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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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읽는 이를 조용히, 그러나 깊고 날카롭게 가른다. 이 시집은 그의 소설에서 익히 보아온 차갑고 투명한 언어가 시라는 형식 안에서 더욱 응축되고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삶과 죽음, 상처와 회복, 고통과 침묵을 다루는 한강의 시들은 마치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미세한 불빛처럼 독자의 내면을 건드린다. 그는 삶의 상흔을 드러내되 과장하지 않고, 고통을 노래하되 절망에 머물지 않는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에서 "밥을 먹어야지 / 나는 밥을 먹었다"라고 담담히 적는 그의 문장은 지나간 상실과 체념 속에서도 살아가는 행위를 묵직하게 떠올리게 한다.


연작시 거울 저편의 겨울과 저녁의 소묘에서는 한강 특유의 절제된 서정성이 절정에 이른다. 반복되는 어둠과 겨울의 이미지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고독을 환기하지만, 그 끝에는 미세하게나마 온기와 빛을 암시한다. 특히 괜찮아에서는 상처받은 내면을 향해 건네는 "이제 괜찮아"라는 말이 마치 독자를 위로하듯 다가온다. 이 시집의 힘은 거대한 서사나 화려한 언어에 있지 않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 침묵의 바닥에서 길어 올린 단단한 언어들이 독자를 천천히, 그러나 깊이 흔든다.


20년에 걸쳐 써 내려간 시편들은 각기 다른 시기의 고통과 사색을 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커다란 통로처럼 이어져 있다. 한강은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되, 그것을 견디는 존재의 투명한 힘도 포착해낸다. 그의 시를 읽는 일은 어둠을 통과해 끝내 빛을 만나는 경험과 같다. 이 시집은 고통 속에서도 언어로 살아남고자 하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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