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0년 로마제국의 군대에는 총사령관이 둘이었다. 하나는 동부를 장악한 폼페이우스였고, 다른 하나는 서부를 차지한 카이사르였다. 최고 권력을 두고 두 사람이 투쟁하다가 카이사르가 승리했다.
위대한 로마 사람들은 이에 매우 분개했다. 그들은 이런 식의군주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위대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사랑했지만 그가 로마 시민 위에서 영원한 권력을 행사하고 로마의 모든 자유 시민 위에 군림하는 것은 반대했다. - P19
가이우스 카시우스Gaius Cassius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Brutus 같은 로마의 위대한 일급 시민들에 의해 카이사르는 원로원 황금 왕좌 옆에서 암살되었다.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 클레오파트라 Cleopatra를 무찌른 직후인 기원전 31년, 세상의 주인은 젊은 옥타비아누스Caesar Octavianus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아들로, 그의 전체 이름은 카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Caius Julius Caesar Octavianus였다. 그는 훗날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개명했으며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불리고 있다. - P20
네로 이후 여러 황제들이 연이어 등극하고는 금세 사라졌다.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해인 14년부터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가 암살당한 96년까지 열 명의 황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영국정복이 완결된 것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였다. - P23
두 사람은 카이사르 두 명을 새로 임명하기로 했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장군과 갈레리우스Galerius 장군이 새 카이사르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이 둘은 단지 카이사르‘일 뿐 아우구스투스까지는 아니었다. 최고의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둘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어쨌거나 네 명의 황제들은 제국을 4등분해서 문제없이 통치했다.
카이사르-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유래. 부황제정도 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자. 황제. - P32
콘스탄티우스에게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가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다. - P33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드디어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하는 문서를 공표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 P37
훨씬 덜 오만한 곳,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자신만의 도시를 세우고 싶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인 비잔티움‘을 선택했다.-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 - P39
오늘날 터키의 이스탄불이다. 이전까지는 비잔티움이라 불렸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누스의 새로운 로마‘라는 뜻에서 로마노바콘스탄티노폴리타나(Roma Nova Constantinopolitana)라는 이름을 새로이 붙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의미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주 불렸다. - P39
비잔티움제국은 15세기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지속되었다. 비잔티움제국이 기독교 국가였음에도 콘스탄티누스가 동양식통치 형태를 확립한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황제는 기독교도였지만 만민 위에 군림하면서 ‘신적 지위를 누렸다.
동방 교회의 흥미로운 형태인데, 모든 긍지와 영광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만, 그 한 사람인 황제 자신은 예수의 시종이었다. 이 동방 기독교는 러시아로 퍼져나갔으며, 거기서 그리스정교는 국교로 되었다. 그리스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이기도 했다. - P45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모든 종교를 허용하는 칙령을 내렸다.
361년부터 363년까지 현명하고 영리하면서 슬픔에 젖어 있던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us가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다신교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기독교를 증오했다. 그러나그는 매우 인간적이어서 갈레리우스처럼 기독교도들을 박해하지는 않았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적의 화살에 심장을 맞았다. 죽어가면서 심장의 상처에서 솟아나는 피를 손으로 받아 하늘로향해 던지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갈릴리 사람 예수여, 그대가이겼구나!" 율리아누스는 위대한 마지막 이교도가 되었다.
