인사의 장경판전에 보관되어 있어.

해인사의 장경판전은 뛰어난 보존 기능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아 

《팔만대장경》보다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기도 했지.


《팔만대장경》은 조선보다 일본에서 더 귀한 대접을 받았어. 일본 승려들이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서는 불경을 백과사전처럼 모두 모아 놓은 대장경이 꼭 필요했거든. 일본 사람들이 《팔만대장경》을 얼마나 갖고 싶어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조선 세종 임금 때의 일이야. 일본에서 사신이 왔는데, 늘 그랬듯이 《팔만대장경》을 요구했어. 그런데 이번에 그들이 요구한 것은 인쇄본이 아닌 《팔만대장경》의 경판이었어.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했다고 했었지? 아무리 그래도 나라의 문화재를 함부로 줄 수는 없는 거잖아? 조선에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자, 일본 사신은 단식 투쟁까지 벌였단다.


“저희가 조선에 온 것은 오직 대장경판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선으로 떠나오기 전, ‘대장경판 없이는 절대 일본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차라리 여기에서 굶어 죽겠습니다.” 


결국 세종 임금이 세 번이나 말려서 겨우 단식을 멈추게 했다는구나.

조선에서 건너간 《팔만대장경》 인쇄본은 일본 승려들의 손에 전해졌어. 《팔만대장경》을 본 어떤 일본 승려는 이런 말을 남겼대.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완전한 책이다.”




일본은 《팔만대장경》을 어떻게 했을까?


《팔만대장경》은 일본 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어. 일본 승려들은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일본 곳곳의 절에 대대로 잘 보관하고 열심히 연구했어. 그래서 《팔만대장경》의 우수성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데에 크게 기여했단다.

고려 사람들의 뛰어난 기술로 만든 대장경에 세 나라 문화 교류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지?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은 중국 송나라의 《개보대장경》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어. 또한 《팔만대장경》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일본 승려들의 노력도 한몫했단다. 



*

위진남북조 시대 : 한나라가 멸망한 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의 시대. 여러 나라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멸망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으나 문화적으로는 크게 발전했던 시대.



연재물은 책과함께어린이에서 출간될 어린이책의 내용 일부분을 미리 보여 드리고자 시작되었습니다. 연재 정보와 필자에 대해 궁금하신 분은 '연재를 시작하며'를 봐주세요.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원하시는 분은 곤란합니다. 



★깜짝 퀴즈★

고려에서 《초조대장경》 다음으로 만든 대장경으로 몽골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 글씨가 새겨진 경판의 수가 8만 장이 넘는다 하여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데, 두 번째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로 불렸던 다른 이름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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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6 2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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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0 1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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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6 2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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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함께 2013-05-20 11:50   좋아요 0 | URL
정답입니다! 당첨 축하드립니다:D 적립금은 이벤트가 종료되는 6월 2일에 일괄 지급될 예정입니다. 다음 회 퀴즈도 놓치지 마세요^^

2013-05-18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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