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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인생
이동원 지음 / 포이에마 / 2016년 10월
평점 :
한국 소설 : 완벽한 인생
간만에 후룩 읽어버린 재미있는 소설. 야구에 어느정도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완벽한 인생'. 이 소설은 제 10회 세계문학상 수상 작가 이동원의 장편 신작 소설이다. 야구에는 한국시리즈라는 것이 있고, 이건 참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얘기가 많다. 이 책의 배경은 그런 한국 시리즈의 7차전 경기. 그것도 이글스와 베어스의 마지막 경기다.
한국 시리즈 7차전이 열리는 잠실 야구장. 그 근처의 은행에서 시합이 시작하기 전 인질극이 벌어진다. 27명을 잡아 둔 범인의 요구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글스의 투수 '우태진'이 마운드를 지키는 것. 한 회를 막아낼 때마다 인질을 세명 씩 풀어줄 것이지만, 우태진이 마운드를 내려오는 순간 누군가 죽는다!
수요일. 누군가에게는 수요예배가 있는 날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애매하기에 버림받는 날.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은퇴경기를 하는 날. 그래서 한 사람은 수요예배가 있는 날에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 경기를 볼 수 있는 합법적인 사건이 벌어진 날이 되고 한 사람에게는 인질극을 벌이는 날이 되고, 또 한 사람에게는 한 타자만 막으면 되는 날에 자존심을 버리게 되는 사건이 생긴 날이 되었다.
타자들은 누구나 홈런을 꿈꾼다. 하지만 담장 밖으로 공을 펑펑 날려 보낼 힘을 가진 선수는 많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 한계 속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 51
우태진. 그는 24살에 많은 것을 이뤄낸 천재 투수였다. 그는 완벽한 투수로 이름을 떨쳤고 프로로 데뷔해서 승승장구할 나날을 꿈꿨으나, 부상을 당하고 재활을 하고, 또 부상을 당하고를 반복해 유리 몸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나면 좋은 투수로 남을 수 있었으나 그 전의 찬란했던 자신을 잊지 못해 결국 또 다른 부상을 입어 재기하기 힘들어진 우태진. 그는 결국 은퇴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 날, 우태진에게 형사가 찾아온다.
자리로 돌아간 포수가 사인을 냈다. 한가운데 슬로우커브. 평소라면 절대 던지지 않을 공을 나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던졌다. 망치면 다 저놈 책임이다. - p. 44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았다. 나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 남몰래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운드에만 오르면 그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아닌 남이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아닌 자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무덤 안에 서 있다. 그런 내가 지금 그토록 싫어했던 방식으로 공을 던지고 있다.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내가 싫지 않다. 아직도 공을 던질 수 있다. 타자들을 아웃시킬 수 있다. 팬들은 그런 나를 향해 환호했다. 볼썽사나울 줄만 알았는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만큼 스스로가 한심했다. 나다운 것이 대체 뭔데 나는 왜 내 무덤 위에 서고서야 이런 공을 던지고 있나. - p. 55
첫 회는 그럭저럭 막아내고, 다음 부터는 인질구출이라는 막대한 사명 앞에서 자존심을 던지고 포수의 사인대로 투구를 하는 우태진. 그는 포수는 그저 받아내는 역할로만 생각하고 던지던 강속의 투수였다. 그러나 그 재능을 잃고는 계속 얻어맞기만 하는데 은퇴 경기에서 인질들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투구를 하자 제구력 덕분에 한 번 타자가 돌 때까지 완벽하게 그들을 아웃시킨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는 것처럼 풀려나는 3명의 사람들.
좋은 공과 나쁜 공을 구분할 줄 아는 선구안과 좋은 공을 끝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 p. 59
그러나 타자들은 바보가 아니어서 그들이 치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고 그에 맞게 받아칠 것이다. 그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너클볼. 타자도, 던지는 투수조차도 어떻게 들어갈 지 나아가는 방향을 알 수 없는 공. 던지면서도 조마조마한 공. 그 너클볼을 우태진이 던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힘을 원한다. 육체적인 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몸을 통제할 정도의 힘은 필요로 한다. 병이 들어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건 아무도 원치 않는다. 경제력이나 권력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욕심이 없어도 안정적으로 살 정도의 돈은 갖기 원하고, 대단한 야심가가 아니라도 삶의 주인은 자신이 되고 싶어한다. 투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던지는 건 그저 공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담아 공을 던진다. (중략) 너클볼을 던지기 위해선 그 모든 힘과 의지를 내려놓아야 한다. 너클볼은 나아가는 방향을 알 수가 없다. 최고의 타자라 해도 너클볼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연습해온 대로 배트를 휘두르고 맞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건 투수도 마찬가지다. 일단 공을 던진 다음엔 마운드와 타석 사이를 흐르는 바람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그 미세한 바람에 자신의 인생을 맡겨야 한다. 이런 공에 처음부터 인생을 맡기는 선수가 있겠는가. 자신에게 인생을 열어갈 힘이 있다고 믿는 선수는 너클볼을 찾지 않는다. 그래서 너클볼은 한 번 죽은 자들의 공이다. - p.75
야구에서는 퍼펙트 게임이라는 말이 있다. 한 명의 투수가 선발 등판하여 단 한 명의 타자도 진루시키지 않는 경기. 홈런을 포함한 안타, 볼넷, 사구, 수비 실책 등 어떤 경우에도 타자를 진루시키면 안 된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는 1950년 한국인 투수 이팔용이 처음으로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이후 16번이나 있었다고 하는 이 퍼펙트게임을 한국에서는 아직 단 한차례도 기록을 달성하지 못 했다.
투수 우태진은 8회까지 퍼펙트게임을 달성할 뻔 했으나 수비쪽 실책으로 그 기회를 놓치고 마음을 다잡지 못해 노히트 노런까지 놓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현재 은퇴 게임의 감독 또한 퍼펙트게임을 달성할뻔한 투수였는데, 그 감독은 수비가 기록을 위해 부상을 당하자 스스로 공을 놓고 내려온다. 우태진은 그 당시 감독의 결정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퍼펙트게임보다 더 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이 8회 말의 상황. 우태진은 자신이 전부 막아버리면 어차피 인질들을 다 구출할 수 있지 않냐며 의기양양해 하지만, 풀려난 인질들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몽타주로 그가 누군지를 알게된다. 그 인물의 정체는 우태진을 크게 흔들어버린다.
결국은 사랑. 책에서는 완벽한 커리어, 완벽한 재능, 그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이 사랑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다소 진부하지만 접할 때마다 공감이 가능한 이야기. 그리고 야구에 빗대어 인생을 이야기하는 구절들이 참 공감 많이 가는 말들이어서 인상깊다. 지금 내가 한계라고 느끼는 사람들, 과거의 영광에 젖어 고통스러운 현재를 직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