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민음사 모던 클래식 47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 가족이라는 화목연극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의 번복되는 멜로디, 그리고 드러나는 실재-

 

 

끊임없이 상승하는 카논

 

바흐는 황제를 위해 같은 멜로디로 번복되는, 끊임없이 위를 향해 올라가는 카논을 만들었다. 어떤 성부가 더해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래봤자 이 멜로디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브래드쇼 가족은 하나의 곡을 이루고 있다. 토머스가 말한 대로 그의 형인 하워드가 장조라면 레오는 단조. 그리고 토머스는 부엌에 머무르면서 집안을 살펴보는, 무게중심을 잡는 통주저음(낮은 음으로 곡 전체의 균형을 잡음)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진짜'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과연 이 멜로디는 진짜인가? 직장인인 토머스와 주부였던 토니가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을 때도 멜로디는 둘의 위치가 바뀐 것 뿐, 생활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듯이 흘러간다. 이들은 바뀐 후나 전이나 조화로워 보이고, 더 행복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 멜로디를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토머스는 계속 '진짜'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진짜'처럼 보이는 것들을 질투한다. 예술은 무엇이고, 진짜 행복이란 건 무엇인가? 예술은 그를 스쳐지나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는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이그네이셔스와 벤자민의 '추억'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이해의 간극으로 그가 인식하는 현실과 실재 간의 차이를 느낀다. 그는 이그네이셔스와 벤자민은 '진짜 예술가'이고 자신은 '예술가'가 아닌, 진보적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보이고, 진보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다다이즘과 팝아트, 온갖 초현실주의 미술들이 현실을 앞질러 미래를 뛰어간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고장이 났거나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들의 사용설명서를 모두 찾아내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는 것, 그것이 진보라면 진보는 너무 쓸쓸한 것이다. 예술은 그 때문에 진보와 멀리 떨어져 있다. 예술은 고장이 났거나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할 물건들을 내보인다. 이 물건들은 곧 '진보'라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해주는, 실재다. 토머스는 '예술은 자신을 스쳐지나갈 뿐'이라고 여기지만, 사실 예술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다. 그러면서 그에게 '진보'가 사실은 쳇바퀴 안에서 계속 뛰어가는 것임을, 같은 멜로디 안에서 번복될 뿐인 생을 상기시켜 준다.

카논은 멜로디를 번복하며 끊임없이 상승한다. 소설에서 카논은 '일반적인 역할 분담'을 논하면서, 전업 남편과 전업 아내를 주장하면서 상승한다. 이에는 긴장감마저 감돈다. 그들은 스스로의 역할 분담에 충실하게 임하면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 행복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일 뿐이다. 만약 이 소설이 행복하게 끝났다면, 이 소설은 흔한 것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허나 레이철 커크스는 행복에서 멈추지 않았다. 욕망이라는 것은 어떤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다. 그 금지된 것에 우리는 다가가고 싶어하지만, 다가가는 순간 해를 입게 된다. 금지된 것은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한에서 존재할 뿐이다. 실재로 금지라고 붙은 상자를 열어봤을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된다.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거나 우리가 기대한 것 이하의 물건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욕망은 실현될 수가 없다.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욕망을 품었던 자는 절망하게 된다. 토머스는 예술을 하고 싶었지만 예술의 실재는 너무 잔인했고, 토니는 공적인 일에서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게 자신의 욕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욕망은 그녀가 생각한 것처럼 찬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만족하는 척' 해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뤘기 때문에, 차차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뜨거운 음식을 먹다가 찬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잠깐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자리를 바꾸고 온전한 구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자리의 어두운 면까지도 포옹할 줄 알아야 한다. 토니는 토머스에게 전화를 걸면서 그가 부디, 그녀가 출장을 가서 이 낯선 호텔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소외감을 이해해주길 바라지만 토머스는 이해하지 못한다. 소통의 불가능성, 이 어두운 면을, 토니는 인지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남편은 그녀가 겪은 곤경 중 어느 부분에서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 역시 절대로 그에게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 이야기를 하자면 이름이 없는 무엇, 굳이 표현을 하자면 그것이 무엇이다가 아니라, 무엇이 아니다라는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하는 어떤 것에 관한 욕망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 자체가 남편의 반응이 필요한데, 토머스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 어쩌면 남편도 그녀에게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86

