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염탐, 속삭임, 한숨

-샤리아르 만다니푸르의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를 읽고

 

 

 

코카콜라코프

 

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맞춤법도 문단 정렬도 아니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쓴 사람의 '생각'을 본다. 물론 문체가 통신어체거나 문단 끝이 들쑥날쑥하면 신경쓰이기는 한다.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내용과 형식에 치중한다. 그러나 '검열'은 이 내용과 형식의 표현을 자중한다. 풀밭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들 사이를 울타리로 갈라 놓는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사유재산이 다른 양들과 섞이지 않도록 보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나라 고유의 형식을 지키고 이어 나가는 것,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갈라 놓은 양들은 울타리 너머로 '나가려고' 시도한다.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넘는다는 나폴레옹의 말마따나 양들은 울타리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나가려고 한다. 울타리 너머의 양들은 어떤가? 뿔은 제멋대로 치솟아 있고 털은 수북하거나 듬성듬성 나 있다. 제각기 모양이 다르다. 검열은 이 울타리 너머 양들을 '불량'으로 취급한다. 그들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양과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양, 이 둘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저 양은 양이 아니고, 이 양은 양이 아닌가? 양은 양이 아닌가?

'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에서 화자로 나오는 작가는 검열을 뚫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출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검열관인 페트로비치는 사사건건 그를 막는다. 페트로비치는 어떻게 해서든 작가의 이야기를 '올바른 방향'으로, 판에 박힌 쪽으로 끌고 나가려고 한다. 작가들이 모두 같은 이야기를 쓸 수는 없다. 고전주의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작가 나름대로의 시선과 해학이 묻어난다. 하지만 페트로비치는 특정 ''에 그 내용을 맞추어 넣을 것을 명한다. 그리고 그 병에 이야기를 넣은 순간, 병마개로 막아 버린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지니가 병 속에 갇히듯 이야기는 갇혀 버린다. 사라가 대학에서 배우는 천년 전의 시들은 다 '정확한 의도'대로 '풀이'가 되어 있고, 사라는 그걸 외워야만 한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는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해설을 읽고 글의 의도를 외우는 것. 어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수능 언어영역에 출제된 것을 보고서 신기한 마음에 풀어 보았다가 다 틀리는 영광을 맞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시험 문제를 낸 사람이 틀린 것인가? 그 어느 쪽도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검열'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천년 동안 병마개에 막혀 보존되어 있다면, 와인처럼 숙성될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코카콜라라면?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 드럭스토어에서 약으로 팔다가 지금은 수많은 충치를 생산해 내는 해악으로 손꼽히는 코카콜라라면 어떨까?

사라와 다라는 와인이 아니다. 둘은 코카콜라에 가깝다. 그들은 배워서는 안 되는 것, 현대적 산물인 '사랑'을 배운다. '사랑'은 기존 이란 전통에서는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 그 존재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외국의 문물들로 '사랑'을 배우고, 늙어빠진 검열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기회를 노린다. 사라의 약혼자 '신바드'는 기존 이란 전통에 입각한 인물이다. 다라는 그 반대축에 서 있는 인물이다.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전통'에 얽매이는 순간, 굳어버린다. 다라는 사라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약혼자의 존재를 밝히는 사라도, 그 약혼자도 쉬이 용서할 수가 없다. 다라는 '신바드'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는 사랑 이야기의 흔한 '비극적 요소'. 하지만 신바드는 다라의 존재를 안 순간, 포기한다. 그렇다면 다라는 행복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역시, '전통과 관습'이라는 검열에 의해 가로막힌다. 이들의 사랑은 이들의 사랑을 위한 병에 담겨야 한다. 막걸리는 단단한 자기 병에, 소주병은 초록색 유리병에, 맥주는 짙은색 유리병에 담아야 한다. 코카콜라는 알루미늄 캔에 담아야 하고. 각자 어울리는 용기가 따로 있다.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가 말한다.

