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 펭귄클래식 14
김시습 지음, 김경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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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움의 이상

-김시습 금오신화’-

 

 

 

귀신과 산다

 

'금오신화'의 이야기들은 낯익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이한 분위기가 풍긴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듣고 전래동화로 읽은 이야기지만 우리와는 분명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귀신과 인간이 서로 혼례를 올릴 수 있다거나 염마왕이나 용왕의 초대를 받아 이세계로 구경을 간다는 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자칫하면 터무니없는 판타지로 읽힐 수도 있다. 과학과 논리가 모든 사실의 판단 기준이 되는 현대에는 더욱 그렇다. 또한 이 설화에서 나오는 그 누구도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화'들에서는 사실 삶과 죽음의 세계를 긋는 선이 불분명하다. 분명 이승과 저승을 갈라 놓고 있으나 인간이 마음을 먹거나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그 사이를 넘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가령 이생규장전에서 이생의 아내 최씨가 죽은 후에도 이생을 위해 그의 곁에 머물다가 '저승'으로 넘어간다거나 남염부주지에서 박생이 염마왕을 만나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가지 않는가. 이는 이승과 저승의 선이 불분명하다는 것을 단순한 혼란으로 파악하는 대신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서술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가 생각하는 귀신의 이미지는 피 한줄기를 입술에 물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귀신이다. 두려움, 그 자체다. 허나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귀신을 '귀신이 아닌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밝혀진다 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처한다. 그 이유인즉슨 이 '귀신'과 우리가 아는 귀신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사나운 기운과 요망한 도깨비가 사람을 해치고 사물을 미혹되게 하는데 이것도 귀신이라 할 수 있습니까?"

왕이 말했다.

"귀라는 것은 구부러짐이요, 신이란 것은 폄이오. 굽혔다 펴는 것은 조화의 신이요, 굽혔다가 펴지 못하는 것은 답답하게 맺힌 요귀라오. 신은 조화에 합치하기 때문에 시종일관 음양과 함께 하나 자취가 없고, 요귀는 답답하게 맺혀 있기 때문에 원망을 품고 사람과 동물에 뒤섞여 형체를 가지고 되는 것이오. 산의 요귀를 ''라 하고, 물의 요귀를 ''이라 하고, 수석의 요귀를 '용망상'이라 하고, 목석의 요귀를 '기망량'이라 하고, 만물을 해치는 것을 ''라 하고, 만물을 괴롭히는 것을 ''라 하고, 만물에 붙어 있는 것을 ''라 하고, 만물을 현혹하는 것을 ''라 하니 이 모두가 요귀들이오. '음양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이라 하니' 이것이 바로 신이오. 신이란 묘한 쓰임을 말하고 귀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하늘과 사람이 하나의 이이고 드러난 것과 은미한 것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으니,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이라 하고 천명을 회복하는 것을 상이라 하오. 시종일관 조화를 이루나 그 조화의 자취를 알 수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도라는 것이오. 그런 까닭에 '귀신의 덕은 성대하도다!'라고 한 것이오.

-남염부주지 78p

 

귀신과 요귀는 분명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아는 귀신은 요귀에 가까운 편이다. 흥미로운 점은 요귀는 분명 '기망량'이나 '' , 구체적인 뜻과 이름이 있는 반면 귀신에게는 구체적인 뜻과 이름 없이 그저 '조화를 이루나 그 조화의 자취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이승과 저승 사이의 모호한 선'과 같다. 결국 귀신은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존재다.

만약 이 '존재'가 두려워진다면, 그건 어떤 순간일까? 서양의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귀신' 중 가장 유명하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아버지의 귀신이 나온다. 아버지 귀신은 그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 허나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은 위협을 느끼며 두려워한다. 유령이 말을 거는 건 오로지 '햄릿', 그의 아들 뿐이다. 아버지 귀신은 햄릿을 응원해주거나 힘을 북돋워주기 위해 나온 게 아니다. 오히려 햄릿이 '두려워하는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끔 한다. 사실 햄릿이 언제든 눈을 감고 평생 '의심하기만 하는' 상태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허나 귀신의 존재로 인해 햄릿은 그가 외면하고자 했던 '진실'에 대해, 외면하려 했던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햄릿이 제대로 '복수해야 한다'는 책임감-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