 

결국 그들은 최대한 힘을 짜내서, 이 연극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연극은 막 뒤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대에 나가 있는 이상, 배우들은 서로의 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서로가 쓴 가면을 보면서 그들의 감정을 얼추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그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파열선이 생긴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그의 자전적인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Crack-up)'에서 '그가 40대의 만찬 때 마주 하리라고 생각했던 요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처럼, 현실에서 자신이 예상한 것과 다른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리 뒤를 돌아보아도, 둥그런 원처럼 원만해 보였던 자신의 일상은 어느새 파열되어 있었고 어디서부터 그 파열이 시작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토머스와 토니, 하워드와 클로디어, 레오와 수지, 스완 부부와 브래드쇼 부부는 애써 그 파열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토머스와 토니는 더더욱, 그들이 위치를 바꾼 만큼 생은 훨씬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보' 되어야만 하고, '진보'는 좋은 것일 거라고.

하지만 토머스는 깨닫는다. '진보'는 좋은 것이 아님을. 그리고 그들이 품은 환상과 실재가 얼마나 다른지.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딸 알렉사가 아팠을 때 그들은 그 간극을 역력하게 본다. 하지만 그 파열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들은 처음으로 온전하게 되돌아갈 수 없다. 알렉사의 들리지 않는 한쪽 귀가 다시 들리게 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의 끝은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하지만 이는 원래대로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하워드와 클로디어 부부의 경우에도 그들은 조화로워 보이고, 점점 성장해 가는 아이들과 귀여운 애완견 스키틀과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 또한 갈등을 안에 품고 있다. 그들의 미래라고 볼 수 있는 브래드쇼 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클로디어는 '하워드'의 활동공간이 집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어떻게 될 지 깨닫는다.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보면서. 하워드는 자신의 폐에 생긴 게 암이 아니라 그냥 푹 쉬면 낫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삶의 굴레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스키틀의 죽음으로, 그들의 멜로디에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끼어든다. 이 불협화음은 지나간다고 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진다면, 이는 거짓말이다. 결국 클로디어와 하워드는 끊임없이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알면서도, 이 연극을 계속 해나갈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으로 굴러나가기 위해서.

 

 

아이즈 와이드 셧

 

세상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그들은 연극을 계속 해나간다. 올가는 '살아가는 척'을 하는 토니와 토머스의 방을 보면서 역겨움을 느낀다. 누가 자고 일어났다는 것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어지럽혀진 방 안. 하지만 토머스의 '사적인 속옷'만은 깨끗하게 접혀 있다. 이는 '깨끗한 방 안'을 역으로 뒤집은, '더러운 방'으로 그들이 '바쁘게 살고 있다'는 무대를 보여준다. 하지만 토니와 토머스, 그리고 브래드 쇼 가족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연극을 하고 있다. 토니에게 작업을 거는 카슨마저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역할을 규정짓지 못한다면 연극 배우는 배우가 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토니의 어머니는 토니를 앤토니어라고 부르며, 그녀의 위치가 제대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전업 아내', 토머스는 '전업 남편'으로. 레이철 커크스는 '현실'을 그리면서, 그 현실 내에서도 엄격하게 나뉘어지는 연극 속 역할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역할명''연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연극에서는 정해진 상황과 정해진 대사가 있다. 만약 이를 어길 시에는 연극 전체가 깨져버리고 만다.

실제로 알렉사가 하워드의 집에서 다쳤을 때, 토니는 그저 검은 옷을 입었을 뿐인데 마치 모든 죄를 사해줄 것 같은 '신부'의 역할을 맡고 하워드와 클로디어는 그 신부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해 바치는 고해자가 된다. 이는 그들의 화해를 뜻하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이 모든 죄를 저질렀다는 것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인에게 죄를 회개해 달라고 말하면서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가려 놓는 것이다.

토니는 이를 우습게 여긴다. 하지만 그녀 또한 그런 덫에 빠져 있다. 그녀도 토머스에게 이상적인 역할을 씌워 놓았다. 클레어를 잊지 못하고, 절대적이고 위대한 사랑을 하던. 그녀에게 키스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사람. 허나 그는 클레어를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토니는 당혹스러워 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토머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토머스는 묻는다. '그러면 진짜 답이 뭐였을까'라고. 어떤 답도 진짜 답이 될 수는 없다.