"선생님, 영화를 더빙하는 과정에서 저들을 오래전에 생이별을 했다가 지금에야 다시 만난 남매로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다면 저들이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영화 분야 전문가가 반대하고 나선다.

"선생님! 그렇지만 인디언 전통 방식으로 둘이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둘은 손을 맞잡고 인디언 천막으로 갑니다. 인디언 여자들은 이란 여자들이 결혼식에서 그러는 것처럼 웁니다."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가 대답한다.

"그 문제 역시 해결책이 있습니다. 영화를 더빙할 때, 인디언 하나가 이것이 오래전 생이별을 경험하고 이제야 다시 만난 형제자매들을 다시금 형제자매로 맺어주는 인디언 전통 의식이라고 말하게 하는 거지요."

X가 말한다.

"이 장면을 자르시오."

160

 

도덕성 저해 분야 전문가는 말한다.

"미국 감독들은 정신이 나갔습니다. 어떻게 눈도 안 보이는 병신이...."

순간, 그는 자기가 영화 분야 전문가와 똑같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수습에 나선다.

(생략)

반미 분야 전문가가 말한다.

"중령이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 고층 건물 하나를 들이받았다면 훌륭한 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243

 

그러나 검열은 이 '용기'들을, 그리고 그 내용물들을 일일히 검사하고 '올바름''그름', 두 쪽으로 나눈다. 그렇다면 코카콜라는 어디에 들어갈 수 있는가? 미국 제국주의의 산물이므로, '늑대와 함께 춤을'이 검열되고 잘려나가 원본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던 것처럼 변해야 한다는 것일까? 하지만 하나만 말해두자. 김 빠진 콜라는 맛이 없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

 

그렇다면 검열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자유가 풀려나면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이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다. 검열이 사라진 후에는 있기 전보다 '결혼'이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과연, 결혼한다고 해서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 영원할까? 고전시 시린과 호스로는 아름답게 이어지고 끝났지만 사라는 응급실에서 '결혼 이후'의 시린을 본다. 남편 호스로에게 큰 상처를 입고 실려온, 신부 시린을. 사라가 '창녀'로서의 삶을 상상해 보는 건 다라와의 사랑을 소중한 그대로 이어나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창녀''구매자'의 관계라면, 그들은 서로의 환상을 서로에게 뒤집어 씌운 채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세속적인 것, 집세와 내일 먹을 식량, 배급표, 직장에 신경쓰다 보면, 자칫하면 그들의 '사랑'이 오염되지는 않을까? 다라 또한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고 '거리'를 둔다. 영원한 신부, 서정주의 시처럼 신랑이 손도 대지 않고 나가버린 방에 남은 신부는 화자가 손을 대는 순간 가루로 화해 사라진다. 환상 또한 그렇게 건드릴 수 없는, 물적인 것이다. 건드리는 순간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검열'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을 더 아름답고 영원하게 해주는 것인가? 화자는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작가들이 수많은 은유와 돌려 말하기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한번 걸린 것을 또 걸리게 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고심하고 고심한다고 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중동권의 시들의 은유는 그들의 '소심'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과감함, 검열에 맞서고자 하는 저항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검열'이라는 벽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벽을 넘으려고 애쓴다. 그렇다면, ''을 넘는다면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인가?

 

1848년에 독일이 혁명 후 검열을 폐지했을 때 하인리히 하이네는 이렇게 썼다. ", 난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검열이 없는데 내가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검열과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검열 없이 글을 쓴단 말인가? 그동안의 스타일과 문법, 좋은 습관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마이클 키엘만, '우연한 걸작' 198

 

영화 '타인의 삶'에서 나오는 작가는 검열 때문에 그의 작품을 상연하지 못하거나 고쳐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저항 세력을 꾸린다. 하지만 막상 검열이 사라지고 나자 그는 미묘한 회의감에 빠진다. 이제 누가 그 '과감함'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하이네 또한 사라지는 검열에 대해 한탄했다. 어쩌면 페트로비치의 말을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페트로비치는 작가들을 닦달하는 '뮤즈'가 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사라는 다라와 곧 결혼할 사람인 척하고 웨딩드레스를 입으러 가고 다라는 사람들을 피해 전혀 낭만적일 수 없는 장소인 응급실에서 사랑을 표현한다. 가장 낭만적이지 않은 장소가 낭만적인 곳이 될 때, 그 때가 낭만 소설의 빛나는 순간이다. 이 빛나는 순간들로 인해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점점 더 '숭고'해진다.

