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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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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깜박이는

 -편혜영의 '홀'을 읽고-

 

 

 

 

 

 

 

 

의학 아닌 의지

 

수많은 링겔과 약품, 바늘과 칼은 그의 몸을 살아있게 했지만 오기의 정신을 세상으로 돌아오게 한 건 어떤 희뿌연 것이었다. 막연하고 말할 수 없는 그것, 사지를 움직일 수도 없고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의 혀를 깨물지 않고 버텨나갈 수 있는가. 인간에게 가장 강렬한 게 생존의 법칙이라는 말만으로는 채 다 설명되지 않는다. 오기를 이 세상에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오기조차 알 수 없는 몸의 존재와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몸이 선사하는 희망 같은 절망, 혹은 절망 같은 희망이다.

그의 이름대로 그 뿐 아니라 그의 장모가 살아 있는 이유는 어떤 오기다. 그들은 무엇에든 질 수 없다. 아내와 장모보다 사실 오기와 장모가 더 닮았다. 장모는 긴 홀드레스와 커트러리를 정식으로 사용할 줄 알며, 예의범절과 시니컬한 유머를 던질 줄 안다.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집착한다. 그녀의 남편이 동료 교사와 연애 사건을 일으키면서 그녀 자신을 배신했고 그녀를 초라한 집구석에 처박히게 내버려두었지만, 그녀의 딸만큼은 그녀의 분신처럼 행복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를 바라보는 장모의 시선에는 자신이 이걸 가져도 되겠냐는 애도의 뜻뿐 아니라 그녀 자신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가질 수 없다는 소유욕이 드러난다. 만약 오기가 거절했더라도, 그녀는 그 반지를 가지지 않았을까? 오기의 호의는 장모에 대한 미안함이나 배려, 존중이 아니다.

오기와 아내의 삶은 그 둘만 아는 비밀이다. 장모는 그 비밀에 대해서 모른다. 그 비밀이 드러났을 때 장모는 오기를 묻어버리겠다는 듯 구덩이를 파지만, 오기가 그 구멍에 떨어졌을 때 느끼는 건 어떤 당혹감이나 장모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편안함, 편안함이다. 오기와 아내는 생에 대해 열렬하게 질투했지만 정작 그들이 원했던 어떤 것도 확실하게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이 사는 생은 타인이 보기에는 아름다운 쇼윈도우였지만, 실상은 텅 빈 쇼윈도우나 다름없다. 어차피 아내의 흥미가 바뀐다면 그 집도 바뀌게 될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절망했다는 걸 알고, 그래서 서로를 원망한다. 서로 원인인 양 다투지만 알고 있다. 그들이 서로의 절망을 가장 가까이 목격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서로를 증오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한없이 가여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기의 자기

 

유골이 담긴 자기들, 장모는 물질들을 가져다 두고 오기를 심판하려 한다. 그러나 과연 오기는 장모에게 심판받을 자격이 있는가? 장모는 그에게 쓸데없는 자격지심이 없는 남자라고 말한다. 오기는 자신의 삶이 여태껏 이상주의자보다는 아버지에 가까운 속물이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는 아버지에게 반감을 느끼는 한편 아버지와의 공통점을 뼈저리게 느낀다.

소설은 어떤 확정된 스캔들도 내놓지 않는다. 그저 미완된 관계들, 실패한 관계들을 내놓는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마찬가지고, 어머니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역시 아내와 오기도 마찬가지이고, 오기와 제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결국 현실에서 한계점을 찾고, 서로를 저주하거나 연민하며, 실패에 봉착한 자신들을 추스리느라 바쁘다. 이 무한한 이기주의적인 관계 끝에서 그들은 얼마나 더 이기적으로 굴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

장모의 어머니 유골함은 욘사마를 보기 위해 온 친척의 손에 의해 전해진다. 너무나도 사소한 이유에 의해 한 개인의 중요한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어진다. 간병인의 에피소드는 그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보이는 대신 그를 더 먼 곳으로 내팽개쳐두고 그가 가지고 있던 세상에 대한 양식을 짓밟는다. 그는 한낱 병신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이 짓밟혀가는 것을 지켜보는가, 40대가 되면 결국 죄를 짓기 좋은 나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지켜보면서 그 허무한 것들을 부숴버리겠다고 히스테리를 부리거나 혹은 그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속물이 아니면 잉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믿고 있던, 어떤 시인의 시에서 나왔다는 그 표현은 끝끝내 시집에서 찾지 못한다. 오기는 그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만 어떤 책에서 나왔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는 정말 시집에서 나온 것이거나 아니면 오기가 자신이 느낀 것을 시집에서 읽었고, 그 읽는 것을 들었노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자일 경우 오기는 살아남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사십대가 어떤 나이인지 이미 깨닫고 있으면서도 마주 보기를 피하면서 '오기'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결국 나약한 한 마디, 다스케테구다사이 뿐인 것을.

 

 

어떤 명멸

 

아내는 아름다운 집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녀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삶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이전에 집에 살았던 치매에 걸린 노파와 기력이 쇠한 남편을 떠올리고, 그들의 암모니아 냄새 때문에 땅에서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은것이라고 말한다. 그 서슴없는 태도는 그녀의 어떤 믿음, 삶에 대한 믿음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자신만큼은 그 노부부처럼 남루하고 형편없게 되어버리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녀는 새흙을 사서 섞고 꽃들을 심고 가꾼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오기의 생각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일까? 아내는 삶을 되찾고 싶어했다. 아름다운 삶을. 그녀가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삶을.

그들은 이사온 날 집안의 불을 다 켜두지만, 다음날 아침 그 불빛들이 다 꺼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전구가 꺼진 것이 아니라 불빛이 '사그라든 것이다'. 이 명멸들, 전구는 그들이 끈 게 아니었지만 결국 꺼졌다. 아내는 '몰타의 매'에 인용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전 아내가 그를 결국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만큼은 아마 소설에서 나오지 않았거나 그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그 이야기, 그 이후에 집중한다. 아내가 그를 찾았다면, 그들은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아내는 스스로 그 결말을 말한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들은 에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꿈이 가득했고, 약간의 허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 했던 때로, 그들에게 남은 건 환멸, 환멸 뿐이다. 다만 오기는 그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한편 그녀가 무서워하는 것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생각했고, 혹은 그녀와 함께 있겠다고 생각했고. 다만 그가 그 환멸을 그녀와 다른 방식으로, 같이 뼈저리게 느꼈을 때. 그는 과연 서로에게 서로가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 그 불안을 껴안은 채로 서로를 원망하고 밀어내고 때리면서도, 이혼이라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이 모든 것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들은 비로소 같이하게 되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방향으로 핸들을 꺾어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명백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과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모든 것은 일방적인 추측과 판정, 기미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선고 끝에서야 피고는 처벌되면서 법정으로부터 비로소 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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