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강의에 영 재미를 붙이지 못했던 것이 첫째이유다. 전쟁 바람에 서재에 박혀 있던 책들이 쏟아져 나와 청계천을 따라 4가에서 7에 걸쳐 늘어선 고서점에 산더미로 쌓여 있던 시절이다. 헌 책을 뒤지는 일도 재미있었지만 운만 좋으면 이미 금서가 되어 시중에서 자취를 감춘 귀한 책들을 싼값에 살 수 있다는 덤도 있었다. 
백석의 <사슴>,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 이야기>, 그 밖에 백남운, 전석담 등의 책을 구해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고서점 순례 덕이다. 고서점에서 여러 친구들과도 알게 되었는데, 이 친구들로부터도 많은 것을 듣고 배우면서 나는 새로운 세상에 서서히 눈떠 갔다.

당시 서울은 전쟁의 참화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맨 불타거나 허물어진 집뿐이었고, 가는 데마다 팔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이며 오갈데 없는 거지들이 득시글거렸다. 
서울역 일대와 종로 2, 3가는 창녀로 뒤덮였고, 서울역이며 각 버스 정거장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드는 젊은이들로 밤낮없이 혼잡을 이루었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는가는 당시의 우리 국민소득이 50달러인 데 비해 북한은 160달러, 필리핀은 300달러라는 한 자료가 잘 말해 준다. 산업 시설이라고는 전국적으로 전무해서, 우리가 만들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빗자루밖에 없다는 자조의 비아냥이 나올 지경이었다. 

경제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승만 독재는 더욱 극성을 부리고 독재 체제라는 온상 속에서 부패는 극에 달하면서 가난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조롱했다. 경제 - P-1

고 정치고 나아질 전망은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전국을 어두운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고서점에서 만나는 책과 친구들은 나로 하여금 이러한 현실에 새삼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나는 차츰 회의에 사로잡혔다. 

이런 현실에 살면서 <갈대> 같은 오늘의 삶과는 동떨어진 시를 쓴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뒤에도 <심야>, <사화산>, <그 산정에서>, <유아> 같은 몇 편의 시를 더 써서 발표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시 쓰는 일이 점점 재미 없어지고 신명이 나지 않았다. 마치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허망함을 좀처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다른 여러 사정까지 겹쳐 7, 8년 가까이 방황하면서 시를 쓰지 못하게 됐다. 그동안 시를 버리고 다른 일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돈벌이를 하겠다고 광산에서 일하는 친구를 찾아가기도 하고 장사하는 친구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무슨 시험을 치르겠다고 공부를 해 보기도 하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기도 했지만나한테 만만한 일은 없었다. 새삼스레 깨달은 것은 내가 가진 재주라고는 그나마 글 쓰는 일이라는 사실이었으며, 그렇다면 앞으로는 시를 쓰되 지금까지와는 달리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시,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의 삶이 담긴 시를 쓰자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시 쓸 생각을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제일 먼저 쓴 시가 <눈길>이다. - P-1

나는 예순이 넘은 지금도 자유, 정의, 인권, 이런 말을 들으면가슴이 일렁인다.

노무현 이름을 들어도 그러하다.
그에게서 희랍 비극의 원형을 본다.
제왕이나 천재가 주어진 거대한 운명에 맞서다가 장렬하게 산화하는 비극으로부터 인간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인권‘을 열 걸음쯤 나아가게 한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이라기보다 시인에 가깝다. - P-1

일본은 군국주의 세력을, 한국은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후과가 오늘의 위험한 우경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 집착하는 한일 양국의 극우 세력은 일본 제국주의의 쌍생아로 국가주의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 적실하다 하겠다. 