이렇게 검열관이 플롯 속으로 끼어드는 일은 허다하다. 일본 연극 '웃음의 대학'에서 검열관은 작가를 탄압하는 역할이었다가 이내 작가와 함께 대본을 쓰고 소통하는 인물이 된다. '뮤즈'가 되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대본을 읽고 연기를 직접 해주기도 한다. 물론 가끔씩 제국주의적인 면모 때문에 찬물을 끼얹을 때도 있지만, 어찌 되었거나 검열관은 그 작가의 작품을 '인정하고' 그와 '소통'하게 된다. 그렇다면 페트로비치 또한 창조에 한 몫을 하는가? 만다니푸르는 페트로비치의 손을 빌릴 생각이 없었다. 페트로비치는 다라에게 '암살자'를 보내면서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고, 그로 인해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게다가 그는 더 나아가 '소설 속 인물'을 사랑하게 된다.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 '방해자'가 되는 것이다.

 

페트로비치는 말한다.

"제발 사라를 이 오입쟁이의 집에서 나오게 해 주십시오. 그녀를 집으로 보내요! 나 자신은 신바드를 중국에 보내 연필을 사 오게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내 이야기의 플롯은 어떻게 하고요?"

"그렇다면 나는 당신이, 다라의 손이 그녀를 만지게 두는 것을 금지합니다."

454

 

"나는 이 이야기가 결국 훌륭하고 교훈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창조성을 발휘해서 사라가 이 혐오스러운 다라와 끝내도록 하십시오."

458

 

'방해자'로 인해 또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날 것인가? 아니면 그 때문에 사라와 다라의 사랑은 '엉망'으로 끝날까? 작가는 사라와 다라의 사랑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검열''방해자'의 소재로, 그리고 미묘한 면에서 '보호자'의 소재로 쓰인다. 작가가 사라와 다라의 사랑을 위해 열심히 애쓰지만 만능 점쟁이의 말마따나 '주문'이라는 비현실적인 매체가 있지 않는 이상, 픽션에는 픽션으로 맞서지 않는 이상 가망이란 없다. 무엇보다도, 외부적 검열보다도 더 큰 방해물이 있으므로.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쉽게 퇴치할 수 없는그들의 내부에.

 

 

 

국경에 서서

 

이 소설이 매력적인 점은 바로 '검열'이라는 소재를 '깊게' 다루었다는 점이다. 검열을 다루었다는 건 검열에 통과될 만한 올바른 텍스트나 검열에 통과하지 못하고 끝내는 사형 선고까지 불러일으킬 과감한 내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검열'은 곧 검열을 하는 과정과 그 검열되는 텍스트를 동시에 다 다뤄야 재현할 수 있다. 잘려나가는 텍스트들과 그에 따른 갈등, 시련, 분쟁.