이처럼 귀신은 사실 ''를 짓지 않는 이상, 그 자신이 어떤 '죄책감'을 가지는 순간 두려운 존재가 된다. '금오신화''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의 경우 귀신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두 인물 다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의 일화에서 나오는 귀신처럼 우리 나라의 귀신들 또한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진실'을 보여준다. 허나 그 '진실'은 두렵거나 끔찍하지 않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 '진실'은 더 강력하다. 그래서 '금오신화'의 이야기들은 '착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끝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물 안에서만 사는 한 개구리가 있다고 치자. 그 개구리는 우물 밖으로는 나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우물 안에 사는 다른 개구리보다 훨씬 더 크기가 크고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게다가 우물 벽과 구석에 대해 다 알고 있다. 그러면 그 개구리는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실수로 인해 우물 ''으로 나가게 되거나 ''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순간 그 개구리는 최고로 불행한 개구리가 되고 만다. 자신이 최고인 줄로만 알았고 자신이 아는 세상만이 제대로 '알만한 것'이라고 여겼건만, 여태껏 그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외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취유부벽정기'의 홍생은 부자이며 시를 잘 읊고 여자들도 그를 졸졸 따라다닌다. 가진 게 많은 만큼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가 월궁항아의 시녀이자 과거 은나라의 후예를 만나게 되자 그는 '현실'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그가 제일 나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홍생은 그 만남 이후 행복해지기는 커녕, 그전과 다르게 불행해진다. 그는 모든 것에 권태를 느끼며 방 안에서 뒹굴거릴 뿐이다. '남염부주지'의 박생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연구하는 '승려'와 교우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든 ''을 세우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저승'에 내려가서 염마왕에게 모든 ''을 들은 이후, 그는 더 이상 어떤 '탐구'를 하지 않게 된다. '용궁부연록'의 한생 또한 마찬가지로 용왕의 부탁을 받아 용궁에 온다. 그는 수많은 문장가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 또 용궁에 놀라운 것이 많다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야명주' 같은 용궁의 보물을 선사받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름다운 것'을 만나 행복했으나, 그 뒤에는 여지없이 불행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많은 것을 보고 접한 만큼 그들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물리적'으로는 닿지 않을 '이상', '아름다움'은 그들을 좌절시킨다. '아름다움'과 극반대라고 볼 수 있는 극적인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극단적인 것'의 끝을 보게 되는 순간, 인간은 그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된다. 일종의 '죽음 충동'인 것이다.

홍생의 경우 그는 '그가 잡을 수 없는' 여인을,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문장가를 만났다는 것을, 박생의 경우 그가 그렇게 원했던 '악인에게 공정한 처벌''질서'가 어느 한 곳에서는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한생의 경우 평생 둘러봐도 다 둘러볼 수 없을만큼 많고 진귀한 보물들의 일부를 보았다는 것을 그 '충동'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는 그들이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라 갑자기 그들 앞에 딱 등장한 '완성품'이다.

김시습은 이 '금오신화'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완성품'에 대해 쓰면서도 그는 그런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계를 꿈꾸는 순간 현실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는지를 토로했다. 이는 그의 행동에 대한 변명이자 대대적인 입장 발표나 다름없다. 그는 그런 '이상적인 세계'가 그에게 주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홍생과 박생과 한생들은 결국 '죽거나' '속세에서 떠난다'. 김시습 또한 속세에서 벗어난 산 중턱에서 이 글을 썼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이상'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다. 그는 홍생이나 박생, 한생들처럼 떠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에 한탄을 하기도 한다. 김시습은 마치 '햄릿'처럼 '이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이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그 이상을 죽여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지만그는 결국 그 '염증'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그 이상적인 세계를 실현해 나가고자 한다. '금오신화'를 통해,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는 그 자신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담

 

'금오신화'에는 두세편 정도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 허나 그 사랑하는 연인들을 다룬 이야기에서 여성의 이름-성씨라도 나온 건-고작 한 편에 불과하다. 다른 이야기들의 경우 남성의 성씨만 나오고 여자는 '여자'라고만 불리곤 했다. 다른 여자들이 나올 때면 헷갈리지 않도록 다른 여성의 성씨를 알려주곤 한다. 하지만 그래도 남성의 상대역인, 조연 여성들보다는 비중이 높은 여자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이를 두고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김시습의 편협한 여성관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유교적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허나 '이상'이란, 본래 현실과는 다르고 당장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어떻게든 다가가고자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이상주의자에게 '이상'이란, 평생토록 올 수 없는 것이다. 그에게 '이상'이란 추상적인 것으로, 오아시스의 신기루와 같다.

'금오신화''여자' 또한 추상적인 존재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덕목을 갖춘, 김시습에게는 이상적인 여자다. 반면 남성의 경우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이생규장전'에서 이생은 아무리 사랑하는 현재가 아름답더라도 후에 어떤 액운이 따라 붙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물론 늘 좋은 일만이 있을 수는 없다. 좋은 일이 있다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현재 그들의 상황에서 '미래의 액운'을 걱정하는 순간, 현재의 행복은 색이 바래 버리고 만다. 여자는 이를 알고 그를 꾸짖는다. 여자는 철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분간'을 하는 대신, 현재의 행복이 날아가기 쉬운 만큼 지금은 그걸 즐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녀의 세상에서는 모든 '좋은 일''나쁜 일'의 경계란 없고, 그녀는 오로지 현재, 현재에만 집중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태도'야말로 사실 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축'이다.

