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자가 생각하기에, 이 책의 주제는 ‘정당체제의 저발전’이라는 현대 한국정치사의 구조적 특징이다. 한 나라의 민주주의의 실천과 수준은 대체로 정치경쟁의 장에서 국가와 사회를 매개하는 대표체계인 정당의 발전 수준과 역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때,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적 위기는 정당체제의 저발전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정당체제 저발전의 기원과 구조, 그리고 그것이 낳은 현재적 모습을 분석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초판의 경우 결론 부분에 가서 ‘왜 마지막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인가’라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대안은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저자의 말에 비추어 본다면 다소 추상적인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개정판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었고, 저자가 이 부분을 쓴 이유와 개정판에서 삭제한 이유를 기술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밖의 자유주의나 공화주의와 같은 어떤 외부의 이념에서 이를 보강할 자원을 찾기보다, 그 내부로부터 이념적․제도적․실천적 자원을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하고 강화시키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답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정치(정당과 정당체계)를 통해 해결해 나가는 실천을 통해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본 것이다.

저자가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 중의 하나는 ‘민주주의의 질’이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를 부분체제(partial regime)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노동의 배제, 중앙의 초집중화 등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이 그대로 잔존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절차적 수준(최소정의적 차원)에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지만 실질적 차원에서는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개정판 후기에서 ‘한국적인 신자유주의적 정책레짐’의 일방적 실현, 사회의 양극화, 슈퍼재벌의 등장 등을 중심으로 다시 비판되고 있다. 그 원인은 다시 정당과 정당체제의 약함으로 돌려진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정당체제의 사회적 기반이나 이념적 스펙트럼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당체제는 “정당간의 경쟁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의 체계”이다. 정당체제의 문제는 개별 정당의 문제(당내 민주화)와 분석 수준을 달리한다. 복수정당제에서 나타나는 정당간 경쟁은 단일정당 내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경쟁과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지닌다. 저자는 이러한 정당간 경쟁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좁고 사회에 뿌리내리지 않을 때, 그것은 상층 편향적이기 쉽고, 일반 시민의 이해와 요구는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으며, 대중의 정치참여도 축소된다고 본다. 이러한 정당체제의 강화는 오직 정당들이 한 사회의 중심적 갈등과 균열에 기반해 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할 때(중심적 갈등들이 정당을 통해 전국화될 때)에만 가능하다. “갈등의 범위와 크기가 정당간의 차이를 의미있게 만들고 이들간의 정치가 민주적 내용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개정판 후기에서 저자는 이 말을 의미를 노무현정부의 정책을 사례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경제정책, 사회정책, 교육정책 등은 삶의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보편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전 사회에 직접적이고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한 사회의 생산체제와 분배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갈등의 범위가 넓고 그 강도가 크다. 그러므로 “정당체제가 이러한 갈등구조 위에 서 있을 때 정당간 정치경쟁은 보다 더 사회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갖게 되며, 그 결과 정부가 된 정당도 민주적이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는 경제정책, 사회정책, 교육정책 분야에서 신자유주의 논리가 일방적으로, 그것도 급속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며, 정당들과 민주정부는 이것이 가져오는 분배구조의 악화와 사회의 파편화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저자가 선거제도나 권력구조(헌법)와 같은 절차적․제도적 수준의 변화나 개선에 부정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변화가 전혀 민주주의에 개선에 기여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거제도가 바뀌어 특정 정당들의 자신들의 지지기반에서 획득하는 의석수가 줄어든다고 해서 정치가 질적으로 개선된다는 보장은 없다. 지역주의에 근거한 기존 정치인들과 정당의 독과점적 구조가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지만, 이러한 독과점적 구조가 깨진다고 해도 정당체제는 경쟁적이지 않을 수 있다. 실제 한국 정치의 현실은 여야 간의 경쟁이 극심한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상생’이나 ‘화합’의 정치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정당들이 좁은 정책적 스펙트럼 속에서 경쟁하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정당체제의 측면에서 볼 때 이들간의 경쟁이 활발하다고 볼 수는 없다. 경제 및 사회정책의 내용이 정치경쟁과 무관하게 경제관료들의 관장사항이 되고 있는 상황하에서는, 성장․시장지상주의와 노동배제를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가 확고한 정책레짐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는 절차적 측면의 개선이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안은 정치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힘들에 대항하며, 정당이 중심이 되는 정치체제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저자는 대중정당 모델을 중심으로 한 정당 민주주의 모델을 대안으로 보고 있다. 이는 서구의 정당체제 약화와 유권자의 유동성 증가에 바탕하여 주장되고 있는 원내정당, 정책정당, 선거전문가정당 모델과 구별된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개혁 논의는 후자의 주장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당파성(partisanship)의 약화가 문제가 되기보다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중심으로 당파성이 형성되고 이를 중심으로 경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일 수 있다. 더구나 사회 불평등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러한 경쟁의 공간은 충분히 열려 있다. 대중정당 모델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통해 정부가 국가를 민주화하고, 시민사회의 보수적 힘(강력한 시장 헤게모니)에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 정당의 주변부에서 등장하여 확고한 지지기반과 넓은 인적자원을 갖지 못한 노무현정부의 경험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낳은 사회적 힘은 여전히 존재하고, 이들은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과 실망으로 유동하고 있다. 정치의 중요한 과제는 정당이 이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이들의 참여와 지지를 바탕으로 정강정책을 통해 가치의 우선 순위와 나아갈 방향을 구체화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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