394년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공인되었다. - P79
이제 기독교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두 곳에 본부를 두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그리스 정교회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교회 내부에는 성상이 없고 성모를 그린 독특한 평면 그림이 있을뿐이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사제들은 결혼을 해야 하고 수염을 길러야만 했다. 그리스 정교의 통치자나 수장은 ‘총대주교Patriarch‘ 라는 칭호로 불렸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의교황만한 권력을 한 번도 지니지 못했다. - P80
당시 게르마니아는 라인 강 북쪽 지역 전체를 의미했다. - P87
게르만족 바깥 온도가 따뜻해지면 남자들과 젊은이들은 거의 알몸으로 돌아다녔다. 여자들은 아마포로 만든 긴 속옷을 입었지만 팔과 젖가슴은 내놓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는 가시나 핀으로여미는 망토를 입었으나 신체의 다른 부분은 가리지 않았다. - P91
서로 적대적인 유럽의 두 종족은 이렇게 만났다. 태양이 강렬한땅에 살며 눈과 피부가 검고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파란 눈의 거친 사람들과 접하게 되었다. 두 종족이 서로를 이해하고 만나서 섞이는 일은 불가능했다. 흰 피부를 가진 게르만계 종족들은, 거센 물결이 출렁이고 흰 눈이 덮인 채 겨울 해가 노랗게 비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파란 얼음이 뒤덮인 북해에서 태어난 것 같았다. 그들은 북해의 사나움과 힘을 갖고 있었으며 얼음처럼 날카로운 면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인, 즉 태양의 자식들에게 저항했다. - P86
게르만족은 구름 떼처럼 발트 해에서 다뉴브 강 상류로 이동하다가, 뒤에서 밀고 오는 훈족의 압력에 다시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P115
영국 주둔 군단과 마찬가지로 스페인 주둔 로마군단도 로마제국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407년 그들은 포악한 야만인 무리를 국내로 불러들였는데, 이들 야만족은 라인 강을건너 갈리아로 들어왔다. 이들 야만족 중에서 반달족이 주요 종족이었다. 반달족은 고트족보다 훨씬 더 사납고 더 파괴적이었다. 오늘날 잔인한 파괴 행위를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서 유래한다. - P121
415년에 알라리크를 이어 왕이 된 아타울푸스는 로마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개선시킨 후, 서고트군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파괴를 일삼는 반달족을 쫓아내기로 결심했다. 원정은성공했다. 그는 야만적인 반달족을 대파하고 북부 스페인에 왕국을 세웠으며, 바르셀로나를 수도로 정했다. - P121
게르만계 프랑크족은 갈리아북쪽 지배
490년에는 동고트족의 또 다른 테오도리쿠스가 이탈리아에동고트 왕국을 세우면서 서유럽에서 로마제국은 영원히 사라졌다.
540년경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롬바르드족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것이 사나운 롬바르드족을 남부 유럽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되었으며, 그들의 후예가 아직도 남부 유럽에 남아 있는 원인이되었다.
이 시기야말로 전투적인 야만인들이 무리를 지어 유럽을 뒤죽박죽 돌아다니던 진정한 암흑 시대였다. - P123
동쪽에서 검은 구름이 터져 나올 때마다 게르만계 및 슬라브계 야만족의 흰 구름은 유럽의남쪽까지 밀려나갔다. 그래서 훈족이 로마제국을 파멸시켰다는말은 게르만족 및 슬라브족이 그랬다는 말로 대체할 수 있으며 그들을 남쪽으로 밀어냈다는 말이기도 하다
훈족은 타타르족이거나 몽고족으로 피부색이 짙은 황색인 아시아계였다. - P129
기원전 300년경에 중국은 세계의 불가사의인 만리장성을 쌓기시작했는데, 바로 타타르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였다.
결국 만리장성의 축조가 끝난 600년 후인300년경에 군대를 이끌고 나가 타타르족과 훈족에게 통렬한 패배를 안겼다.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중국에게 크게 패한 그 이후였다. - P131
훈족은, 지금도 그들의 나라이며 그들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헝가리, 즉 훈족의 땅이라 불리는 탁 트이고 광활한 평원에 살고있었다. - P134
로마제국 이전에는 프랑스,영국, 아일랜드 모두 게일인이라고 불리는 단일 종족이 점유하고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켈트족이라고 알려진 민족이다. - P149
로마인들에게 ‘게일‘이라는 말은 발음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게일‘ 대신 ‘갈루스Gallus‘라고 불렀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갈루스‘가 이질적인 발음이었다. ‘갈루스‘는 다시 영어에서 ‘골Gaul‘로바뀌었다. 로마인들은 골 사람들이 사는 땅을 ‘갈리아(Gallia‘라고불렀다. 이곳이 지금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광대한 나라로 그 영토는 라인 강까지 뻗어 있었다. - P150
