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들, 자살하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8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이화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큰 아씨들

-제프리 유제니디스 처녀들, 자살하다

 

 

검은집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 '검은집'에서 팀은 '검은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검은집에서 본 그대로를 사람들에게 말한다. 팀이 말하는 건 마을 사람들이 꿈꾸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팀은 의기양양해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런 그를 '고깝게' 여긴다기보다는 위험하게 여긴다. 팀은 이전까지 마을이 암묵적으로 지켜오던 어떤 ''을 깨버린 것이다. 그들의 밝고 즐거운 나날들과 대비되는 검은집이 있어야 하는데 팀은 검은집의 '대비될 환상'을 부정한 것이다. 결국 팀은 마을 사람들의 폭행으로 인해 죽게 된다.

제프리 유제니다스의 '처녀들, 자살하다'에서 막내 서실리아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서실리아가 왜 죽었는지 의문을 품는다. 몇몇은 서실리아를 두고 도미닉 팔라촐로에 대한 사랑에 미쳐 그런 행동을 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서실리아의 일기장으로 서실리아가 단순히 상사병으로 죽지 않았다는 게 밝혀진다. 동갑내기 아이들은 서실리아가 죽기 전까지는 그런 '유쾌한 청소년'이 죽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못했고 묘지 인부들이 파업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안전지대'였기 때문이다. '서실리아가 죽던 시기'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흑인이 아직 백인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던 때였다. 하지만 서실리아가 죽고 나서 그 시기는 '안전'에서 '불안'으로, '백인들만의 사회'에서 '다인종 사회'로 서서히 바뀌는 시기다. 또렷하던 광경이 점차 흐려지는 것에 아이들은 놀라고 어른들은 은폐하거나 어물쩡 해결한 척 지워버리려고 한다.

어른들이 서실리아의 죽음에 애써 '해석'을 덧붙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해석을 '고정된 사실'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 사실 우리 나라에서 무당이 '굿'을 하는 건 죽은 사람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하는 행위이다. 일종의 '해석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그 무당이 정말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지, 다른 무당이 다른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는데, 혹은 그 유령이 기독교라면 그 무당에게 나타나겠는지. 수많은 변수를 따져야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애써 그 '변수'를 모른 척 한다. 손택은 어느 '사실'로 고정된 '해석'은 사실 그 진실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했다. 서실리아의 '죽음''고정된 해석'을 부여하려는 이 어른들은 그렇다면 무엇에 보복하려는 것일까?

그들은 '전쟁'을 겪었고, 죽음은 이제 저 멀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안전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자식을 아주 안전하고 행복하게 키운다. 그런데 그 사실을 부정하는 서실리아의 죽음은 그들에게 '보복 대상'이 될 만하다.

그들이 '서실리아'를 지우는 법, 어른들은 그녀를 '애도'하려 든다. '애도'란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허나 이 소설에서 '애도'는 벌어진 '실재'를 가리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서실리아가 죽은 '울타리'를 치움으로써 모든 게 해결된다고 본다. 리즈번 가족이 외부로부터 스스로 '차단'을 행하고 있는 이상 리즈번 가족의 집은 '검은집'이 된다. 사람들은 그 '검은집'의 존재를 못 견뎌하면서도 알기를 두려워한다. 울타리를 치우는 것, 사실 울타리는 서실리아가 죽은 이유가 아니다. 서실리아는 울타리가 없었더라도 끝내 죽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울타리가 없어졌으니 이제 '죽음'은 끝이 났다고 생각한다.

보니 또한 아버지에게 비꼬듯이 울타리가 이제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버지 리즈번은 서실리아의 유령에게 '왜 죽었는지' 묻고 싶어했지만 서실리아의 유령은 없다. 햄릿에서 유령은 자신이 죽은 이유를 말해주지만 유령이 없다는 것은 유령마저 입을 다물었다는 것을 뜻한다. 서실리아가 왜 죽었는지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그 누구도. 아버지 리즈번은 그저 그렇게 '이유없이' 또 누군가가 울타리 위로 뛰어내리는 죽음이 번복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힐 뿐이다. 주변에 도사리는 죽음을 '내쫓기 위해' 그는 창문을 닫는다.

 