그러고 보면 박근혜의 강경한 대일 외교는 국내 정치와 함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지 근본적인 역사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밖으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비판하면서 안으로는 일본의 후소샤 교과서보다 더 왜곡이 심한 뉴라이트의 대안 교과서를 극찬하고 노골적으로 교학사 교과서에 특혜를 베푸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2006년 3.1절 기념사에서 노무현은 말했다. ‘이웃나라에 대해 잘못 쓰인 역사를 바로잡자고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서는우리 역사도 잘못 쓰인 곳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노무현의 역사 인식과 실천적 면모는 민족문제연구소로서도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역사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도 놀랄 정도로 그 지향이 민족문제연구소와 일치하였다. 아니, 오히려 앞서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의 추측과는 달리 그가 개인적으로 연구소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거나 교감을 하던 관계는 아니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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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모으면 ‘수집‘이라고 합니다.
발달장애인이 무언가를 모으면 ‘집착‘이라고 합니다.
장애가 없는 사람이 앉아서 다리를 떨면 ‘습관‘이라고 합니다.
발달장애인이 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면 ‘상동행동‘이라고 합니다.
장애가 없는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 ‘감정 표현‘이라고 합니다.
발달장애인이 소리를 지르면 ‘도전적 행동‘이라고 합니다.
장애가 없는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먼 ‘재능‘이라고 합니다.
발달장애인이 그림을 잘 그리면 ‘서번트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그 무엇이 발달장애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우리는 발달장애에 관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 것일까요? 
25년 동안 발달장애를 공부하며 발달장애 어린이와 발달장애 성인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만나오면서 
고민했던 문제들과 나름의 답에 관하여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 책은 발달장애와 발달장애인의 삶에 관해 알고 싶은 분들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분들을 위한 작은 생각들을 담은 책입니다. 
더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발달장애와그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리고 싶어 부족한 글을 함부로 세상에 내놓습니다. - P-1

나오는 글
자녀를 대신해 발달장애 부모님들께 드리는 편지

내가 음식을 씹게 하려고 
끝없이 나와 싸워주었고
의사와 치료사, 교사와 복지사들에게
수백, 수천 번 나를 설명해야 했고
나를 미소 짓게 하려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숨겨야 했고
헤아릴 수 없이 긴 치료와 교육의 시간을 지나왔음에도
여전히 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인내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당신

내가 하루를 무사히 보내게 하려고
당신의 하루는 한 시간처럼 보내는 당신
내가 넘어져도 괜찮은 자리를 위해 - P-1

자신이 넘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당신
장애 진단이 당신에게 가져다주었을
고통, 억울함, 그 두려움에도
어느 날 다시 일어나며
"우린 할 수 있을 거야!"라고 결심해준 당신

이 길고도 거친 나날들이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음에도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을
여전히 내려놓지 않고
짊어지고 계신 당신

학교에서 걸려 온 전화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복지관에서 걸려 온 전화에
울화가 치밀어도
다시금 나를 그곳에 보내야만 하는 당신

내가 그렇게 발작을 하고 울부짖어도
그건 진짜 내가 아님을 이해해 주는 당신
내가 손을 뿌리치고 당신을 모른 척해도 - P-1

산산이 부서지는 마음을
내게 보이지 않으려는 당신
당신이 매일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당신을 함부로 판단하고
함부로 동정해도 참아내는 당신

내 작고 작은 성취 하나에도
마치 세상에서 내가 처음
그 일을 해낸 사람인 양 기뻐하는 당신

이제 아무 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때조차
다시 내 손을 잡고 일어서는 당신
내 친구들과 그 엄마들에게
끝없이 나를 설명해야 할 때도
나를 부끄럽게 여긴 적 없는 당신

내가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한순간도 걱정을 내려놓을 수 없는
당신은 언제나 나의 울트라 슈퍼 영웅입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 P-1

나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아 줘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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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는 일본인만의 것인가?

소설가 호시노 도모유키는 현실 세계에서 미미와 같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며, 세계 문학을 통해 오히려 이들이 ‘보통‘의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가운데 아이들」은 세계 표준 문학이고 지금 바로 세계 각지에서 읽혀야 하는 일본 문학의 필두라는 호시노의 말에 공감한다. 문제는 현실 세계에 호시노와 같은 이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이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을 때 심사위원이자 저명한 소설가인 미야모토 데루는 "일본인 독자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 "남의 얘기가 끝없이 계속되는 소설이 지루했다"는 심사평을 발표했다. 

