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그저, 현시창, 그뿐.

-전석순의 철수 사용 설명서를 읽고



 

제품 표준 규격에 관한 안내문

미국에서 일어난 사례다. 한 할머니가 물에 젖은 고양이를 말리려고 전자렌지에 넣고 돌렸다고 했다. 그 결과는 보나마나, 차마 묘사할 수 없는 비극이 벌어졌다. 할머니는 고양이 묘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앞으로 전자렌지에 고양이를 넣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까? 아니, 할머니는 전자렌지를 만든 회사에 소송을 걸었다. 그 이유인즉슨 전자렌지 사용 설명서에 고양이를 넣지 말라는 문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승소했고 회사에서는 설명서에 울며 겨자먹기로 그 항목을 집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스운 일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끔찍한 비극이기도 하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두 가지다. 사용 설명서를 꼼꼼하게 적을 것, 그리고 지금 눈 앞에 닥친 비극을 내 탓에서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게 사용 설명서를 잘 읽어 보는 것. 그 제품을 만들지 않은 이상 고장나거나 뭐가 잘못 되면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논지는 정당해 보인다. 어떤 제품을 사용할 때에는 분명히 그 제품의 사용 설명서가 필요하며, 그 사용 설명서를 읽어야만 모근 제거기에 '쿨러'를 빼먹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리뷰 또한 상대적인 것이니 온전히 그것으로만 판단하지 말라는 것도 맞다. 없는 용도를 다그치지 말고, 작동이 안 된다고 마구잡이로 두들겨선 안된다는 것도 맞다. 결국 설명서를 잘 읽고 원래 제품에 있는 용도를 잘,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쓰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물건은 오래 가지 못한다. 물건의 탓이 아니다. 사용하는 사람이 질리게 되기 때문이다. 눈을 잠깐 감았다 뜨면 신제품이 나오는 세상에서, 카메라가 달린 핸드폰은 이제 인터넷까지 되는 핸드폰에게 죽 밀려나 버린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단순히 시장의 법칙과 그에 따라 파생되는 비극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하지만 지금 비극의 주인공은 '제작자''사용자'도 아닌, '제품'이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건 이 '제품', 제품으로 취급받아서는 안 될 '인간'이라는 점이다. 과연 인간이 제품이 될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게 통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취업을 해야 하고 취업을 하지 않으면 '인간'이 되지 못한다. 무슨 인간 규격요건이 따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취업의 선을 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스펙이 필요하다. 이 스펙은 입사 지원서, 자기 소개서, 면접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둔갑한다. 그 스펙이 얼마나 뛰어나냐에 따라서 회사는 이 사람을 '구매'할 지 안 할지 선택한다. 그러나 그 스펙은 사실, 그 사람 자체를 드러낼 수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된다. 초라하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알몸뚱이를 가리기 위해.

 

면접은 일종의 성능 테스트인 셈이었다. 이력서에 기록된 성능만큼 작동이 잘 되는지 테스트해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서류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보는 테스트가 면접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면접이 진행될수록 철수는 이게 거짓말을 얼마나 잘 하나 보는 성능 테스트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수 사용 설명서, 24p-

 

철수는 그래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세상의 표준 규격에 자신의 스펙을 맞춰 보려고 애쓴다. 책의 생김새를 보라. 갈색의 재생지 표지는 밋밋해 보이지만, 이는 우리가 잘 쓰는 종이 봉투의 일반적인 색깔이다. 너무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 철수가 들어 있다. 철수는 마치 피규어 인형처럼 그려져 있다. 어디다가 똑 떼서 장식해 두는 물건처럼 보인다. 안을 열면 초록색의 때수건. 다른 책들에 비해 뭔가 생활고가 묻어나는 디자인이다. 다른 책들은 화려하거나 세련되고 모던하게, 제각기 눈에 띄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 책은 뭔가,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처럼 구질구질한 삶을 닮았다. 그러면 생활면에 있어서는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철수는 좋은 제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철수의 취업도, 가족도, 사랑도. 매번 엇나가고 만다.

 

 

자기 계발 권하는 사회

철수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피아노 선생님이 자를 세로로 세워서 때렸을 때부터? 아니면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바라는 그 어떤 유전자도 없다는 점에서? 애당초 철수의 말마따나 냉장고한테 세탁을 시킨 것 자체가 잘못이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것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비극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인간이 만든 기계 문물들은 인간들을 점차 정복해 나가고 나중에는 그 우위관계를 뒤집기까지 한다. 인간은 기계가 만든 매트릭스라는 가짜 세상 속에 살면서 기계들의 양분이 되어준다. 그들이 꿈 속에서 오만 노력을 한다 해도 결국은 '기계의 밥'이 될 운명이다.

