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속사람‘과 ‘겉사람‘의 차이를 이야기하는데, 이런 글을 보며 오늘날까지도 그가 일종의 플라톤주의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한 이가 많았다. 그가 플라톤주의자라면 그가 부활과 창조의 갱신에 관하여 말하는 내용이 문제가 된다. 성인 바울은 자신이 이런 인상을 풍기기를 저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메시아 안에서 드러난 새 지혜가 세상과 겨룰 수 있으며 세상의 가장 뛰어난통찰을 이전의 틀과 다르고 이전의 틀보다 큰 틀 안에 융합할 수있다고 믿으며, 이런 점을 여기저기서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메시아가 전하신 ‘좋은 소식‘이 "참되고 매력이 넘치며 기쁨을 안겨 주는""모든 것이 제자리를 발견할 완전한 새 창조를 내다볼 눈을 열어 준다고 본다.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아도나이 에하드!" 이 위대한 기도는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었던 한 분 하나님의 이름을 아도나이"로 바꾸었는데, 사울 시대 지중해 지역 도처에서 사용했던 그리스어는 이를 퀴리오스 Kyrios(‘주‘)로 바꾸었다. 한 분 하나님, 한 토라, 한 주, 한 백성.
이스라엘은 그렇게 철저히 충실하겠다고 외쳤다. 바로 그 충실과함께 한 소망 곧 유월절의 소망이 다가왔다. 그 소망은 자유를 얻으리라는, 특히 외인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리라는 소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