 

 

이생이 이어서 읊조리기를,

 

뒷날 우리 사랑이 새 나가면

비바람 무정하게 불어닥치리니 또한 가련치 않은가

 

하니 여자가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다.

저는 그대와 더불어 부부가 되어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데 낭군은 어쩌면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비록 여자라도 마음이 태연한데 장부의 의기로 어찌 이런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까? 뒷날 규중의 일이 새 나가서 부모님께서 저를 꾸짖고 책망하시면 제가 감당하지요. 항아는 방에 술과 과일을 차리도록 해라.”

 

-이생규장전. 32-33p

 

그로 인해 이 '금오신화'에서 초현실적인 존재로 나오는 이들의 대부분은 여자거나 염마왕, 용왕 등의 전설 속 인물들이다. 염마왕이나 용왕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읽어오던 전래 이야기나 설화 등에서 어느 정도 캐릭터가 잡혔지만 여자의 경우 캐릭터보다는 그냥 '초현실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초현실적인' 귀신에 속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혼 결혼식이나 다름없는 '만복사저포기' 또한 그렇다. 과거에는 이 이야기가 사랑 이야기였다.

허나 현대의 '만복사저포기'는 어떠한가. 한국 영화 '기담'은 사실 로맨스 영화다. 다른 로맨스 영화와 다른 점은 바로 '영혼', 귀신과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이 '만복사저포기'와 비슷하다고 할 만한 인물들을 볼 수 있다. 한 의사 견습생이 죽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는 '영혼 결혼식'을 하며, 여자와 '환상' 속에서 관계를 갖고 아이를 가지며 산다. 그 순간은 길 것 같았으나 실은 우라시마 타로의 이야기처럼 짧은 '순간'일 뿐이었다. 의사 견습생은 그 꿈이 끝나는 순간, 자신이 혼자 있다는 차가운 현실을 깨닫게 되며 머리카락 일부분이 하얗게 세어버린 것을 본다. ''이지만, ''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만복사저포기'에서도 양생은 여자와 함께 '며칠'을 보낸다. 그는 한없이 행복해하지만 결국에는 그 곳을 떠나야만 한다. 그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는 대신 주발을 받게 된다.

그 뒤로도 두 남자들은 귀신, 여자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영화 속 의사 견습생은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지만 다들 죽고, 결국 홀로 남게 된다. 여기서 왠지 소름이 끼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그건 '귀신' 탓이 아닐수도 있다. 그는 귀신에게 그렇게 말한다. 왜 이때껏 자신을 혼자 두었느냐고. 원망하듯이 말하는 어조에서, 사실 그 또한 양생처럼 여자를 '귀신'이 아니라 여자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복사저포기'에서 여자는 결국 남자로 환생해 '윤회의 아이러니', 양생과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기담'의 의사 견습생은 결국 그 '귀신'과 마주함으로써, 끝내 만나게 된다.

어떻게 본다면 '기담'의 엔딩이야말로 해피 엔딩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담''사랑과 영혼'이 되지 못했다. 현대에서는 '귀신과의 사랑'이 로맨틱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영혼'도 사실은 육체적인 사랑이 영혼의 사랑으로 이어진 것이니 온전한 '귀신과의 사랑'이라고는 볼 수 없다. 현대에서는 '분명하고 또렷한 것',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안전한 것'이다. 하지만 '추상적이거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 앞에서는 두려워하며 입을 다문다. 오답이 인정되지 않고 객관성을 중시하는 만큼, 자칫하면 정신병자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영혼과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는 '기담'은 과거의 '금오신화'와 달리, 기이한 이야기로서 '괴담'이 되어 버린다. '금오신화'를 현대화하여 영화로 제작한다면 아마 이 '기담'이 나올 것이다.

총 세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 이 영화에서는 '금오신화'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인물들이 일하는 병원이 정전이 된다. 그로 인해 병원 안 사람들은 촛불을 켠다.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만, 왠지 어두운 가운데 조금 음산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촛불을 나눠 받으면서 미소를 짓는다. 그 순간 그들은 일제 강점도 괴로움도 모두 잊어버린 것 같다. 그들을 억누르던 모든 경계는 사라지고 삶과 죽음, 선과 악이 뒤섞이고 현실과 비현실이 함께 어둠 속에서 녹아내린다. 빛나는 건 오로지 사람들의 '얼굴' 뿐이다. 그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전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 보면서-그 사람이 죽었든 살았든 간에-서로가 ''에 있다는 것만을,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가슴 속에 조그만 '', '이상'이나 '좌절'을 품고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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