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 민음사 모던 클래식 51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아프리카로 가는 길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숨통'을 읽고-


인 오브 아프리카

아프리카라고 하면 우리는 으레 코끼리와 치타, 숨막힐 정도로 뜨거운 햇빛을 생각한다. 그 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검은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며 웃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우성들이 한데 모여 미스테리한 의식을 거행하고, 몇몇은 거기에서 신성함을 느낀다고 호들갑을 떨기 마련이다. 혹은 유일신을 섬기는 모 종교의 교리와 어긋난다고 불손하게 볼 수도 있다. 허나 이는 과거의 이미지, 과거 중에서도 편견에 찬 시선이 포착해 낸 이미지일 뿐이다. 아프리카가 유럽 대륙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무렵, 영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사진은 아프리카 원주민 여자가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사진이었다. 원래 원주민들은 벗고 살기 때문에 수치심을 모르며 금수에 가깝다는 게 그들의 이론이었고 주장이었다. 이는 어디서 많이 본 도식이다. 예전 일제 강점기 때 외국에서 돌아다니는 사진들, 조선에 관한 사진들을 보면 정말 초라하고 위축된 모습들만 담겨 있다. 물론 몇몇 사진은 진심으로 조선이라는 동양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찍은, 호기심의 렌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끈 사진은 각도며 앵글을 핍박받는 조선인에 맞추었다. 우리는 알지 않는가. 우리는 불쌍하지 않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런 의도로 찍은 사진일수록 피사체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피사체가 렌즈를 쳐다보는 순간, 보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을 자기 식대로 이해하게 된다. 그로 인해 '충돌'이 생긴다.
가령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사람이 갑작스레 화를 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악마가 들렸다'고 말한다. 단순한, 미개한 부족의 미신으로 볼 수도 있다. 허나 '악마가 들렸다'라고 말하는 건 아프리카 사람들의 태도 중 한 면을 보여준다. 영국인들이 서로 만났을 때 애꿎은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프리카인들은 '악마가 들렸다'라고 말하면서 '책임을 돌린다'. 화를 내는 사람의 성격 탓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원래는 그런 성격이 아닌데 '악마'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쓸데없는 분쟁이나 맞붙어 화내는 걸 면할 수 있다. 흥미로운 말버릇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말버릇'을 미개한 것으로만 치부한다. '중매인'에서 나오는 남편이 미국에 융화되기 위해 '코코넛 밥'을 앞으로 짓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유럽과 미국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미개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점핑 몽키힐'의 에드워드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제대로 '이해'하고자 했다면 이 면을 간파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자신의 '시선'을 포기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역으로 '아프리카다움'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셈이다.
에드워드와 그의 아내는 '이해'한다는 태도를 취하며 자신들이 얼마나 관용적인 사람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우간다인을 워크숍 리더로 선정하지만 진짜 리더는 에드워드다. 그는 그들의 '소설'에 대해 대놓고 '아니다' '틀리다'고 논한다. '아프리카다움'에서 벗어난다고 지적을 받은 세네갈인은 화를 내며 커밍아웃을 한다. 몇몇 사람은 충격을 받는다. 사실 어떤 사회에서든 아직까지 커밍아웃은 충격적인 것이다. 그들이 아프리카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고급 보르도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다'라고 비꼰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세네갈인이 아니다. 에드워드는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척 하면서, 진짜 '아프리카인'들을 깔보고 있다. 존중이 아니라 성급한 '일반화'의 결과인 셈이다. 이런 사태는 '숨통'에서 이웃들이 다람쥐가 사라진 것이 새로 이사온 아프리카인들 때문이 아니냐는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이해'라는 것을 무슨 '하사'해 주는 특권으로 보는 이상,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그릇된 '이해'로 인해 어떤 일이 생겨나는가. 그릇된 이미지가 생긴다.