5세기와 6세기, 가장 어두웠던 이 시대에는 기독교만이 유일하게살아 있는 희망이었다. 갈리아의 무서운 혼란과 불안정 속에서, 일부 사람들은 싸우고, 훔치고, 불태우고, 훔치고 빼앗는 일에 지쳐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영혼의 평화와 평정을 원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수도원 생활이 제시되었다. - P173
프랑크인들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들로 구성된 게르만족의 연합체였다. 프랑크라는 말은 ‘도끼로 무장한 사람‘이라는뜻으로, ‘도끼 전사인 게르만족‘을 의미한다. - P175
훗날 ‘샤를마뉴Charlemagne‘로 불리게 되는 불리게 되는 샤를은 768년에 프랑크족의 왕이 되었다. - P190
799년 로마 시민들이 교황 레오 3세Leo III에 항거해서 폭동을일으킨 일이 있었는데, 레오 3세는 프랑크 왕에게 이전부터복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폭동이 일어나자 그는 샤를마뉴에게로도망쳤다. 샤를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가서 레오 3세를 다시 교황의 자리에 앉혔다. - P191
로레오 3세는 800년 크리스마스에 샤를이 바티칸에서 사람들 속에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참석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는 황금 관을 씌워주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한 번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이것이 거의 우리 시대까지도 지속된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이기도 했다. 샤를은 이제 샤를 대제(샤를마뉴)가 되었다. 그는 황제로서 유럽의 대부분을 통치했다. - P192
샤를마뉴 시절에 갈리아 사람들의 10분의 9가 농노의 신분이었으며 10분의 1만이 자유민이었는데, 이들 자유민의 대부분은 사제와 수도사들이었다. - P193
왕의 힘이 약해지면서 공작과 백작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하다가, 드디어 방대한 땅을 소유하는 사실상의 독립적인 영주로 변했다.
이렇게 해서 봉건제가 시작되었다. - P195
730년경에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성상聖像의 사용에 대해 이탈리아 교회와 일대 논쟁을벌였다.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어머니 조상彫像, 아기 예수의 조상, 예수의 조상 및 십자가를 좋아했다. 반면 비잔티움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성상들을 없애고 파괴하려고 했다.
로마의 주교들은 성상과 십자가와 제단을 고집했는데, 서방의 기독교도들도 이것들을 좋아했다. 결국 로마교회가 승리했고 비잔티움교회는 밀려나 서유럽을 내버려 둔 채 자신들의그리스정교를 흑해와 러시아로 퍼뜨려 나갔다.
당시 독일은 작센, 프랑켄, 튀링겐, 슈바벤, 바이에른, 로렌의 6개 대공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919년에 작센공국과 프랑켄공국의 사람들이 모인 의회에서 작센 대공 하인리히 Heinrich를 독일 민족의 왕으로 선출했다.
하인리히는 독일의 다른 대공국들의 지지를 얻어 사후에 아들 오토Otto를 다음왕으로 승계시키는 데 성공했다. - P204
962년에 오토는 신과 교황의 은총에 따라 로마황제의 관을 썼다. 신성로마제국은 이렇게 탄생했다. - P204
1073년에는 수도사 힐데브란트Hildebrand가 교황의 자리에 올라 그레고리우스 7세 Gregorius VII가 되었다. 그는 하나의 거대한수도원을 통치하듯 유럽 저녁 위에 군림하는 그의 교회를 통일시켰다. - P210
1152년에 바르바로사Barbarossa 혹은 붉은 수염이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Friedrich가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썼다. - P214
1177년 7월, 카노사에서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힐데브란트앞에서 무릎을 꿇은 지 정확히 1세기 뒤에, 황제 프리드리히는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에서 엄숙한 화해의 의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교황 알렉산데르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 P217
1198년에는 중세의 위대한 교황으로 불리는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ius III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자신이 직접 선출한 주교들에게 수사회를 통해 영향을 미치면서 영국 문제에 개입하려 했다. 그는 존John 왕을 무릎 꿇게 만들었고 영국에서 많은 공물을 걷었다. - P218
인노켄티우스 4세는 호엔슈타우펜가를 말살하기로 작정했고, 호엔슈타우펜가는 교황청의 권력을 말살하기로 작심했다.
이탈리아는 추악한 전쟁터가 되었다 - P227
전 유럽은 이런 식으로 두 개의열정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전투와 폭력에 대한 열정이며 또 하나는 축복받은 신성에 대한 열정이었다. - P235
마호메트는 609년에 아라비아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금세 세력을 확장해서 소아시아를 휩쓸고 콘스탄티노플을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동방의 성지들을 이미 장악한 상태였다.
