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자
배수아 지음 / 열림원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작가의 말'에 작가 스스로 요약해 놓은 이 책의 줄거리는 딱 5줄이다. 별다른 사건과 서사적 장치가 구비되어 있지 않더라도 관념의 투쟁을 기록해 놓은 소설을 읽는 마음은 흡족하다. 혁명가의 삶을 그린 소설이라면 작품과 함께 호흡하는 방법은 추체험이라는 앙상한 가능성뿐이지만, 관념소설의 경우 나의 관념을 작동시키면서 그 조용하지만 치열한 삶의 과정에 간접적으로나마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173)가 되리라는, "지고한 관념의 성(城)"(208)으로서의 자유를 맛보겠다는 열망이 소설 속 '나'의 관념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다. 이 열망은 사실 몽상이어서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쥔 채 사방을 노려보는 고통스러운 자세를 유지하느라 지하감옥의 죄수보다 조금도 더 자유롭지 못"(197)한 역설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학문과 자유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지금은 낭만화된 시선으로 회고되는 80년대에도 마찬가지였고, 정치적 자유를 부르짖는 목소리들이 기실은 "정신의 궁극적인 해방"(209)으로서의 자유를 모욕하는 것임을 이 소설은 웅변하고 있다. 그런 껍데기의 자유, 일차원적인 자유 마저도 거세되고 있는 대학과 사회의 모습을 상기할 때 이 작품은 그 관념성에 '이상주의'라는 또다른 수식어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표로 '자유'를 상정하고 있으면서도 그 목표는 자꾸만 그야말로 궁극의 어떤 지점으로 밀려나는 느낌이다. 정신적 투쟁을 감행하고자 하는 용기는 그 모험이 가져올 위협들 앞에 점점 침식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쪼그라드는 나의 모습을 목격하고 정당화하면서 궁극의 어떤 지점에 세워둔 자유의 크기는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자유에 대한 모험을 감행한 사람만이 그에 대해 배울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독학자는 소설을 통해 결코 온전히 경험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에 틀림없다. 과연 언젠가는 나도 독학자의 기록을 가지게 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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