작가 온유주는트위터(지금의 X)를 통해 "너무나 화가 난다. 일본도 일본어도, 자신=일본인만의 것이라 믿기 때문에 가능한 반응이다"라고 반박했다. 미디어는 온유주의 소설과 미야모토 데루의 심사평 내용보다 대가에게 맞짱을 뜬 신인 소설가라는 프레임으로 요란스럽게 다뤘다. 두 사람 발언 - P-1

에 주목하는 기사들조차 비당사자(미야모토 데루)와 당사자(온유주)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온유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사자‘ 말이라서 설득력이 있다고 하신다. 대충 말을 해도 ‘당사자‘ 말이니 새겨듣겠다는 분들도 있다. 조심스럽다. ‘당사자‘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는 건 결코 아니다. ‘비당사자‘이기에 오히려 문제의 중요한 측면을 알아채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당사자, 비당사자라는 대립 구조에 갇히고 싶지 않다. 세상의 구별 짓기, 선•긋기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당사자 말을 경청하는 비당사자라는 구도는 미야모토 데루가 심사평에 쓴 일본인(비당사자)과 상관없는 남(당사자)의 얘기라는 의식의 선한 버전일지 모른다. 
강의시간에 이런 말을 하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온다. "그럼 어떻게 해요?" 그럴 때 나는 출석 퀴즈로 온유주가쓴 ‘선의‘가 물어뜯는 마음」(아카하타신문, 2022년 9월 18일)을 읽고 간단히 감상을 적어보라고 말한다. - P-1

이 나라는 일본인뿐이라서 저는 단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마이너리티로 여겨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중략) 
작가가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제 책을 읽었다는 어느 독자가 "일본이 이런 나라여서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는데 심정이 아주 복잡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달라는 얘기에 부응하기 위해 저는 그 사람에게 오히려 "당신을 괴롭게 해서 저야말로 죄송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게 ‘용서받은‘ 상대는 위안을 얻은 것 같았지만, 
저는 계속 뭔가에 물어뜯긴 심정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이너리티 편이라고 스스로를 자부하는 메이저리티일수록, 실은 자신의 ‘선의‘에 숨어 있는 무의식적 차별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선의에 숨어 있는 무의식적 차별은 뭘까? 이 글을 읽고 학생들이 쓴 일본어 감상을 일부 번역해 보았다.

A: 블랙 외국인에게 고향은 덥습니까? 달리기 잘하시겠어요.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무의식적인 차별은 내자신이 의식하기 힘들다. - P-1

B: 마이너리티에게 친절을 베푸는 행위가 때때로 그들을 나보다 열등하다 또는 약자라고 규정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마이너리티를 특별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예컨대 같이 알바를 하는 외국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르치려 들거나 간섭하는 것도 자신은 ‘친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상대는 무능한 인간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C: 자신이 마이너리티 편이라고 자부하는 메이저리티 태도를 보면 "당신이 차별당하는 일은 필연적이지만 난 달라요"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관과 자세로 상대를 대하는 것은 상대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켜주지 않으면" 또는 "상대가 마이너리티라서 차별받기 때문에 불쌍하다"라며 메이저리티가 우월하다는 태도를 보이는 행위야말로 차별이다.

그 밖에도 비슷한 의견이 많았다. 특히 유학 경험을 가진 학생들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떨까? 궁금하다.
나는 이 글을 읽었을 때, 주인 의식이라는 단어가 떠 - P-1

올랐다. 이 나라의 주인은 ‘나‘라는 의식이 강하게 깔린 사과였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을 대표해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온유주는 지금 마흔다섯 살, 세살 때 일본에 와서 일본 공교육을 받았다. 인생 경험을 거의 일본에서 했음에도 너는 손님이라는 대접을 정중하게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나 역시 친절한 손님대접을 한국과 일본에서 톡톡히 받는 신세니..... 좋으면서도 씁쓸하다. - P-1

문은 열릴지니
부모 없는 아이에게
다리 잃은 병사에게
갈 데 없는 노파에게
명랑한 남녀 추니에게
분노에 찬 야생 곰에게
슬픈 눈을 가진 남양 코끼리에게
저것은
화성으로 향하는 로켓에 올라타는 비행사들불을 피우고 둘러앉는 법을 터득한 고대인들그것은
꿈꾸는 자들의 낙원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곳

굳게 닫혔던 역사의 문, 그 ‘문은 열릴지니‘로 소설의 마지막이 ‘시작‘된다. 여기서 귀환병 오빠와 어린 기와코는 다시 만난다. 그들의 만남은 도서관 이야기의 마지막 정리 번호 ‘25‘라 쓰이고 ‘국립국회도서관 지부 우에노도서관 앞‘으로 명명된다. 도서관 안과 밖, 두 개의 이야기가 평행하게 진행되던 소설이 결합되는 순간이다. 독 - P-1

☆ 마른하늘에 날벼락!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난 이렇게 대답하리라. 마른하늘에날벼락. 
사망자와 실종자가 2만 명이 넘는 대참사였다.