검열이란 것이 무엇인가? 소설 속에 씌여진 일을 마치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보고 심각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소설을 그저 픽션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 전통에 위배된다는 시선으로 보게 된다면 소설이야말로 '추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어떻게든 자신의 소설을 출판하고자 한다. 그래서 페트로비치에게 찾아가고, 그의 말을 듣고 그에게 맞서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렇게 소설을 '쓰는 과정'을 씀으로서, 작가는 자연스레 '검열'의 존재를 드러낸다. 금지된 것을 금지되지 않게 쓰기 위해서, 금지된 것 또한 살아 있다는 것을 역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사라가 '창녀'가 된 자신을 상상하는 이탈 욕구는 '검열'에 걸려 사라진다. 하지만 이미 쓰여졌다. 줄이 그어진 문장들은 이미 '쓰여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도 '실제 일어난 것처럼 다루는 검열' 때문에, 망령처럼 소설 속 플롯을 떠돈다. 죽은 게 분명한 시인이 자연스럽게 페트로비치에게 말을 붙이고 점쟁이는 소설 안과 밖을 넘나들며 서술한다. 이란의 '검열'을 피해서, 합법과 위법의 위태로운 경계선을 걷는 것이다. 자칫하면 한 쪽으로 넘어질 수 있는. 페트로비치는 그 '검열' 안으로 들어오라고 청한다. 사라에게 바람직한 사랑을 이루게 해주고 싶어하며, 다라라는 '해악'을 경계하고자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반대로 다라의 사랑을 이뤄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들의 알력 다툼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검열은 사라와 다라의 안에도 있다.

 

"내가 만지게 두어도, 이 다라라는 인물은 너무 서툴고 혼란스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분명 자기가 어떤 집에 터키옥 색으로 페인트칠을해 준 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려 할 겁니다."

455

 

그때, 마치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이, 그녀의 눈이 커진다. 그녀는 얼어붙는다.

"무슨 일입니까, 사라? 무슨 일이예요?"

"내가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첫번째 본 것이 재스민 덤불이었어요......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나를 무섭게 했어요. 이제는 마치 무서운 눈 한 쌍이 덤불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459

 

사라는 다라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약혼자'라는 존재를 어쩔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긴다. 다라는 그런 사라를 갑갑해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다라 또한 '검열'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이웃이 자신과 사라의 사랑을 엿볼까봐 겁이 나서 계속 망을 본다. '위험'을 무릅쓴다기 보다는 그들 안의 '검열'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하지만 막상 사라와 다라의 사랑이 이뤄질 수 있는 순간, 둘이서만 한 방에 있는 순간마저도 다라는 망설인다. 그의 안에 있는 '검열'의 관념이 그들을 뜯어 말리기 때문이다. 그건 옳지 않다, 옳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강박에 가깝다. 사라가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덤불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보았다고 여기는 것, 이 시선은 진짜 다라의 이웃이 훔쳐보는 것일 수도 있고 페트로비치의 '참견'일 수도 있다. 혹은, 그들 안에 있는 검열의 눈일지도 모른다. 그들 자신밖에 느낄 수 없는. 이들은 '곱사등 난쟁이의 시신'을 피해 집안으로 도망칠 수 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들 안에 있는 검열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검열'된 사랑들에 대하여, 검열된 사람들에 대해 그 '관습'이 옳지 않고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처벌'받을 때,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이내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그들 무의식에 있는 '검열'의 뿌리 때문이다. 그 뿌리는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친친 감아매고, 그들의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사라와 다라가 현대 소설을 보고 영화를 봐도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그들을 옭아 매었던 '검열'은 그들을 '구세대'로 묶어둔다. 이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사실 페트로비치가 예상한 쪽에 가까워진다. 작가는 애쓴다. 그의 텍스트가, 그의 의도대로 갈 수 있도록. 허나 검열에 사로잡힌 텍스트는 작가의 의도대로 이뤄지지 못한다. 이것이야 말로 사랑 이야기의 비극이다. 아서왕 이야기에서 기사와 왕비는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밖에 선택할 수가 없다. 작가가 이 '검열'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던 것도 '검열'을 피한 외국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검열'이 되살아나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사람들이 법정으로 줄줄 끌려가고 있고, 사람들은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입을 다문다. 암호명조차도 쓸 수가 없다. 인터넷은 '한 꺼풀'만 들추면 다 드러난다. 원래는 드러날 수 없는 체계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의 운영을 누가 잡고 있는가? 권력과 자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많은 '은유'를 쓴다. 특정 동물로, 혹은 대중적인 작품들로. 그래도 우리 내부에 검열을 들이진 말자. 그 검열로 인해 또다른 '비극'을 생산해 내지 않도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