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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평점 :
한국소설 : 공터에서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칼의 노래'로 유명한 김훈 작가의 반가운 신작 한국소설이 나왔다. 해냄출판사 서포터즈의 세 번째 책으로 받아보게 된 이 '공터에서'는 막막한 세상에서 몸 비빌 수 있는 작은 거점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제시한다. 마씨 집안 아버지 마동수와 어머니 이도순, 그리고 장남인 마장세와 차남인 마차세, 마차세의 처 박상희의 한 가정의 이야기를 하며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현대사의 이야기까지 담아내는 공터에서. 전후의 피폐한 상황을 가족사에 녹여내었다.
사람의 생애는 그 사람과 관련이 없이, 생애 자체의 모든 과정이 스스로 탈진되어야만 끝나는 것 같았다. - p. 9
터져 나오는 울음과 울음을 누르려는 울음이 부딪치면서 울음이 뒤틀렸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울음이 몸속에 쟁여진 울음을 끌어냈다. 몸 밖의 울음과 몸 안의 울음이 이어져서 울음은 굽이쳤고, 이음이 끊어질 때 울음은 막혀서 끽끽거렸다. 그 울음은 남편과 사별하는 울음이 아니라, 울음으로써 전 생애를 지워버리려는 울음이었으나 울음에 실려서 생애는 오히려 드러나고 있었다. - pp. 46 - 47
처음은 마동수의 죽음과 함께 마차세의 시선에서 시작해서 시점과 시대상황이 교차한다. 일제시대 마동수와 이도순이 겪어낸 그 당시의 억척스럽고 마음 붙일 곳 없던 시기의 이야기부터 군부 독재시대, 마동수의 베트남 파병 시기 이야기와 급속하게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적응하지 못해 숫자와 실물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적응에 허덕이는 마차세의 이야기.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그 혼란스러운 시기와 가족사를 각자의 상황에서 엮어낸다.
사람이 죽어도 그의 한 생애가 끌고 온 사슬이 여전히 길게 이어지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옥죄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차세는 예감했다.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예감은 끝났다는 사실보다 더 절박했다. - p. 10
넌 핏덩이였어. 그 피가 내 피냐 니 피냐. 그 핏덩이가 더나. 그 핏덩이가 나야. 그게 너고, 그게 나다. 그게 내 피 아니냐. - p. 129
어디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그늘까지도 두 얼굴은 닮아 있었다. 마차세는 헤어날 수 없는 사슬에 옥죄이는 느낌이었다. - p. 132
공터에서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공허함과 황량한 감정은 소설 내에서도 그대로 느껴진다. 벗어나고 싶은 혈연의 굴레에 붙잡히고 싶지 않아 자신의 부모의 일을 내 일이 아닌 것처럼, 그들이 사는 '한국'을 '거기'라고 표현하며 정을 붙이지 못하고 자신과 유리된 어느 다른 곳으로 여기지만 종내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한국으로 강제로 들어오게 되는 마장세와, '거기'라는 표현을 잠자코 들으며 그의 '거기'가 자신의 '여기'라며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벗어날 수 없는 공간으로 여기고 막막한 현실에서 어떻게든 발버둥치는 마차세. 그들은 각자의 어려운 상황속에서 마음의 거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막막하고 힘든 자취들, 부딪히는 자도 피하는 자도 모두 다 힘들어하고 옥죄어온다고 느낀다. 어느 단면을 보여준다고 해도 시대는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는 것이기에, 그 가슴아픈 굴곡은 직접적인 영향권 내에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특기할 만한 것이 없는 보통사람들에게마저 굴레가 되는 것이다. 한 세대가 저물었다. 그러나 다른 세대의 삶은 계속된다. 쓸쓸하고 공허하지만 그렇게 이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