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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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레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고-

    

 

 

어둠에게 말 걸기

 

처음에는 농담으로 시작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당혹스러울 만큼 처참한 죽음과 강간으로 끝난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요제프 K는 모르는 이유로 소송을 통고받는다. 무례한 두 남자가 그의 아침식사와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를 순식간에 두렵고 낯선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요제프 K는 소송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무죄를 입증하려고 한다. 하지만 죄를 알지 못하는 이상 그는 자신이 무죄라는 걸 입증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개처럼 죽는다.’ 카프카의 소설을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 중 대다수는 요제프 K에게 동정심을 보이면서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낙천주의자들이다. 솔닛이 가장 경계하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녀가 쓴 책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백만장자 남성이나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뜨거운 라떼를 쏟는 남성이 아니다.

낙천주의자들은 자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쉬운 법이라는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않는다. 모든 혁명들이 약속했으나 회피하고 지나간 것, 그 미지의 대륙은 바로 여성이었다. 지나치게 우상화하거나 비하하며 인지하기를 거부한다. 여성들의 거절은 그들에게 하나의 심판처럼 다가오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무자비하고 이유 없는 심판, 그러나 그 심판을 여는 소송 주체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다른 누가 그들의 존엄성에 소송을 건 것이 아니다. 이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을 만들고 수행하는 모든 역할은 다 그들 자신이다. ‘거절은 그들의 거울에 상처를 내는 것이고, 이러한 모욕을 견디지 못한다. 그 모욕은 바로 그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고백에 대한 거절, 그들 자신의 존재가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믿는다. 나아가 그들은 딜런 패로처럼 자신을 거절한 누군가를 거절할 가치가 없는사람으로 만들며, 그들이 고백했던 사실을 하나의 실수로 만들어 버린다. 그로 인해 그들은 다시 고결해진다고 믿지만, 사실상 그들은 자기 자신이 무너질 수 있었던어떤 순간을 겨우 회피한 것에 불과하다.

침묵이 긍정이라는 말만큼 폭력적인 관념이 어디 있는가? 물론 거울이야 침묵한다. 만약 누군가가 칼을 들고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할 때, 그에게 신이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 누군가는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 신의 침묵 또한 긍정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닌’, 오딧세우스는 키클롭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린다. 오딧세우스는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린다. 이는 거짓 행동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딧세우스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진실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목했던 것은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 그들을 분간할 수 없는 어떤 야만적인 시간이었다. 버지니아를 강하게 했던 건 바로 그런 어둠에 대한 그녀의 통찰과 꾸밈없는 시선이었고, 동시에 그녀를 강 바닥에 가라앉게 한 것도 그런 어둠이었다. 레베카 솔닛은, 버지니아 울프부터 수전 손택까지 죽 이어져 온 계보들을 가볍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둠에 대해 한 장을 할애한다. 우리는 불빛으로 이 어둠을 쫓아내려고 하지만, 어둠은 우리의 발밑에 끈질기게 붙어 있다. 그걸, 이 책에서는 맨스플레인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세월

  

영화 세월The hours에서는 세 여성들의 에피소드가 교차된다. 버지니아 울프와 현대의 댈러웨이 부인, 그리고 입센의 인형의 집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금발 머리의 전업주부. 저항적인 작가와 레즈비언으로서의 삶을 개척하고 모두에게 인망이 높은 중년 여성, 그리고 순종적인 전업주부 사이에서 우리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 쉬운 공통점은 그들의 심연적 공통성을 지적한다. 그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 그들이 찾아내고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시간에 의해 떠밀려 가버리고 상실된다. 그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들이 바란 것이 아주 사치스러운 것이었다면, 좀 더 쉽고 구체적으로 비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란 건 아주 소박한 것이었고, 그래서 당혹스러운것이 된다. 그들이 원한 건 자기만의 방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밀집해 있는, 평온하고 조용한 자기만의 방. 그러한 소박함은 공격의 정당성을 무너뜨리고 그들의 전투력마저 해체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더 격렬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노예제에 대해, 로맹 가리가 묘사했던 장면이 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자신의 집을 뒤집어 엎고, 아내를 강간하며, 아이를 죽일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흑인들이 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명백해지는 순간, 백인들은 더 맹렬하게 흑인들을 미워하게 된다. 흑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의 증오는 점점 더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크게 부풀어 오른다. 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어떤 욕구에 대해 말하는 대신 입을 다물고 나대지 않는 것이 모범이라고 여겨지게 된다. 그렇다면 나대는 남성은 어떠한가?