도쿄 피해는 동북 지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ㅈ당시 방사능에 관한 정보가 통제된 상태에서 느낀 극심한 불안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전날인 3월 10일 시카고 대학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 참석했다가 귀국한 터라 이날은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일본은 4월 1일에 새 학기를 맞이하므로 중학교 졸업을 앞둔 아이는 방학이었다. 지진이 난 순간 나 - P-1

는 너무나 놀라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이 이름만 크게 불렀다. 그런데 아이는 대답하는 둥 마는 둥 바쁘게 집 안을 돌아다니며 뭔가를 하더니만 내 손을 잡아끌어 현관 쪽 복도에 앉혔다.

나중에 물어보니 가스불을 먼저 확인했고 베란다 창문과 현관문을 살짝 열어 대피로를 확보했다고 한다. 강진이 이어지면 창문이 휘어서 문이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비상식량과 전등, 라디오를 챙겨서 현관에 놓고 몸이 완전히 굳어 꼼짝달싹 못하던 어미를 물건이 떨어질 염려가 없는 복도에 앉힌 것이다.
이어 조용히 자신도 내 옆에 앉았다. 

어릴 때부터 도쿄에서 지진 대비 훈련을 받은 덕분일까. 무척 침착하고 담담하게 움직여서 감탄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이가 허등대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 P-1


폭발의 충격이 컸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후 하늘에서 재가 많이 내렸다.
그것을 재미 삼아 잡으려고 한 사람은
‘죽음의 재다. 만지지 마라‘는 핀잔을 들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을 만큼 좋은 냄새가 났다고.
어떤 냄새가 났느냐고 묻자,
무엇에 비유할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잊히지 않는 냄새가 주변에 충만했다고
‘비유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나는 느꼈다.
이 나라는 무섭구나.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르고
그분이 말해주신
그 감촉 그 자체를 시에 담을 수밖에 없다고소름이 돋았다
지금도 찾고 있다. - P-1

이 지진을 표현할 비유를 - P-1

놀랍게도 그해 7월 3일 열린 ‘접속의 정치학‘ 워크숍에는 학자 외에도 많은 시민이 참가했다. 여섯 시간 가까이 청중과 뜨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나는 변하고 있었다. 코로나19가 시작되기 전까지 다양한 회의를 기획했다. 여러 전공, 여러 나라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를 제공하고 싶었기에 참가자를 학자로 한정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 연구자들과 식민지 검열에 관한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었는데, 방사능 유출 이후 일본 미디어의 자기 검열에 따른 심각한 폐해를 보며 ‘검열‘ 연구가 세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았다.

일본 근현대 문학이라는 좁은 세상에 사는 오타쿠에 불과했던 나는 3.11을 통해 현실 삶에 눈을 뜨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웠다. 
여전히 조금만 방심하면 ‘방콕‘ 인간이 되어버리지만 문을 걸어 잠그고 소통을 거부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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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변화를 향해 제 발로걸어 들어간다.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건 바로 이 능동성이다. 이제는 주인공들이 폭풍의 눈으로 향하도록 이끌고자 한다.
 한자 속 호랑이와 돼지와 칼을 보며,
세헤라자드와 내 가슴속 사고뭉치 친구들을 떠올리며 드라마를 쓴다. 그러고 나니 소설로 써서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던 인물들을 더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다. 각본으로 옮겨진 인물들의 눈동자는 책에서보다 더 심하게 요동친다.

갈등하는 눈동자란 어떤 식으로든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시 만든 이야기를 들고 내가 향하려는 곳은 저짓거리다. 시장에서, 할머니의 수영장 탈의실에서,
할아버지의 등산로에서 친구들의 카톡창에서 내가 만든 심한 이야기가 오르내리기를 꿈꾼다. 

쉽고 낮고 속된 말로 마구 해석되면 좋겠다. 그렇게 유통되는 몹시 상스러운 드라마 안에, 몹시 성스러운 진실을 숨겨두고 싶다. - P-1

조금은 남의 눈으로 내 인생을 보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내 인생에서 잠시라도 해방되거나 초월하게 되는 소중한 순간이 글쓰기에는 있습니다. 

