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는 곳으로 오늘의 젊은 작가 16
최진영 지음 / 민음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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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 이야기는 이제 진부한가? 글쎄, 그럴 수 있으려나. 최진영 작가의 <해가 지는 곳으로>를 사두고도 한참을 책꽂이에 두고 있다가 하루 정도의 시간을 가지고 읽어 내려갔다. 일전에 한 번 시도한 적 있었는데, 그땐 마음이 이끌리지 않아 멈췄던 자국이 책엔 그래도 남아 있었다. 직전에 좀 모호한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너무 꾹꾹 자국을 남기는 눈 위의 발자국 같았다. 곧 녹아 없어지거나, 다른 것들과 쉬이 섞여버릴 자국이라고 하더라도. 꾹꾹.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전 세계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한국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죽는다. 그 뒤 살아남은 사람들, 그리고 한국을 떠나 러시아의 허허벌판 어딘가를 달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린이의 간을 탐내고, 사람 수보다 많은 총을 들고 있고, 생존의 문제가 달린 그 척박한 땅 위에서도 성적 욕망을 분출하기 위해 ‘강간’을 하는 사람들과 그 ‘강간’의 시간에 붙잡힌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

그러나 이 소설의 핵심은 사랑. 세상의 종말 속에서 눈을 떠도 잘 보이지 않는 먼지 자욱한 오늘을 버티고 일어나는, 사랑을 놓지 않고 그곳이 어디든 멈추지 않고 가고 말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사랑 이야기. 저마다의 절망이 만들어진 결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지금을 함께 살아가도 서로 다른 순간을 지니고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길 위해서 만나 시작하는 사랑이 만들어낸 또 다른 사랑의 방식, 사랑의 모양, 결국 원과 같을 사랑의 이야기.

‘재앙을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 재앙에도 굶지 않고 뛰지 않는 사람들(p18)’. 저승보다 먼 곳에 세계가 있을 사람들의 이기 속에서 동생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멈추지 않는 도리와 재앙 속에서도 농담과 웃음을 만들어 가는, 하등 쓸모없는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품고 있는 지나. ‘꿈을 꾸고 우주인이 되었기 때문에(p176)’ 소리를 잃은 미소. 단 하나의 사랑, 단 하나의 길을 놓지 않고 살아갈, 살아남을 건지. 그리고 ‘너무 무난하고 뻔해서 위태로(p170)’웠던, 그래서 충분히 생각하지도 못하고 헌신하지도 못했던 ‘사랑’에 대해 저리게 깨닫게 되는 류와 그리고 단.

소설은 기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평생에 단 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A, B, C가 아니라 완벽한 고유명사로 기억될 사람이. 어떤 이는 지름길로 나타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가장 먼 길을 지난하게 지나고 모든 것에 무감해진 때에야 비로소 거기 있는 풍경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기적을 만나려면 그곳까지 가야 한다. 멀어지며 그것을 갈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죽고 사는 것보다 중요해지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 사랑이란 것에, 그리하여 그 기적이란 바람에.

서로를 향해 걷지 않았지만, 그 두렵고 낯선 곳에서 도리와 지나는 만난다. 사실 이 만남 자체가 기적이 되었다. 정상성에 부합되지 않는 비-이성애 관계의 두 여성인 도리와 지나. 그들의 입맞춤에 누군가는 더럽다는 듯이 침을 뱉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공기는 달랐다. 류는 그들과 함께 하며 ‘온갖 나쁜 것 속에서도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P165)’. ‘단 하루를 살더라도 평생처럼 살고(P64)’싶은 도리였으니까. 지나와 함께. 이 절망 속에서 버려두었던 감정과 외면해두었던 것들이 되살아났으니까. 더는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P100)’는 것을 이제 아니까. 모를 수 없으니까. 희망은 애초에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계는 점점 어둠에 다가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 있다. 세상을 끝까지 돌진할 수 있고, 멈추지 않을 수 있는 심장의 빨간 보석, 사랑이 있다.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민음사

아, ‘함께 보낸 무수한 어제가 직조해낸 우리만의 문양(166)’이란 문구가 있었다. 이 짧은 문장을 보고 울고 말았다. 그것은 사랑이라서, 사랑이어야 가능한 것이라서, 사랑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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