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유령일 뿐 민음사 모던 클래식 71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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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디트 헤르만을 처음 읽은 건 한 출판사에서 내놓은 시리즈 서포터즈로 활동할 때였다. 장편으로 나왔다지만 거의 중편 분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얇았다. ‘알리스’를 읽으면서 껍질이 다 벗겨져 가는 나이 든 나무 옆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사라진 사람들이 살아있는 순간을 쓰면서 담담하게 행복했다고 말하고, 그 순간을 동시에 햇빛이 잠깐 비춘 것과 같았다고 말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나는 ‘알리스’의 문체가 왠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고,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는 나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르만의 단편집 ‘단지 유령일 뿐’을 읽었을 때는 달랐다. 그녀의 두 번째 단편집이고, 초창기에 가까워서 그럴지도 모른다. 잠깐 두근거린 순간들,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기의 순간들을 얇은 거즈로 덮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순식간에 주변은 조용해지지만, 거즈 밑은 여전히 들끓고 있다. 

 ‘차갑고도 푸른’에서 나오는 요니나와 마그누스, 요나스와 이레네의 모습이 그랬다. 요나스가 찍은 사진 한 장이 요니나로 하여금 ‘벽에 못질을 하고 싶게 할 만큼’ 충동질을 한다. 요니나와 마그누스, 수나는 다 같이 평온하게 살고 있지만 요나스는 언제든 그걸 단번에 뒤집어 버릴지도 모른다. ‘루스’도 그렇다. 라울은 자신에게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루스에 대해 묘한 배반의 욕구를 느끼는 나조차도 끝내 그 상황을 견뎌내지 못한다. 어떤 변화들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펠릭스와 엘렌도 서로에게 진저리를 내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어디로 가는 길인가’의 나도 야곱에게 정착한다는 변화를 택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은 아주 얇은 거즈를 덮을 뿐이다. 상처에서 진물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소독하고 약을 바른다. 그 상처 위에는 딱딱한 딱지가 올라올 것이고, 가끔씩 그 상처 부위의 딱지가 갈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거즈를 뜯어 열어볼 수 있겠지만 이내 다시 덮을 것이다. 사람들이 그 상처를 보면 눈살을 찌푸릴 것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전시하고 내보이는 것, 솔직해 지는 건 그들에게 어렵다. ‘뚜쟁이’의 나는 요하네스가 다시 그녀에게 되돌아왔다고 여기고, 다시 그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미리암이 정말 요하네스에게 자신의 은반지를 대신 받을 사람이 아니고, 창녀였다는 걸 알고 난 뒤 드는 안도감은 잠시일 뿐이다. 그녀는 클럽에서 처절하게 깨닫는다. 다시는 이전의 요하네스와 사랑할 수 없고, 그녀가 믿던 이전의 요하네스도 그 요하네스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상처는 아물 것이다. 아물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거즈를 떼면, 사실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 흉터 자국으로.

 ‘아쿠아 알타’에서 나는 베니스에서 부모님의 어린 자식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차마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 수도 없고 다가설 수도 없다. 다가가서 뺨을 후려칠 수도 없다. 그저 부모님의 보호를 받고, 동시에 자신을 보호해주는 부모님을 보호할 뿐이다.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매우 사랑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이라고는 ‘분명히 늦을 거예요’라는 답변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행을 떠난다. 마치 그들의 젊은 아들딸들처럼. 여행지에서 만난 자식들을 보며 ‘이제 우리가 너희를 만나러 왔다’라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발코니에서 하루종일 그들을 기다린다. 진정으로 그 여행을 즐기지 못하지만, 나는 차마 그 진실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또다시 덮을 뿐이다. 

 ‘단지 유령일 뿐’의 대사들은 의미심장했고, 서술들은 외국어를 번역한 것인데도 묘한 리듬이 있었다. 엘렌은 “정말 너무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며 그녀가 펠릭스와의 관계에서 절망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안다는 건 이미 그녀 자신이 절망 한가운데에 있다는 걸 인지한 것이다. 그리고 버디가 자신의 아이에게 사주는 운동화에 대해 묘사할 때, 나도 모르게 숨죽여 읽게 되었다. 아주 비참한 한 순간에도,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아이에게 작은 운동화 한 켤레를 사주는 것”이 얼마나 말하기 어렵고, 행복한 것인지를 말하는 버디는 그 누구보다도 현명해 보인다. 


 “그건 말이야…….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지만, 정말 좋아, 운동화는 얼마나 작고 앙증맞은지, 그리고 완벽해. 성인 운동화를 그대로 완벽하게 축소해 놓았다고. 그렇지? 안창이 깔려 있고 튼튼한 끈이 달린 파랗고 노란 신발이 작고 완벽한 신발통에 들어 있고, 그걸 사 가서 아이에게 신기는 거야. 아이가 그걸 신고 걷는다고, 그걸 신고 걸어. 그게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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