한데 어떻게 나로 살면서 내 경험을 멀리서 보듯 서술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초월이란 어떻게 하는 걸까요? 
작가마다 접근법이 다를 텐데요.

우선 쓰고 싶은 경험으로부터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두는 방법이 있겠죠. 
전자는 경험을 충분히 소화될 만큼 세월이 흐른 뒤에 쓰는 글이고요. 
후자는 물리적으로 먼곳에 떨어져서 쓰는 글이에요. 하지만 저나 여러분이나 얼마든지 일상을 떠날 상황이 아닐 수가 있잖아요. 그럴 때에도 방법은 남아 있어요. 
내 사건으로부터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멀리 떨어지지 않아도, 앉은 자리에서 즉시 내 경험과 멀어지려는 시도를 해보는 거죠. 

그게 바로 비비언 고닉이 《상황과 이야기》에서 설명하는 내 안의 타인을 발명하는 방법입니다.

‘내 안의 타인‘이란 아무리 희노애락에 취해 있을지라도 항시 내 이야기를 관전하는 누군가를 잊지 않는 것일테지요. 
고닉은 그 존재를 자기 안의 ‘특별한 서술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엔간해선 진부함 속으로 순순히 - P-1

빨려 들어가지 않는 서술자죠. 

아주 슬프고 엄중한 상황에서 풉하고 웃음 터지신 적 있으세요? 
실은 다들 가슴 속에 장난꾸러기 한 명쯤 품고 사시는 거 알고 있어요.

반대로 마냥 행복해 보이는 순간에도 젊고 어리석은 자신을 미래에서 애틋하게 바라보는, 노인이 된 나의 시선을 상상할수 있다면 그것 또한 페르소나겠죠. 스스로를 멀찌감치떨어져서 바라보는 눈이요.

어떻게 쉽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투박하게나마 세 단계로 분류해 보았어요.

1단계, 상황 설명
2단계, 일기
3단계, 이야기

제가 도달하고 싶은 상태는 물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의 이야기란 대략...... 출판사에 보내기에 부끄럽지 않은 상태의 글이라고 해 둘게요.

생전 처음 군부대로 강연을 간 젊은 여자를 상상해 봅시다. - P-1

이 여자의 경험을 세 가지 버전으로 함께 살펴 볼게요.
따끈따끈한 예문들을 함께 보시죠. 
일단 1번 ‘상황 설명‘
카페에서 친구를 만난 사람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이에요 오늘 겪은 놀라운 일을 마구 늘어놓는 거죠.

야야야, 들어봐 들어봐! 내가 오늘 군부대로 강연을 갔어. 다른 데도 아니고 군부대로!!! 그걸 수락한 내가 미친년이지. 뭔 생각이었나 몰라. 군인들 삼백 명이 쫙 깔려 있는데 분위기 존나 싸하고 와 뒤지는 줄 알았다.
레전드였음. 그렇게 힘든 강연은 처음이었어. 군부대 다신 안가……………

다소 투박한 ‘상황 설명이지만 대략 무슨 일인지 이해가 가시지요? 인상적인 경험을 겪은 직후의 반응입니다.

예컨대 방금 가벼운 접촉 사고를 당한 친구의 전화도 이것과 비슷하게 시작할 것 같아요.
 "야야야, 지금 뭔일이 있었는지 알아?" 흥분한 채 교통사고의 경위를 얘기할 거예요. 직전의 사건 한복판에 놓여 있는,
그러느라 편집 순서나 전달 방식이 그렇게까지 특별할 겨를이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겠어요. 화자가 이야기를 - P-1

장악했다기보다는 상황이 화자를 압도한 상태입니다.

2번 예시는 ‘일기‘입니다. 일기를 쓰는 사람에겐 비교적 시간적 거리가 생기죠. 집에 돌아와서 노트를 펼치기까지,
혹은 비공개 블로그에 접속하기까지 몇 시간은 걸릴테니까요. 하지만 일기는 나 아닌 사람들을 위해 쓰는 글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은 나의 평화를 위해 남기는 개인적인 기록이고, 다른 독자를 상정하지 않으니까 그렇게까지 명문을 욕심내며 써야 할 이유가 부족합니다.
일반적인 일기 문체가 평이한 것도 그래서일 거예요.

