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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 영국 베이비부머 세대 노동 계급의 사랑과 긍지
브래디 미카코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2년 6월
평점 :
인생이 우리 모두를 속일지라도
-브래디 미카코의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2022)를 읽고-
솔직해지자.
우리는 인생에게 속아 넘어간 지 오래다.
속아 넘어간 지 오래면서 속았다고 분개하고, 억울해하며, 슬퍼하다가 이내 체념한다. 체념하면서 착각한다. 지난 선거 때 진보당을 찍었지만 생각보다 세금이 많이 나오자 속았다며 화를 내고 다음 선거 때는 보수당을 찍는다. 신뢰가 무너졌다고 착각하는 한편 여전히 어딘가에는 진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신교 교회에서 기도발이 듣지 않으니 천주교 성당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리석다고 냉소하는 사람 역시 어리석기 그지없다. 삶을 가능케 만드는 건 의심과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다. 작고 큰 믿음들이 우리 삶을 지탱한다. 가령 우리가 집을 짓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면 그냥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마당에 몇 시간씩이나 무방비하게 잠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현실은 냉혹한 법(Reality Bites)
물론 무엇이든 덥석덥석 믿을 순 없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음식인지 아닌지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덥석 먹었다가는 눈꺼풀과 목이 붓는 건 물론이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브렉시트 사태 당시 소위 영국의 엘리트들은 탈퇴에 표를 던진 국민들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에 놀라워했고, 잔류에 표를 던진 이들은 탈퇴에 찬성한 이들을 두고 ‘시대에 뒤떨어진, 못 배운 이들’이라거나 ‘인종주의자’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레이철뿐 아니라 레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첫째 아들마저도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이유로 레이를 몰아세운다. 그런 레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은 자신은 ‘평화’를 원했을 뿐이라는 걸 몸소 증명하는 것이다. 허나 레이의 팔뚝에 새겨진 단어는 평화平和가 아니라 중화中和라는 단어다. 차라리 영어로 평화peace를 썼더라면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다. 레이는 한자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인터넷을 검색했고, 얼추 비슷한 형태의 단어를 도안으로 들고 갔다. 물론 이러한 실수는 본래 의도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레이는 레이철과 자신의 가정을 복구하길 원했고, 브렉시트에 찬성한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정부의 긴축 정책으로 인해 ‘일 안하면서 놀고먹는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복구하는 한편 NHS의 부활을 꿈꿨다. 탈퇴파는 브렉시트로 마련된 예산을 공공 의료 시스템에 돌릴 수 있다고 주장했고, 탈퇴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당연히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믿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본래 사기꾼들은 상대방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내미는 법이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훌쩍 떠나버린다. 부두 노동자인 션은 탈퇴파지만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욕을 듣는다. 책임을 지는 쪽은 사기 당한 사람, 즉 믿은 사람이다.
왜 믿었는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하지만 그들은 뒤통수를 맞았고, 뒤통수를 치고 달아난 이의 책임까지 모조리 떠맡아야 한다. 그들을 두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건 쉽지만, 그들이 속지 않도록 도와주는 건 어렵다. 사람들은 어려운 쪽을 어렵다고 말하면서 내버려두고, 쉬운 쪽은 쉽다는 이유로 남용한다. 사이먼과 사이먼의 조카는 사이가 좋지만, 사이먼이 젊은 배거에게 잔돈을 주자 조카는 그의 행동이 안일하고 무책임한 자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에 사이먼은 “너희 세대는 왜 그런 식으로 합리적으로 정리하려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야, 사람은 그렇게만 살 수 없다고.”(p.62)라고 대꾸한다. 션이 아일랜드 청년을 집에 들였다가 돈이 되는 물건을 모두 털렸듯이 사이먼에게 구걸했던 배거는 그 돈으로 술병을 산다. 현실은 냉혹한 법, 어떤 사건이든 결말이 희망이 아니라 절망적인 현실을 재확인하리라는 회의적인 신념은 희망으로 기울어진 이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긴다.