그는 앞으로 내달려, 유령을 지나쳐서, 창문을 닫았다. 그때 유령이 돌아섰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이불을 둘러쓴 보니였다. "걱정 마세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사람들이 울타리를 없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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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리즈번은 '애도의 날'을 지정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서실리아의 죽음을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마치 이해한 것마냥 구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 자매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추측과 수많은 말들에 질려 자매들은 '부서지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사람들은 서실리아를 정신병 환자로, 탈선한 청소년으로 몰아간다. 이에 함께 희생되는 건 서실리아의 자매들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이 완벽한 '인형의 집' 같은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위협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검은집'에서 가장 여운이 남았던 건 팀의 죽음이 아니었다. 팀의 죽음 후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팀이 죽게 된 원인을 제공했으나 '평화롭게' 풀려 나와 맥주를 즐긴다. 그들은 팀을 가엾게 여긴다. 한 남자가 그들에게 '팀이 잘 죽지 않았느냐'고 동의를 구하지만 사람들은 애써 그 진실을 부정한다. 그래야만 그들은 '도덕적'이고 '인형의 집' 같은 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녀들, 자살하다'의 어른들 또한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상적인 삶'을 위해 실재를 가리려고 한다. 허나 그 실재를 가린다는 건 곧 그들의 '이상적인 삶'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리즈번 부부 또한 마찬가지다. 어머니 리즈번은 아이들을 '사랑했고' '보호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건 감금이나 다름 없는 행위였다. 아버지 리즈번 또한 '침묵'으로 그 행위를 방관한다. '위화감'을 파악할 수 있는 건 아이들이다. 그들은 '새로운 것'의 충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매들의 '생활''생각'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단순히 '서실리아'가 왜 죽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 자매들이 그 죽음 뒤에도 '분명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로 인해 자매들은 '개별적인 존재'들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서실리아와 보니, 메리, 럭스, 터리즈를 한 덩어리로 묶어서 본다. 서실리아가 죽었다는 건 곧 그들 덩어리의 한쪽이 썩었다는 뜻으로 치부된다. 세상의 눈에 그들은 이미 다 '죽은 사람들'로 보일 뿐이다. 죽음과 접촉했기 때문에, '검은집'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외부로부터 격리되고 집으로부터 격리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이 세상은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향이 아니고,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잔디를 돌보고 잡초를 뽑아 댄다 한들 사실 잔디 따위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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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처럼

 

리즈번 자매들은 트립 폰테인과 럭스의 관계 덕분에 무도회에 가게 된다. 하지만 그 무도회는 정말 그들에게는 '어색한 것'이었다. 그들 또한 다른 여자애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작은 아씨들'에서 나오는 자매들처럼 정숙하고 바른 몸가짐을 갖춰야 하며 '같이' 움직여야 한다. 개별적인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그들의 어머니는 마치 '푸대자루' 같은 드레스를 만들어 준다. 그래도 자매들은 즐겁게 그 드레스를 입고 나가지만 무도회장에 들어선 순간 그들은 알게 된다. 다른 여자애들이 입은 드레스와 그들이 입은 드레스는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것을. 트립 폰테인이 럭스에게 관심을 두는 건 사실 '럭스'가 다른 아이들과는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럭스와 '입맞춘 순간'을 하나의 자극으로 여긴다. 그 순간 럭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끝난 것이다. 실제로 그는 경기장에서 럭스가 여타 다른 여자애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안 순간 '질린다'. 게다가 그들은 그 파티 이후로 영원히 그 '' 안에 갇히게 된다.

예전에도 그들은 그 집 안에 갇혔다. 첫번째 파티는 그냥 아기들의 생일 잔치와 같은 느낌이었다. 서실리아가 '빠지고 싶다'고 하는 건 그녀가 '죽고 싶다'기 보다는 '죽을 수밖에 없을만큼 지루한' 파티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를 위한 파티를 열어줬는데 왜 그녀가 싫증을 내는 것인가?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공구에 대해 설명해주고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보드게임이나 하는 파티가 무엇이 재미있겠는가.

자매들이 그 ''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틀은 더 단단히 죄여온다. 럭스가 꾀병을 부려 '병원'에 갔을 때도 그녀는 집에서 나오기 위해, 더이상 그 틀이 옥죄여지지 않도록 의사에게 거짓말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의사는 그 말을 들어준다. '꾀병을 부리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집', 어머니가 병원에 실려가는 럭스를 보면서 손을 흔드는 것도 왠지 무서운 징조로 보인다. 어차피 너는 '이 곳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라는 듯한 제스쳐로.

'관찰자들'은 그녀들에게 어떻게든 연락을 하려고 애쓴다. 검열당할 수 있는 말 대신 노래로, 그리고 행동으로. 자매들은 그 덕분에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었을지는 모른다. 그녀들은 '대학'에 가면, 어른이 되면 이 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점점 지나가는 시간과 그에 비해 달라질 것 없는 현실은 그들을 좌절시킨다.

결국 그녀들은 그 ''에서 빠져나가기를 선택한다. 그들이 '관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는 단순히 그들의 탈출을 도와달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이 '', ''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선언'이다. 하지만 관찰자들은 또다시 그들의 '메시지'를 오인한다. 그들은 그녀들을 '도와주겠다고' 그들의 집을 찾아가지만 사실 그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방해'였다. 럭스는 자매들이 '떠날 수 있도록' 그들을 붙잡는다.