오늘은 군부대에 다녀왔다. 강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수락한 건 아무래도 경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다른 강연에선 늘 환영받았는데 군부대 분위기는 진짜 살얼음판 같았다. 다시 생각해도 진땀이 난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병사들의 키위 같은 뒤통수가 잊히지 않는다. 강연장 분위기가 꼭 급식실 같았다.

이렇게 무난한 문장도 막상 술술 써지지는 않는다는 걸, - P-1

써보신 분들이라면 알 거예요. 자주 쓸수록 내 인생과의 거리 조절에 능해진다는 점에서 일기 쓰기는 중요한 훈련이에요. 안 쓰는 것보다는 쓰는 게 낫죠. 게다가 한 이십 년 뒤쯤 문득 이 페이지를 들춰봤을 때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나 혼자 보는 일기장이라면 아무 문제도 아닌 글이죠.
하지만 이 글로 책을 만들어서 초판 이천 부를 찍고 출판사의 자본과 마케팅을 끌어올 만하느냐고묻는다면…… 아무래도 자신만만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1번과 2번 모두 ‘이야기‘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요. 어떻게 해야 이야기에 가까워질까요?

이제 3번 예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엔 무릇 제목이란 게 있죠. 심청전, 춘향전, 로미오와 줄리엣,
김약국의 딸들, 진격의 거인...... 장편이든 단편이든 간에 이야기들은 적절히 흥미로운 제목을 가졌습니다. 
제목은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장악력을 드러냅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통제하고 있다는 저력을 제목에서부터 느낄 수 있죠. 책의 한 페이지를 화면에 띄워 놓았는데요. 제 글인 - P-1

만큼 마음 편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보겠습니다. 저의 열세 번째 책 <끝내주는 인생》에 수록된 산문 중 한 편의 제목입니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고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가지만 어리석은 여자는 군부대로 강연을 간다

이미 아시겠지만 이 제목은 페미니즘의 물결 속에서 한창 유명했던 문구를 변용한 것입니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는 웅장한 카피가 있었죠. 많은 티셔츠에 적혀 있던 웅장한 카피였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게 궁금했어요.
‘난 착한 여자도 아니고 나쁜 여자도 아니고 단지 어리석은 여자인데…………… 어리석은 여자는 어디로 가는 거지? 가만 보자.. 어리석은 여자가 가는 곳 중 하나는 군부대로구나!‘
그런 사고의 흐름으로 이러한 긴 제목을 쓰게 되었습니다.

도입부도 살펴볼게요.
사랑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게 하루이틀 일도 - P-1

아니지만 새삼스레 이야기해 본다. 최근 몇 년간 나는 애서가들로부터 사랑받았다. 이 사랑은 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군부대에서의 북콘서트를 수락하는 일이랄지......

이 첫 문단이 드러내는 것은 이슬아라는 사람의 오만과 후회겠죠? 군부대 강연을 수락한 건 그의 자아도취 때문입니다. 책이 좀 잘돼서 알량한 인기를 얻었다고, 이제 어딜 가든 자신이 사랑받을 줄 알았던 사람이 이 글의 화자인 것입니다.
인류는 캐릭터들이 곤란해지는 이야기를 꽤나 즐겨왔습니다. 좋은 상황에서 좋지 않은 상황으로 하강하는 이를 구경하는 것 말이에요. 그 낙차를 간접 경험하는 게 드라마의 핵심 체험 중 하나죠. 
《끝내주는인생>도 딱히 멋진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한동안 잘 풀리는 일상을 사느라 안일해져 버린 ‘나‘가 다소 경솔한 선택을 하게 된 배경을 짧게 서술하며 들어갑니다. 작가는 스스로에 대해 쫏, 하고 혀를 차고 있는 듯해요. - P-1

이 첫 문단에서 우리가 함께 관찰하면 좋을 것은 바로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가 된 자의 포즈‘입니다. 이슬아의 문장이 누군가에게 호일 수도 불호일 수도 있겠죠.
불호일지라도 그가 쓴 것이 불특정 다수 앞에 설 채비를 마친 문장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슬아 안에는 기꺼이 사랑받고자 하고, 놀림받고자 하는 서술자가 살고 있어요.
타인의 눈으로 저를 보아하니 그렇습니다.
페이지를 몇 장 넘기면 군부대 무대에 대한 디테일이 나옵니다. 그야말로 엉성한 무대죠. 지금 제가 밟고 서 있는 강연홀은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견고한 무대인데요. 군부대 무대는 그렇지 않나 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불길한 소리가 나죠. 이런 세부 정보를 묘사하면 할수록 어쩌지 이야기 속 ‘나‘와 쓰는 ‘나‘가 분리되는 즐거운 기분을 느끼게 되어요.