언어의 힘은 강력하다. “‘우리는 단어의 힘을 이용해 의미를 묻어버릴 수 있지만, 의미를 드러낼 수도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언어는 사소하지만 동시에 양분하는 강력한 벽이 된다. 화성과 금성에서 각기 따로 왔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해지기도 하고, ‘우정은 불가능하다고 말해진다. 가장 최악의 사례는 이 언어의 힘을 폭력이라고는 인지하되 여성들을 피해자로만 보는 남성의 시선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동등한 동료가 아니라 불쌍하고 가여운 피해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평등을 말하지만, 사실상 그러한 평등하지 않은 현실을 역으로 강요하게 된다. 만약 여성이 그들을 동정하는 순간, 그들은 견딜 수 없게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자이자 공감할 수 있을만큼 넓은 인식관을 가진 자신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동정을 모성애나 싸구려 감수성으로 폄하하는 시도들은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도들이 남성적인 것으로 포장되는 순간, 그러한 방어가 얼마나 끔찍한지 우리는 새삼 알 수 있게 된다.

프로이트는 환자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판단과 가능한 대처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그들을 거부한다.’ 그러한 처사에 대해 폭력이라고 비판하는 대신, 프로이트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라. 이는 모든 인간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심지어 여성 자신마저도.

 

 

 

우먼스플레인

우리는 아주 쉽게, 같은 피해자로서의 여성에게 공감할 수 있고 그들 또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성들이 착각하는 지점은, 그 곳이 안전하다는 생각이다. 스테퍼니 스털의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나오는 한 여대생은 현모양처를 꿈꾸며, 현모양처가 해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 또한 맨스플레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이 맞으며, 맨스플레인이 강요하는 대로 시끄러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평온한 사회 시스템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란다. 맨스플레인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가? 그들은 유별난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괜히 시끄럽게 만든다고 여기며, 아주 쉽게 나는 안 그런데라고 말한다. ‘과자를 받고 싶은 욕망, 강력하다. 그들에게 표백제를 하사하며 여성들을 과민하고 섬세한 이들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은 그들에게 동화하는 것이다. 역으로 그들의 사고를 이용하고, 그들의 이미지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 ‘여자니까라는 이유로 모든 걸 용서받는 것.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 그녀는 남성들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여성다운 여성으로.

여성들만이 뒷담을 하고 서로를 흉보며, 관계를 깬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남자들만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여성에 대한 험담을 해도 그게 험담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정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비판이 상대방이 모르게 이어진 이상 험담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차마 말하지 못한 이유를 대며 변명한다. 여자들은 여자들에게 허용된 싸움만을 해야 한다. 허용된 이미지와 허용된 행동만을 고집해야 한다. 그러한 억압 속에서 그들은 미쳐버릴 것만 같다고 느껴도, 자신 곁에 있는 비슷한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는 걸 보면서 견뎌낸다. 그렇게 그들은 같이 미쳐간다.

 

우리 문화에서 소녀들은 그들 자신을 왜곡하여 점점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위치로 몰아간다. 우리는 소녀들에게 대담하면서도 소심하고, 육감적이면서도 야위고, 성적 매력을 풍기면서도 얌전하라고 말한다. 서두르라고 하면서 기다리라고도 한다. 그런 식으로 몰리면 소녀들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와해된다.

    

레이철 시먼스 소녀들의 전쟁’ 158

 

남성이나 여성이나 어떤 공동체외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제거하려 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이상,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괴짜가 된다. 솔닛을 비롯한 수전 손택, 그리고 다른 여성들의 경우 페미니스트 여성이자, ‘시끄러운 여자로 언급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들과 같다고 자신하는 여성들에게 침묵하는 여성은 순종하는 여자로 치부될 수 있다. 둘 다 한 인간에 대해 존중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비판은 잘 하나, 이해하지 않는다. 이 이해는 바로 상대방의 가치관이 얼마나 옳은지 판단하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강점과 약점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그들을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이는 데에서 온다. 물론 이는 상하적 인식, 동정심이 아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비판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끝마쳤고, 그걸 갑옷처럼 온 몸에 두른 채 달려든다. 어디로? 그 비판을 통해 자신을 어떤 이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갈 수 있으며, 그게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비판은 너무나도 쉽다. 찌르는 방법만 알면 된다.

찌르기는 쉬우나, 고치는 건 어렵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순식간이지만, 고치는 건 단번에 할 수 없다. 이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 뿐 아니라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여성이 부당한 상처를 받아왔고 여성의 공동체적 공감을 통해 치유가 가능했다 치더라도, 그 치유의 한계치가 있다. 붕대로 감아도 피는 여전히 흘러나오고, 상처는 흉터로 남는다. 그래서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가 마주해야 할 것은 우먼스 플레인이라는 상처의 흔적, 서로에 대한 존중과 연대일지도 모른다.

솔닛의 책은 맨스플레인에 대해서 말하고 남성을 비판하는 것처럼 읽힐 수 있지만, 사실상 솔닛이 말하는 것은-우스꽝스러운 일화 속에 숨겨진 상처의 흔적, 그 흔적을 회피하지 말라는 강력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치료'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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