철수와 철수의 누나, 그리고 수많은 이들은 결국 그들이 만들어낸 '제품'의 규격에 스스로를 맞춰가면서 제품이 된다. 개조가 가능하고, 좀 더 좋은 기능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기계.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의 장르는 소설도 시도 사회비평도 아니다. 바로 자기계발서다. 자기계발서는 마치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거나 딱 하나 빼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계발서를 읽으면 조금 더 기능을 '추가'할 수 있을 것만 같고 무언가를 깨달은 신제품이 될 것만 같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그런 '신제품'이 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스팀 다리미가 뿜어낼 수 있는 스팀을, 다리미에게 강요해봤자 스팀은 눈꼽만큼도 나오지 않는 것처럼 원래 없는 사람들에게 강요해봤자 소용이 없다. '불가능한 것을 되게 하라'가 현 사회의 모토이고 수많은 이들이 달달 외워다니는 문구라고는 하지만, 달걀 백판을 가져다가 바위에 대고 깨도 바위는 쪼개지지 않는다. 만약 쪼개진다면 그건 달걀을 들고 깬 사람의 힘 때문이 아니라 달걀의 성분이 작용을 했거나 바위 밑에 있는 지질의 문제일 뿐이다. 이런 시선이 회의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애당초 달걀한테 바위를 깨라고 한 게 잘못이다. 달걀은 바위를 깨고 싶다고 한 적도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달걀과 같은 신세다. 주먹이 달걀한테 바위를 깨라, 고 하면 달걀은 바위를 깨지 못하더라도 제 몸은 투신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달걀한테 입이 달렸다면 달걀이 '차라리 니 주먹을 써라 짜샤'라고 빈정거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아무 탈 없이, 아주 조용히 잘 흘러가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 이 사회의 대다수는 최승호의 북어처럼 입이 없는 존재들이다. 입이 있고 말을 한다 해도 그냥 '어 달걀이 말을 하네' 정도로 여기고 곧장 바위로 투신시키거나 '불량품'이라고 마트 서비스 센터에 전화해서 상품권을 받아낼 뿐, 듣지 않을 거다. 결국 그냥 입 다물고 주먹이 시키는 대로 바위를 깨려고 하거나 저 바위를 깨는 게 내 운명이라고 여기는 수밖엔 없다.

철수 또한 그렇다. 사실 철수는 취업을 너무너무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피아노를 너무너무 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공부를 너무너무 하고 싶지 않았을수도 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그걸 강요했다. 마치 그게 그의 삶의 목표인양. 어떤 이의 '상품 리뷰'에서는 철수에게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있는데, 의외라고 말한다. 의외다. 그러나 철수는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듯이, 설명서에서는 그림에 대한 언급 한 마디 하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가능할지도 모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 유용함과 무쓸모로 나누는 것. 이 잔인한 이분법은 너무 단순해서 영화에서만 등장할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어쩌나. 현실이다.

 

엄마는 어떻게든 철수가 쓸모 있는 제품이 되길 바랐지만 제품의 기능을 끝내 찾지 못했다. 찾아볼수록 나타나는 건 일시적이거나 심각한 이상 뿐이었다. 주요 기능만 찾았더라도 철수는 엄마에게 자랑스러운, 적어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아니 최소한 숨기지는 않을 자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철수 사용 설명서, 53p-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그렇다면 이 이분법적 현실은 철수의 위에 있는, 표준 규격을 제시하는 이들과 철수 같은 제품군으로 나뉘어지는가? 그런데 어쩌나, 이건 틀렸다.

한 인터넷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적 있다. 백화점 직원들이 '극존칭'을 남발하는데 이는 국어 문법에도 맞지 않으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이 극존칭을 쓰지 않으면 고객에게 '건방지다'고 클레임이 들어오는 일이 잦아진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으로 유세 떠는 거냐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 돈은 또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고객 또한 누군가의 '직원'이고 제품이다.