과거 노인들은 ‘살아 있는 도서관’이라는 말마따나 오랜 세월을 거쳐 지혜를 얻은 이들로 대접받았지만, 이제는 빠르게 바뀌는 세상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뒤떨어지고 거치적거리는 부산물이 되었다. 사회화를 마친 지 오래라고 믿었던 중년은 사회화를 마치지 못한 아랫세대로부터 문화화의 요구를 받는다. 세대를 뚜렷하게 구분할수록 세대의 전형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진실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브래디 미카코는 코로나로 인해 상점들이 폐쇄되었을 때 사람들이 나서서 거동을 못하는 노인들을 대신해 생필품을 사다주겠다고 자처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허나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고 다시 삶의 문제가 대두되자 노인들은 도서관이나 도와야 할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방해하는 존재가 된다. 정말로 그런가?
언제나 인생의 밝은 면을 보기를(Always Look of The Bright Side of Life)
박완서는 산문 <생각을 바꾸면>에서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정보는 한정적이며, 그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은 편견에 의해 ‘자연스럽게’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전철에서 뚱뚱하고 땀을 뻘뻘 흘리는 남성이 자리에 앉아서 어느 예쁜 여자를 힐끔거리면서 쳐다보는 모습을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그 남성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데, 여자는 알고 보니 아이가 딸린 어머니였다. 박완서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정보들을 제 나름대로 오해한 것이다.
브래디 미카코의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에서 나오는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실수 연발이고 지나치게 감상적이며 참견도 많이 한다. 스티브는 탈퇴파지만 10대 청소년들이 중국인 이민자들의 집에 테러하지 못하도록 자경대를 만들어 활동한다. 브래디 미카코의 남편은 지고 싶지 않은 기분에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견디면서 NHS 예약일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제프는 자신과 피가 섞이지 않은 나타야의 어린 아들을 자신의 아들인 양 돌본다. 대니는 다운증후군 조카의 입학을 거부했던 유치원에 가서 담판을 짓고 조카의 취직까지 살핀다. 대니의 여동생 제마 역시 오빠 대니를 기리겠다며 대니의 친구들을 모아 한바탕 떠들썩하게 추모 행사를 연다. 테리의 친구이자 브래디 미카코의 옆자리에 앉았던 데이비드는 으리으리한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포크파이 모자를 침실에 장식한다.
이런 모습들을 보노라면, 비록 그들 중 다수가 연합 탈퇴에 표를 던졌을지언정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한국에서도 ‘아저씨’는 ‘목소리가 크고, 툭하면 마스크를 벗고 다니며, 공공질서를 지킬 줄 모르는 데다 잘 모르면서 함부로 남에게 참견하는’ 존재지만,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간의 알코올 해독 능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약점들을 간과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두시간 반 거리를 오가면서 일하던 시절, 이마에 열패치를 붙인 채 손잡이에 매달려가던 내게 자리를 양보한 사람은 한 아저씨였다. 그는 ‘자신의 딸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브래디 미카코의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다>에서 나오는 심퍼시와 엠퍼시의 공통점은 상상력이다. 완벽하게 솔직한 인간이란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데 어떻게 상대방에게 솔직함을 요구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의도적으로 감추거나 의도하거나 의식하지도 못한 자신의 진실-은 그저 상상력만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다. 상상력은 소통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가끔은 오해와 망상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브래디 미카코 주변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억울하기만 한 존재라고 본다면 그야말로 이 책의 취지를 흐리게 될 것이다. 젊은 세대의 비정함을 탓하면서 나이든 세대의 순수함에 대한 향수로 읽는다면, 그야말로 ‘적폐’다. 스티브는 영국으로 들어와서 돈만 벌고 나가려는 이민자들 때문에 사회가 엉망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나타야는 제프와 나이차가 현격하게 나는 태국인이다. 대니가 투병하는 동안 베트남 여성은 그의 곁을 지켰고,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그가 오래 살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얼마 안 되는 유산과 염치가 없다는 비난뿐이었고, 영국 비자마저도 연장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한쪽만을 비판하고 옹호하기에 삶은 다채로운 법이다. 나타야는 ‘가장에게 순종적인 동양 여성’이라는 역할을 거부하고 제프에게 육아를 떠맡긴다. 대니의 곁을 지켰던 베트남 여성은 레이와 다시 연락을 나눈다. 대니의 여동생 제마는 대니가 살아있을 적 그를 돌보는 베트남 여성에게 누구보다도 친밀하게 대했지만, 유산 문제가 일어나자 ‘감히’ 끼어든다는 이유로 그녀를 배척한다. 데이비드는 성소수자고, 그는 빈곤에 대한 혐오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한편 긴축 정책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이들을 어린애 취급한다.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선한 존재’가 아니다. 마냥 ‘인생의 밝은 면’만 보면서 살아갈 수만은 없다.