수지와 레오는 집안의 눈치를 보며, 브래드쇼 부부가 '소고기'를 준비해 두었다고 말할 때 그들이 채식주의자라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문다. 그리고 딸 매들렌이 '수지'가 속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그녀가 담배까지 피웠다는 것을 말하자 재빨리 드러난 진실을 감추고자 한다. '교육을 잘 받아서' 입을 잘 다무는 알렉사를 '착하고 얌전한 아이'라고 말하면서. 매들렌과 알렉사, 아이들은 감추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입을 열고 말하려고 한다. 그럴수록 어른들, 이 연극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불쾌함을 느낀다. 스완 부부 또한 알렉사가 이 연극에서 '제때'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에 불만을 느낀다. 클로디어 또한 자신의 예술을 위해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그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녀는 제대로 된 예술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것을 '하워드'의 탓으로 돌린다.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는 게 가장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중에 커크스는 노골적으로 극본 형식을 사용해 클로디어와 하워드의 분쟁을 연극 대사로 보여준다. 이 대사들은 엇갈리고 부딪친다. 나중에 클로디어는 하워드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고, 하워드는 클로디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는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도 마찬가지다. 토니와 토머스는 그들의 딸인 '알렉사'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를 한다. 어느 쪽으로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자기가 잡은 쪽을 잡아당긴다. 솔로몬의 공정한 판결은 이 곳에서 어떤 효력도 이루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 알렉사가 병원으로 실려간 순간에서야 '아이'에 대한 생각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클로디어는 로티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로티가 벗어 놓고 나간 '코트'를 로티처럼 여긴다. 코트는 그나마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녀가 직접 먼지를 털어 주는 등 보살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티는 스스럼없이 기존의 역할에서 벗어난다. 이상한 치마를 입고 아이들과 어울려 다닌다. 클로디어는 그녀의 딸을 '알아보지' 못한다.

 

여학생들의 팔과 다리와 웃음이 모두 하나로 뒤범벅이 된 것만 같다. 모두 가방을 들고, 팔찌와 귀걸이를 하고,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까지 하나로 뒤섞여 누구 머리칼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그중 한 명이 그녀의 시선을 끈다. 클로디어는 한참을 들여다본 후에야, 로티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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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외도를 고백한다. 남편은 이를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벽해 보였던 그들 부부 사이에 뭔가 빈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아내는 남편에게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자', 섹스하러 가자고 말한다. 완벽한 생활을 위해서 이들은 진짜 속내를 덮어버렸다. 레오는 새로운 코트로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감춘다. 그는 '지난 해에 입었던 코트'를 기억하지 못하고, 새로운 코트로 새롭게 그 자신을 위장한다. 그는 연극조로 말하는 여자와 남자를 경멸하지만, 그 또한 한 명의 훌륭한 연극 배우일 뿐이다. 토머스는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를 읽는다. 그는 아내가 전화를 꺼놓은 동안 그를 배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또한 한 때나마 그런 유혹에 넘어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관심있게 바라보는 시선을 등지고, 다른 곳을 쳐다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가족의 시작과 끝은 유사하나, 완전히 유사하지는 않다. 원래 있던 진실을 취소시키는 순간, 그들은 깨닫게 된다. 가족이라는 원 안에 어떤 파열선이 생겨났는지를. 그리고 그 파열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현실은 가족 소설들처럼 화합이란 불가능하고, 그저 재빨리 다른 장막으로 가리는 수밖에는 없다. 냉정하게, 곡이 끝나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맞춰 허겁지겁 박수를 칠 수밖에 없듯이.

 

가끔 저녁에, 둘은 서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고, 그때마다 토머스는 그 눈에 죄책감이 가득한 것을 본다. 그런 표정은 우연한 것이었다. 그저 어쩌다 눈이 마주치고, 놀라고, 순간 무언가가 들통난다. 둘 사이의 새로운 어떤 단절, 마치 맨 처음 눈이 마주친 낯선 사람들처럼, 그건 경험에서 오는 죄의식, 오직 낯선 사람 앞에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은 각자 무엇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지는 앞으로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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