그러면 이 제품들의, 최종적인 사용자는 누구인가? 다이아몬드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은? 과연 존재할까? 사실 모 대기업의 회장도 결국에는 하나의 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의 정점으로 기어오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손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이아몬드도 없고 끝도 없다. 결국 '꼭대기', '맨 위'는 허상일 뿐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철수를 떠나간 여자들은 '철수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하거나 '왜 내 뜻을 몰라주느냐'고 한탄한다. 하지만 사용설명서의 냉정한 설명대로 '너무 큰 기대를 품지 않는 것', 오히려 완전한 사랑을 포기하는 데에서 역설적으로 완전한 사랑이 온다.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속 마음을 몰라주는 상황에서, 타인이 자신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베풀어주길 바라는 것. 분명히 무리이건만. 텔레비전과 소설에서는 그 사랑이 비교적 쉽고-물론 위기와 고난이 닥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보단 있는데 뜸들이는 게 더 쉬운 편이다. 찾을 필요는 없으니까-간단한 것처럼 나온다. 사람들은 그런 매체들을 보면서 아이유의 오빠가 되길 바라고 샤이니의 누나가 되길 바란다. 가능하다고 믿는다. 철수는 노력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도 어느 정도에 가면 바닥이 난다. 그러면 충전할 시간이 필요한데, 충전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마치 그 충전 시간조차도 사랑이 진짜가 아니라는 보증 방법이라도 된다는 듯이 군다. 이 때문에 피해를 입는 건 상대방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비난을 받는 쪽이다. 결국 다이아몬드의 정점도, 드라마처럼 완전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꽉 차기만 한 사랑도 허상이다. MBC에서 한 '욕망의 불꽃'이라는 드라마의 인물, 모든 것을 다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기업 총수마저도 욕망의 노예일 뿐이었다. 이 악순환을 깰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가 있을까. 

어쩌면 철수가, 철수는, 철수이기에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악순환은 보험금을 타겠답시고 아버지를 죽이는 비인간적인 행위로 깰 수 없고, 스펙을 맞춰서 기업에 들어간다고 해도 깰 수 없다. 결국 철수는 이 소설 속에서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어쩌면 조금 더 견디는 편이 나았을까.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조금만 더 견뎠다면, 뭐든 다 괜찮아졌을까. 철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언젠가 뉴스에서 봤던 원인 모를 냉장고의 폭발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리컵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잠깐이나마 어깨 위에 얹혀 있던 것이 날아가 버린 듯했다. 하지만 쫓자마자 다시 날아든 새처럼 그것은 곧 철수에게로 돌아왔다. 어쩐지 이전보다 훨씬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마치 친구라도 데리고 온 것처럼.

(중략)

그들은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거의 비슷한 억양으로 철수에게 말하곤 했다.

"너 미쳤니?"

여러 사람의 목소리인 것 같으면서도, 그것은 아주 익숙한 한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철수사용설명서 202-203p-

이 감정은 사용설명서에서 '고장', '과부하'로 인식된다. 단순한 '해프닝'일 뿐이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의 결말은 현실에서 이탈을 해야만, '소설의 낭만성'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컵을 집어던지고 박민규의 '고마워, 너구리야'처럼 너구리가 되겠다고 나선다거나. 아니면 실낱같은 희망을 찾는다거나. 하지만 이 '철수 사용 설명서'에는 꿈도 희망도, 없다. 요즘 세대 말로 하자면 그냥 '현시창(현실은 시궁창)'인 셈이다. 이 소설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결국 철수는 제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수를 제품으로만 다룰 뿐이다. 이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무책임하다'고 볼 수도 없고, 제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면 '너 미쳤냐'고 일갈하는 현실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책임감이 있다'고 볼 수도 없다. 그저 무릎이 아플 뿐이다. 마치 '소설의 낭만' 속에 파묻혀 있고 싶은 이들의 등을 밀어 현실로 넘어뜨리는. 직시하고 싶지 않지만 직시해야 할 소설의 '현실' 때문에. 결국 우리는 현실에서 '온전한 제품'이 될 수 없고, 현실에서는 '고장난 제품'일 뿐인 자신을, 제품이 될 수 없는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열어주지 않을, 외롭고 쓸쓸한 상자 속에서.

철수는 조금 더 자 두려고 눈을 감다가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은 한 사람이라는 것을.

-철수사용설명서 221p

사용 설명서라는 허무맹랑한 것을 작성해서라도 이 사회 안에 들어가겠다는 것, 이 때문에 읽으면서 솔직히 답답했다. 블랙 코미디, 현실에 가까운 블랙 코미디는 사실 어떤 비극보다도 가장 잔인한 비극이다. 웃다가도 이내 입을 다물게 되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블랙 코미디이고, 현실에 가까운 블랙 코미디다. 희망보다는 비극의 비중이 더 크다. 작가는 어떤 '방법'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어떤 방법도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으므로. 철수가 취업을 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 주말 드라마의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소설에 희망은 없지만-마지막 부분에 '여자'에 대한 판단을 미뤄야 하겠다는 점에서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현실은 있다. 가슴이 무겁고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행복하고 싶다는 이들을 현실로 밀어 넘어뜨리지만, 그래도 직시해야 할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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