여전히 거칠고 낯선 곳을 헤매고 있을지라도(Still Wandering Around The Wild Side)
어느 서평자는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에서 ‘아저씨’들을 향한 브래디 미카코의 애정 어린 시선이 드러난다고 했다. 애정이라는 건 그 사람이 선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성립되지 않지만, 악하다는 이유로 철회되지 않는다. 애정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과정이다. ‘받아들인다’는 뜻은 종종 이해와 납득으로 오인된다. 하지만 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건 그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면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는 게 아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결론 내린다면 애정이 아니라 기만이고, 혐오 역시 같은 구조로 작동한다. 혐오는 누군가의 행동이나 결정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든 본인의 가치관에 억지로 구겨 넣은 결과다. 그래서 납작하고 편파적이며, 쉽게 누군가를 어리석다고 여길 수 있다. 어리석다고 여기는 순간 그들의 말을 들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 그저 ‘혐오’로 일관하며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추락한 자신의 위상을 추켜올리는 것이다.
브래디 미카코는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2020)>에서 사립중학교 대신 지역의 공립중학교를 택한 아들과 아들 주변의 친구들을 바라본다. 이민자 출신이지만 인종 혐오를 그대로 드러내는 다니엘이나 사립학교와 공립학교의 레인을 당연하다는 듯이 갈라놓는 수영장, 가난하다는 이유로 멸시받는 팀……. 그녀는 아들과 또래인 아이들의 작은 사회가 어른들이 만든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이들은 인종이나 빈부격차에 따라 분류되고, 그 분류에 따라 ‘정의’된다. 정의된 이상 아이들의 미래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 흘러갈 뿐이다. 우리의 무의식중에 내재된 분류법은 어떻게 한 사람을 이해하기를 포기한 채 오해하게 만드는가. <인생이 우리를 속일지라도>의 베이비부머 세대나 Z세대, M세대 역시 특정 사회 분위기에 따라 임시로 분류된 유형일 뿐이다. 브래디 미카코가 각 세대들을 나눈 기준에 관해 설명을 덧붙인 건 그 분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해하고 싶은 대상들을 둘러싼 세계에 관해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목을 조여 오는 긴축 정책과 부정적인 인식 가운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다.
스티브의 에피소드는 분류와 정의가 얼마나 얄팍한 술수인지 보여준다. 정부는 긴축 정책을 이유로 동네 도서관을 폐쇄하고 민간 부지로 매각한다. 그러나 폐쇄라는 부정적 표현을 쓰면 빈민가 복지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인지 도서관을 커뮤니티 센터로 이전하겠다고 알린다. ‘이전’이라는 단어로 ‘폐쇄’라는 실상을 가리는 것이다. 그들은 빈민층이 ‘독서’를 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비싼 책값을 들여가며 읽지도 않을 책을 구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효율적인 방법으로 부지를 ‘재활용했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논리가 아닌가. 이전한 도서관은 놀이방 구석에 처박혀 있지만, 스티브는 저항하듯 계속 공공도서 서비스를 이용한다. 그는 자신이 읽고 싶은 도서를 꾸준히 신청하는 한편, 놀이방을 이용하는 모녀들을 도와준다. 그 답례로 받은 부활절 달걀은 내내 정부의 긴축 정책에 당당하게 맞서던 스티브의 눈가에 눈물을 맺히게 만든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믿지만 속을 수 있고, 속아도 계속 믿을지도 모른다.
믿기 위해서 의심한다.
세대와 빈부격차, 성별에 따른 분류를 마냥 믿을 수도 있지만, 그 분류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분류에 따른 정의로 재단된 누군가를 발견할지도 모르고, 나 역시 그 틀에서 벗어나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그곳은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미래, 한없이 거칠고 낯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