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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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관련 연구가 많이 풍부해졌으리라 막연히 짐작해왔는데, 2000년에 초판, 2006년에 재판이 나온 김동춘 선생의 이 책은 여전히 한국전쟁 관련 단행본의 최신 목록에 올라 있다. 전쟁이 너무 쉽게 잊혀졌다는 것은 보수우익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진보 학계에서도 역시 통용될 수 있을 듯하다.


최근 학계는 푸코의 통치성 논의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갔으며, 기든스, 벡, 바우만 등의 후기근대 논의가 새로 주목을 받고 있는 듯하다. 이들의 견해는 분명히 다르지만 양자 모두 명시적인 폭력과 권력보다는 미시적인 차원의 권력이 일상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주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이 흐름 속에서 공부를 하고 논문을 써왔으므로 그 자장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유로운 개인들의 활동 속에서 생겨나는 권력 효과라거나 생활정치 등의 논의가 (적어도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다소 억지스럽다는 근본적인 반감이 생기고 있었다. 비판할 권력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론적 분투를 통해 비판대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아직은 조심스러운 이야기이다.


반면 전쟁이나 혁명과 같은 '사건'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시적이고 명백하고 즉각적인 폭력과 물리력을 통해서 사회를 형성·변화·파괴시킨다. 현대 한국의 사회는 식민지, 전쟁, 독재, 광주, 87년을 겪으며 형성되었고, 자유주의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권력의 모습이라거나 사회문제는 사실 매우 최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거대한 사건들을 반드시 짚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저자인 김동춘 선생은 어느 정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전쟁 연구가 주로 '전투'의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왔으며, 그것의 배후에 있는 '정치'의 문제, 그리고 전쟁이 사회에 미친 효과, 즉 실제로 민중들이 경험했던 전쟁의 측면은 억압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연구의 출발점이다. 『전쟁과 사회 』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전쟁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연결고리는 다소 투박하게 여겨지는 곳이 많다. 여기엔 몇 가지 연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저자는 한국전쟁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이 수정주의와 전통주의의 대립을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는 하지만 실제로는 "브루스 커밍스를 과도하게 의식하면서 그에 대한 암묵적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거나 대체로 미국의 자유주의 혹은 주류적"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9). 그는 공개된 자료의 비대칭성, 사회주의권의 붕괴, 미국의 신패권주의 등의 영향에 알게 모르게 편승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관점은 많은 부분에서 한국전쟁의 발발과 영향에 대한 책임의 소재가 미국과 이승만에게 귀속되게끔 한다. 이는 사실에 부합하는 면이 많기도 하고 역사적 정의에 대한 독자의 도덕감정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보수적이거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기존의 논의들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이 정도로 써도 되나' 싶은 불안감이 들 때도 있었다. 셋째, 전쟁과 사회의 관계를 논함에 있어서 저자는 한국이 여전히 전쟁으로 인해 형성된 국가와 사회임을 상기시키면서 다소 단정적으로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를테면 '피란사회'와 같은 용어들은 분석적이라기보다는 규정적 언술이어서 논지가 다소 투박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감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요인들보다도 근본적인 사정은 따로 있다. 그것은 저자가 택하고 있는 이론적 관점이나 논지 전개 방식이 아니라 한국전쟁 그리고 그것의 연장인 현대 한국사회라는 대상 자체와 마주하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어떤 감정에 기인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필자는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성적이고 냉정한 연구자로서의 균형감각을 견지할 수 없었다. 슬픔과 분노가 사회과학적 추론을 압돟였으며,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필자를 밀어붙였다. 전쟁통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꿈에서도 나타나, 자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 앞서 말한 전북 남원의 학살 현장에서 만난 노인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며, 전쟁 시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당하고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 경북 울진의 한 노인의 힘없는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연구자로서 객관성과 진실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굴곡으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데는 역시 '냉정함'이 견지될 수 없었다."(59)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저자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몇 가지 미덕이 있다. 한국전쟁기 정부와 미군, 그리고 이들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던 학살에 대한 진실을 파헤침으로써 억압된 앎을 끄집어 내는 것, 그리고 미국의 시각, 정부의 시각, 군대의 시각이 아니라 전쟁을 감당해야 했던 일반 민중의 시각에서 전쟁을 서술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과연 무엇이 진정 우리의 시각이고 무엇이 민중의 관점인지 앞으로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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