에드워드는 생각에 잠긴 듯 한참 파이프를 씹더니, 이런 유의 동성애 이야기는 아프리카의 진짜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느 아프리카요?" 우준와가 불쑥 말했다.
남아공 흑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에드워드는 더욱더 파이프를 씹어 댔다. 그리고는 마치 교회에서 얌전히 앉아 있으라는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애를 보듯 우준와를 쳐다보더니, 자신은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아프리카 학자로서 말하고 잇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참모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아프리카라는 공간에 서양식 사고를 투영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짐바브웨인과 탄자니아인과 남아공 백인은 에드워드가 말하고 있는 동안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지금이 2000년일지는 모르지만 가족들에게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고백하는 여자 이야기가 대체 얼마나 아프리카적이라는 거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러자 세네갈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를 속사포처럼 쏟아 내기 시작하더니 약 1분 동안의 일장 연설을 마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네갈인이에요! 내가 세네갈인이라고요!" 이 말에 에드워드는 똑같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대답하고 나서 다시 영어로,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저 사람은 고급 보르도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군요." 라고 말했고 몇몇 참가자들이 킥킥 웃었다.
-점핑 멍키힐. 145p-


그의 안에 있는 아프리카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우준와는 그의 태도로 짐작하게 된다. 적어도 그의 안에 있는 '아프리카'라는 환상은 아프리카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점핑 몽키 힐'이라는 이름과 달리-원숭이가 드글드글할 것만 같은데-원숭이가 한 마리도 없는 것처럼. 에드워드의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진짜 아프리카에 사는 그들은 아프리카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생활고를 겪고, 머리카락 손질법을 궁금해 하며 맥주를 잘 마신다. 에드워드는 그런 '생활'을, 그가 살고 있는 유럽과 비슷한 생활을 못 견뎌 한다. 그리고 우준와에게 거리낌없이 성적 농담을 한다. 우준와는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나중에는 진담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경악한다. 만약 그가 우준와나 세네갈 여자처럼 아프리카 여자들이 아니었다면, 영국 여자였다면 그런 성적 농담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점핑 멍키 힐'에서 에드워드는 희화화된 이미지로 그려진다. 이 '에드워드'는 작가로 하여금 분노하게 한, 과거에 만난 한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진짜 주목하고자 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그런 '아프리카다움'을 강요받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아프리카인들이다. 그들은 우준와가 그런 성희롱을 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에드워드의 태도가 얼마나 부당한지 알면서도 입을 다문다. 에드워드의 추천을 받기 위해서다. 동의하지 않고 침묵한다고 해서 '거부'가 될 순 없다. 침묵은 동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국 '아프리카다움'을 강요하는 에드워드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아프리카다움'을 강요받으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아프리카인, '미국다움'을 강요하는 '중매인'의 남편, 아프리카인들이다.


케냐인은 에드워드가 그 납작한 막대기처럼 생긴 아내의 몸 위로 올라갈 때 속으로는 우준와를 생각했으리란 건 첫날부터 빤히 보였다고 말했다. 짐바브웨인은 에드워드가 우준와를 쳐다볼 때는 늘 추파를 던지더라고 말했다. 남아공 백인은 에드워드가 백인 여자는 절대 그렇게 쳐다보지 않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가 우준와에게 느끼는 감정은 존중이 결여된 욕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들 알고 있었어요?" 우준와가 물었다. "다들 알고 있었어요?"
-점핑 멍키힐, 146-147p-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단편들마다 이 점을 거듭해서 지적하고 있다. 그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아프리카를 코끼리와 정글북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충격적'인 사실일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의 아프리카는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침묵하는 아프리카인들, 그들은 어떤가? 단순히 타인에게 '화'만 내는 것이 아니라, 아다치에는 아프리카인들에게도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 '반성적 성찰'은 '타인의 강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도 있겠지마는, 더 나아가서는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은 다른가?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인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편견은 더 강화된다. 상대주의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만큼 쉬운 게 없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한쪽이 없어지고 나면, 다른 한쪽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만다. 상대주의적으로 서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건 결국 어느 한쪽이 사라져 버리면 끝인 것이다. 한 명이 밥 먹으러 가버리면 다른 한 명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게 되는 시소처럼. 그렇다면 이 불안한 시소의 감정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로미오와 줄리엣

