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장수미 옮김 / 단숨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추리 소설의 미덕은 바로, 어떤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거꾸로 매달려 죽은 소녀, 양 눈이 파여진 남자, 회색으로 단단하게 굳어버린 소년의 시체. 일상에서 스스럼없이 마주치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진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분명 미쳐버릴 것이다. 하지만 추리 소설에서는 그런 장면들을 그리고 있고, 그 장면들은 영화화된다. 왜 그런 장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영화가 되고 텍스트가 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다 살인마의 기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풀 수 없는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굳이 사람들 속에서 지옥을 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지옥은 언제나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추리 소설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조마조마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져도 결국에는 모두 다 수습되기 때문일 것이다.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은 늘 그렇듯이 자신들의 거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몇 마디 말로 사건을 마무리할 것이다. 미스 마플은 뜨개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매그레 경감은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내에게로 돌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이다. 모두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몰타의 매’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들은 점점 그 방향을 바꾼다. 이제 사건에 휘말린 탐정은 무사히 그 곳을 빠져나와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신없이 뒤섞이고, 탐정은 그 손놀림들을 주시하면서 어떻게든 ‘조커’ 카드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카드들은 다 조커가 될 수 있다. 그들은 범인에게도 피해자에게도 공감하지 못한 채, 마치 버려진 선물 포장지처럼 나뒹굴게 된다. 그들의 삶도 비참해진다.


  ‘눈알 사냥꾼’의 초르바흐와 알리나는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가 바라던 이 추리 소설의 마지막은 율리안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씩씩하게 자라는 것이고 알리나는 초르바흐의 아기를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율리안은 프랑크를 죽인 아버지에 대해 불신의 눈빛을 보내고 알리나는 더 이상 임신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뒤, 눈을 뜨게 해줄 방법을 찾아 돌아다닌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소설이 충격적이지만 충격적이지 않은 이유는 결국 그 끔찍한 ‘사건’에서 나온 우리가, 과연 초르바흐의 상상대로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리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힘든 일을 통과하면, 낙원이 기다리고 있는가. 현재에 와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힘든 일을 하루하루마다 넘기고 있는데, 하루가 끝날 때쯤에 마주하는 건 전철 차창으로 비치는 삼십년쯤 더 늙어 보이는 나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모두들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책을 읽는다. 레오나르트 슐리어가 자신의 딸이 죽은 그 때, ‘이리스’를 알아보기 위해 초르바흐와 계획을 짜다가 ‘비가 올까’라고 걱정하는 행동은 어떤 충격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가장 초라하고도 연약한 방패, 우리가 지긋지긋해하던 일상이 도리어 사건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동전처럼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일상은,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그걸 도로 찾아오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 일상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전의 ‘일상’이. 그렇다면 그 일상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율리안이 고른 쥐 미스터 존스처럼, 초라하지만 어떤 보이지 않는 얇은 ‘끈’을 찾는 것이다. 율리안은 이전처럼 ‘고맙다’고 말하고,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걸 기억해 낸다. 초르바흐는 ‘믿는 것’이 자신의 약점이라는 듯이 말하지만, 동시에 그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추리소설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이제는 따뜻하게 불이 켜진 난롯가도 없고, 자신을 기다리는 따뜻한 식탁도 없는데? 아주 희망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이 파국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잃어가는 그 ‘소중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요청하면서 인간은 살아남는다.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현재의 추리소설들, 피체크의 소설이 주려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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