 

다만 나중에 우리가 깨달은 것은 그녀와 언니들이 평화롭게 죽을 수 있도록 우리를 그 자리에 붙들어 놓기 위해 그녀가 우리의 벨트를 끌렀던 거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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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스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진짜 '관찰자들'의 말대로 떠날 수 있다면, 그녀는 자매들의 죽음을 막고 함께 도망가기를 택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살아 있는 한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관찰자들' 또한 그들과 같은 어린애로 결국 '보호자'라는 틀에 옥죄이게 될 것이다. 그 틀에서 도망치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그들을 '강간'하려던 사내를 죽이게 된다. 실수든 고의든 간에 그들은 사실 '피해자'.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살인마'로 몰아간다. 그녀들은 점점 세상의 틀에서 도망치다가 영락없이 경찰들에 의해 '범죄자'가 된 자신들을 보게 된다. 그들이 '범죄자'가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들 자신밖에 없다. 결국 그들은 그 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차를 몰고 벼랑으로 '떠난다'. 자매들 또한 '죽음'으로 그 틀에서 빠져 나간다. 이제 그들은 자유롭다. 그들의 육신만이 어머니에 의해 '칠칠맞지 못한 터리즈'로 남아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과연 '죽음'밖에 답이 없었는지 묻는다. 어쩌면 그들의 희망대로 자매들은 '괜찮아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들을 죽인 건 '곧 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병을 방치하고 격리시키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이 상황을 많이 봤다. 한 지역에서 어떤 ''이 나타나면 그 지역을 폐쇄조치부터 하고 그들을 전부 '병자'처럼 취급하는 것, 마치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것마냥 구는 것. 그들이 겉으로 바라는 해결책은 '백신을 찾아내는 것'이지만 사실 진짜 바라는 것은 '병자들과 병이 모두 함께 죽는 것'이다. 병자가 입을 여는 순간, 그들이 진짜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자매들의 죽음은 우리가 모두 암묵적으로 바라던 '침묵',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의 '저항'이었던 셈이다.

 

 

 

 

 

실패자 셜록

 

앞에서도 말했듯이 리즈번 자매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증명해 주는 건 '관찰자들'이다. 그들은 리즈번 자매들의 이름과 그들의 특징, 기호를 알고 싶어한다. 물론 처음에는 서실리아가 왜 죽었는지, 그녀의 '알리바이'에 대해 알고자 한다. 그러나 그 추측들은 '빗나간' 것이 된다. 그들은 어떻게든 그들의 죽음에 대해 필사적으로 캐내고자 한다. 그들의 '구출 시도''방해 시도'가 된다. 아이들의 태도는- 사실 '해석하고자 한다'는 것에서는 어른들의 태도와는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들과 어른이 다른 점은 바로 '자매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인지했는지의 여부다. 아이들 또한 그들을 '하나의 덩어리'처럼 본다. 그 시선 때문에 자매들은 결국 같이 몰려 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점점 그들의 차이를 파악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매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게 된다.

'자매들'은 사실 그들의 '의뢰인'이자 '범인'이다. 관찰자들은 자매들에 대해 '알아내야 하고', 그로써 자매들을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그나마 '도우려는 것'은 너무 늦다. 셜록 홈즈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다. 가끔 직접 발로 뛰기도 한다. 관찰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셜록 홈즈처럼 그들의 우편물이나 학교 성적, 친구들에게 자문해 본 것들로 그들이 왜 죽었는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고자 한다. 허나 그들은 사건의 진상을 아는 데에 실패한다. 셜록 홈즈는 '실패'한 것이다. 그들은 '실패'로서 깨닫게 된다. 진짜 '진상'은 알 수 없다는 것을.

김연수의 '한달을 더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 나오는 인물은 여자친구가 왜 죽었는지 알기 위해 그녀가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들을 찾아 읽고 낭가파르바트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그 산에서 실종되고 만다. 그 실종에 대해 사람들은 또다시 수많은 '추측''단정'을 흩뿌린다. 그들은 그가 '등정에 실패'했다는 것으로 규정짓는다. 하지만 그를 사랑했던 왕오천축국전의 연구자는 그가 끝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상상한다. 그녀는 '단정'짓지 않고 '상상한다'. 그녀의 상상은 터무니없지만 사실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의 '죽음'은 사실 '여자친구가 죽은 이유는 사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실패이면서도 성공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면 '성공'으로, 혹은 '실패'. 그런데 어찌 한번에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서실리아가 '정신병'으로 죽었다는 듯이.

관찰자들에게 '해석'이 불가능했던 리즈번 자매들은 이제 정말 침묵하게 된다. 그녀들이 살아있다 하더라도 관찰자들이 그녀들을 끝까지 사랑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그녀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차마 명료한 해석을 덧붙일 수 없기에 그녀들이 영원한 '미스테리', 그들의 '미결 사건'으로 남았다는 것 뿐이다. 관찰자들은 그렇게 그녀들을 끝까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오직 우리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과거에도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듣지 못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나무 위 집에서, 가늘어져 가는 머리카락과 출렁거리는 뱃살을 하고, 그들이 영원히 혼자 있기 위해 간 방, 홀로 죽음보다 더 깊은 자살을 한 곳, 퍼즐을 완성할 수 있는 조각들을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그곳에서 나오라고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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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처녀들, 자살하다작은 아씨들의 패러디 축소판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우선 아버지 리즈번은 작은 아씨들의 아버지처럼 전쟁에 나가 있지는 않으나 가정에 어떤 영향도 행사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매들의 경우 작은 아씨들과 다르게 다섯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어머니에 의해 행동 규율에 알맞은 구식 숙녀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작은 아씨들의 경우 화목하고 소소한 이야기이지만, 그 소소함이 현대로 온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그들은 큰 아씨들이지, 작은 아씨들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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