아프리카인과 유럽인들은 사는 환경도 다르거니와 가지고 있는 전통도 다르다. 세계화로 인해 서로의 문화를 더 잘 알게 되었지만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이렇게 따지자면 개개인이 다 다른 주체다. 어떤 주체는 카프탄(아프리카 전통 의상)만 입고 다닐 수 있고 어떤 주체는 동성 애인을 사귈 수 있다. 허나 그 '다르다'에 대해 어떤 이유를 따지게 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해'를 하기 위해서 그런 주체들에게 '왜'냐고 묻는다. 어떤 거창한 역사적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이유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 단순한 기호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은 그 이유들을 '이유답지 않다'고 말하며,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숨통'의 아쿤나와 '그'는 분명 서로 다르다. 허나 '그'는 아쿤나의 이름 뜻에 대해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에 대한 어떤 성급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아프리카에 대해 '어느 정도만' 알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다는 아니다. 그는 아쿤나와 그가 '다르다'라는 것만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쿤나는 그런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 또한 아쿤나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의 부모님도 아쿤나에게 반감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여자친구'로서 대한다. 하지만 분명 둘을 갈라놓는 장벽이 있고, 아쿤나는 답답함을 느낀다. 가령 아쿤나가 그녀의 아버지가 '은시(똥)'처럼 보였다고 말했을 때, 그는 아쿤나를 위로하면서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이라고'. 어떤 수단으로든 상대방을 깔아 뭉개고 그 상황을 즐거운 오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수일 뿐이라고. 하지만 아쿤나에게는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 중 '그'와 같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세상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그의 위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녀의 '고백'은 그저 '어린아이의 떼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마치자, 그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당신의 손을 잡고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세상이 자기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혹은 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갑자기 화가 났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에게,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고, 그냥 사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말했다.
-숨통. 163


그녀는 애써 그의 말을 부인하면서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다. 어느 한 쪽의 이해에 편입되는 순간, 그와 그녀 사이의 평등한 관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필사적인 행동'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녀가 그의 부모님에 대해 '찬사'를 할 때, 그는 그녀에게 '부모님에 대해서 진짜 사실을 모른다'고 반박한다. 그녀가 그에게 '실용적이지 않은 선물은 필요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배꼽빠지게 웃을 뿐이다. 그는 정말 그 물건들이 그녀의 '기호'에 맞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를 나이지리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를 꺼린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그와 다른 그녀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 정체성은 그녀의 숨통을 조여온다. 결국 그녀는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냐고 묻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둘은 현대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 과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 '다른 것'은 없었다. 오직 그들의 장애물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가문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동반자살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쿤나와 그의 집안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지도 않고, 둘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어찌 보면 과거의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훨씬 더 유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다르다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소처럼 불안한 상황이 된다. 이 불안함은 아쿤나를, 더 나아가 그와의 관계의 숨통을 '조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다시 한번 그와 그녀가 '다르다'라는 것을, 그 다름은 결국 극복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표명한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그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과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 자신을 죽음으로 던져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상에 밝혔지만, 아쿤나와 그는 죽을 수도 없다. 어쩌면 그녀가 영주권이 유효한 1년 안에 다시 돌아와서 그와의 '다름'을 다시 한번 극복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일종의 '유예 기간'을 두면서, 동시에 그에게도 그 자신의 감정을 수습할 것을 간접적으로 '권한다'. 가장 가능해 보이는 사랑의 끝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사랑은 최고의 비극이 된다.


당신은 당신이 영주권자임을, 1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영주권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그는 자기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않냐고 말했다. 당신, 돌아올 거야? 돌아올 거냐고.
당신은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가 공항까지 당신을 태워다 줬을 때 아주아주 오랫동안 그를 꽉 끌어안았다가 놓아 주었다.
-숨통. 168-169p



우리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네

그렇다면 이 '다르다'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극복할 수 없고, 극복하려고 뛰어넘기를 시도하다가 되려 그 속에 빠져버릴 만큼 절망적인 '간극'일까? 작가가 만약 여기서 그치고 만다면 이 소설집은 그저 기나긴 '하소연'에 지나지 않는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하소연만 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녀의 단편소설집은 사실 하나의 장편 소설 구성과 같다. 결국에는 어떤 '결론'이 나오고야 말기 때문이다. '고집 센 역사가'의 느왐그바는 아프리카 전통 사회 속에서 살다가 남편을 잃는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유럽 문물을 받아들인다. 단순히 그 유럽 문물이 더 위에 있으니 그걸 배워야 한다는 식은 아니다. 그녀는 그의 아들이 '유럽식'을 좇으면서 '유럽'을 상위에 두는 데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를 혼내기까지 한다. 이마 음무오 의식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니퀜와에게 그녀는 그가 '그녀의 아들인지 백인의 아들인지'를 물으면서 혼을 낸다. 아니퀜와는 결국 이마 음무오 의식을 치르러 가지만, 그는 계속 '유럽식 사고'만을 주장한다. 그녀의 아내 음그베케에게 강요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퀜와에게는 '유럽식 사고'가 그가 태어난 아프리카를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더 강하고 위압적인 것, '옳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느왐그바는 그런 그를 비웃고 안타까워한다. 아니퀜와는 그와 '유럽'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마이클'로서 살고자 하지만, 진짜 '마이클'로서 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아니퀜와는 아니퀜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퀜와의 '설득'은 마을 사람들에게 '강요'로 읽힐 뿐이고 아내는 마을 여자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오도널 신부만이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데,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다른 주체'이고 그 또한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강요하지 않는다. 느왐그바는 이 모든 사태가 짜증난다. 오도널 신부같은 유럽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자랑스런 아들, 아니퀜와 때문에.