아랍인들은 성지를 점령한 뒤에도 기독교의 총대주교가 예수의 성묘를 관장하도록 허락했다. - P236
1000년에 투르크족이 아시아에서 나와 아랍계 이슬람교도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1070년에는 이들이 소아시아를점령했고, 그다음에는 예루살렘도 손에 넣었다. 투르크족은 이슬람교도가 되었는데, 보다 개화되고 현명한 칼리프들이 했던 것과는 다르게 기독교도들을 점잖게 대하지 않았다. - P237
1090년경 ‘피에르Pierre‘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수행자가 성묘를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는 수도사였는데, 동시에 투르크인들에게 고초를 당한 순례자였다. - P237
1096년 8월 15일이 원정의 출발일로 잡혔다. 그러나 이른 봄부터 60,000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프랑스 동부와 로렌 지방에 모여 수행자 피에르의 인도 하에 즉시 출발하려고 기다렸다. 앞에는 8명의 기마병이 서서 15,000명의 보행 순례자들을 인솔했다. 다른 사람들은 수많은 분대를 형성해서그 뒤를 쫓았다. 그다음에는 수도사 고데스칼Godescal의 인도하에 15,000명의 독일 농부들이 행진했다. 이들과 좀 거리를 두고, 유럽에서 가장 저질적인 악당들 수천 명의 무리가 뒤따랐는데, 이들은 도둑질이나 다른 범죄를 노리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원정이 사악함에 가득 찬 바보짓임을 알고 있었다. 일부 백작과 기사 계급들은 3,000명의 기마대를이끌고 군중들을 돌보기 위해 뒤따랐다. 미친 군중들의 맨 앞에서는 성령이 들어 있다고 믿는 상징물로 거위 한 마리와 염소 한 마리를 데려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미치고 흥분하고 창피를 모르는 군중들의 행렬이 유럽을 가로질러 갔다. 피에르는 모젤 강과 라인 강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들이 제일먼저 한 일은 유대인 학살이었다. - P242
이제 십자군의 병력은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끔찍하기짝이 없는 안티오크 포위 기간 동안, 수천 명이 질병과 기아로 죽었다. 1097년 10월에는 60,000명의 기마병이 이 도시에서 거행된 사열에 참여했으나 1098년 6월에는 2,000명만 남아 있었으며, 이들 중 200명만이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 P255
1099년 7월 15일 오후 3시, 부용의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의 성벽 위에 승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랍의 우마르Umar가 도시를 장악한 지 460년만에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무서운 학살이 자행되었다. 칼에 찔려 죽은 이슬람교도의 수는 70,000명에 이르렀다. - P258
1250년에 이미 피렌체의 고위층 시민들이 휘황찬란하게 궁전을 짓고 동업조합을 설립하면서, 도시가 생기에 차고 발랄해져서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265년에는 피렌체 최초의 세계적 인물인 단테 알리기에리 Dante Alighieri가 태어났다. - P321
루터파 교도들이 수도사와 수녀도 결혼을 할 수 있다고선언했고, 루터 자신도 순결서약을 깨고 수녀였던 카타리나 보라Katharina Bora와 공개적으로 결혼했다. 이것은 유럽 전체를 들끓는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황제가 교황과 화해를 하자 1529년의 슈파이어 의회는 1526년의 결정을 번복했다. 이런 번복에 대해 루터파 교도들은 즉시 공식적으로항의했다. 이후 개신교도들은 모두 ‘항의자‘라는 뜻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불리게 되었다. - P364
프랑스 농민들의 처지는 폴란드, 스페인, 남부 독일의농민들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었으며 자유도 훨씬 많았다. 그런데폴란드, 스페인, 남부 독일의 농민들이 수동적이고 나태한 상태에 빠져 있는 반면 프랑스의 농민들은 살아 있고 분노할 줄 알았다. 프랑스 혁명의 도가니로 몰고 간 것은 사람들의 고통이 과도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불가피하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오히려 혁명의 원인이 된 것은, 눈부신 과거가 있었으나 그것은사라졌고, 이제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염원만 남아 있다는 정신적 분노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이 어리석음과 낭비를 지탱하기위해서 이용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분노였다.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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