아니퀜와는 자기 아내가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하면 모든 원로를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찌만, 오도널 신부는 다음번 신방을 왔을 때 원로들을 방문하여 음그베케의 행동을 사과하고 혹시 기독교도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물을 길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원로들은 거부했지만-오이의 물을 원하는 자는오이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오도널 신부에게 정중했다. 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자식인 아니퀜와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집센 역사가. 277p


하지만 음그베케는 희망을 가진다. 그녀의 손자, 혹은 손녀가 남편 오비에리카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손자 은남디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손녀 아파메푸나는 오비에리카의 환생으로 태어난다. 아버지인 아니퀜와는 딸이 음그베케의 아프리카에 물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아파메푸나는 '그레이스'로서 살다가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되며, 그녀 스스로 '나이지리아'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마치 연어처럼 그녀는 그녀가 오래전에 흘러왔을, 기억하지도 못할 '근원'을 향해 뛰어 올라가는 것이다. 음그베케의 희망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레이스는 교수상을 받을 때, 학회에서 심각한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 나이지리아 남부의 이조족, 이비비오족 이보족, 에피크 족에 대해 얘기할 때, 후한 보수를 받으면서 국제 기구를 위해 상식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쓸 때, 할머니가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즐겁게 키득키득 웃는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그레이스는 상패들과 친구들과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장미 정원에 둘러싸여 살던 말년에 이상하게 뿌리를 잃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는 라고스 법원으로 가서 법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레이스에서 아파메푸나로 개명할 것이다.
고집 센 역사가. 282-283p


이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소설가로서의 '각오'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녀는 '유럽'을 향해 완고히 등을 돌리지 않는다. 그녀는 세계화 앞에 서 있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유럽을 받아들여야 함을 아는 현대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녀 자신이 '나이지리아'의 핏줄임을 잊지 않는다. '잊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역사가들은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역사를 기술해 왔다. 그들에게 그들의 관점을 바꾸게 하기란 사실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들의 관점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이자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기점에 서서, 어느 사상과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그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부어 봤자 소용 없다. 키케로와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아니퀜와처럼 그 상하관계에 스스로를 속박하는 순간, '역사가'로서의 자유는 사라진다.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다운 아프리카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역사'를, 공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서술해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변화한다'.


새로운 삶,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줬던 것은 우곤나였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운 신분, 새로운 정체성에 적응해 가는 속도에 깜짝 놀랐었다. "제가 우곤나 엄마예요." 그녀는 유치원에서, 교사들에게, 다른 학부모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문나치에서 있었던 장례식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두 똑같은 무늬의 앙카라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어느 분이 어머니시죠?"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잠시 경계하다가 "제가 우곤나 엄마예요." 라고 말했었다.
-미국 대사관. 185-186

연어도 뛰어오르면서 온 몸에 상처가 난다. 그래도 연어는 뛰어오르거나, 죽는다. 연어는 상처입어도 연어지만 뛰어오르기 전과 후의 연어는 서로 다른 연어다. '우곤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그녀가 스스로 부과한 그녀의 정체성이며, 그녀는 그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래서 우곤나를 잃었을 때 그녀는 순간 자신을 '상실'한 것으로 여긴다. 어떻게든 다른 곳에서 새롭게 그녀의 정체성을 '고정'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망명을 가고자 하지만 그러면 그녀가 자랑스러워했던 '우곤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는 개인의 역사다. 개인의 역사에 대해 '면접관'에게 아무리 설명해 봤자 면접관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녀는 '우곤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한다. 아다치에, '아파메푸나'는 차라리 '고집 센 역사가'가 되기를, '우곤나 엄마'로 남기를 바란다. 뒤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굳건하게 뒤를 향해 돌진하면서 온 몸으로 '깨닫고' '변화'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가 되기로 마음 먹는다. '숨통'은 결국, 아다치에의 '선언들'이자 그녀의 몸에 새겨진 '현대의 나이지리아 역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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