군부대 나무판자 위에서 마이크 테스트를 마치고 삐걱대는 바닥을 밟으며 내려왔다. 밖에 나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는데 찬이가 남 일처럼 중얼거렸다.
"누나 좆됐는데?" - P-1

참고로 찬이는 이슬아의 남동생입니다. 이 글에서는 조력자인지 웬수인지 헷갈리는 역할을 하고 있죠. 그는 빈말 없이 ‘누나, 오늘 좆된 것 같다‘고 직언합니다.
그 전까지 이슬아는 최대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어요. 정신승리를 하면서요. 하지만 진실의 심판자인 찬이가 정확히 알려주죠. ‘누난 이견의 여지없이 망했어.
다가올 상황은 쉽지 않을 거야‘
그러므로 이슬아는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착잡한 기분으로 무대 옆에 트렌치 코트를 벗어두고 가방을 내려놓지요.
삼백 명의 병사들은 놀릴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용기가 꺾여서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온통 연녹색 페인트로 칠해진 벽, 그곳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용감한 병사는 단지 오분 더 용감했을 뿐이다." 저게 무슨 뜻이지? 용감한 병사와 그렇지 않은 병사는 깻잎 한 장 차이라는 건가? 오분 동안 병사는 많은 일을 한다는 뜻인가? 용감하면 그냥 오분 먼저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 P-1

왜 우리는 서로 엇갈리기만 했을까? (...) 
난 언제나 아버지가 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내가 아버지를 알고 싶지 않았던 거구나. 그러고는 또 깨달았다. 내가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구나.

언제 읽어도 사무치는 대목입니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써 본 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예요. 애컬리의 작품<아버지와 나>에 대해 고닉은 다음과 같이 씁니다.

애컬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목소리를 명료히 하는 데는 삼십 년이 걸렸다. 거리 두기를 성취하고,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지고, 신뢰할 만한 서술자가 되는 데 삼십 년이 걸린 것이다. 이런 세월이 글에 아로새겨져 있다.
사건마다, 단락마다, 문장마다 우리는 노력으로 얻어진 한 페르소나의 찬란함을 느낀다.* - P-1

가까운 애증의 관계일수록, 특히 같이 살수록 더더욱 공간적 거리 두기가 어렵죠. 그래서 시간적 거리, 즉 세월이 흘러야만 비로소 제대로 관계를 해석할 수 있게 되기도 해요. 그래서 저는 꼭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고 싶죠.
중년기와 노년기를 모두 겪으며 쓰고 싶죠. 칠십 대, 팔십대에도 무르익은 실력을 발휘했던 작가들을 닮고 싶고요.
하지만 세월이 흐를 때까지 글을 안 쓸 수가 없잖아요.
시간적 거리가 생길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요.

그래서 만들어야 하는 게 공간적 거리입니다. 
이게 꼭 이사를 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내가 쓰고 싶은 대상과 멀어질 여유가 언제나 주어지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진짜로 한 이 미터 정도면 돼요. 내 마음 속 카메라 앵글의 위치가요. 

시트콤 <오피스>를 보면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어요.
<오피스>는 제게 영원한 웃음의 원천인데요. 그저 그런 - P-1

소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종이를 만드는 작은 회사죠. 
여기서 근무하는 열 명 정도의 인물들을 다루는 군상극이며 시즌 9까지 방영하고 막을 내린 명작입니다.
이 인물들 옆엔 항상 카메라가 있어요. 시트콤 속 또 다른 카메라예요. 극중에서 이 회사 사람들을 다큐멘터리로 찍기로 한 촬영팀이 상주해 있거든요.
근데 그 카메라맨들이 되게 짓궂어요. 클로즈업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 줌인을 하고, 보통은 숨겨야 하는 치부들을 꼭 발각해서 찍어요. 인물들이 정말 진지하게 싸울 때조차도 그 모습을 정말 우스꽝스럽게 카메라에 담아요. 그 카메라에 담긴 인물들은 정말이지...... 쪼잔하고옹졸하고 초라하죠. 그렇게 취약한 모습들로 매회가 채워집니다.
24시간 아름다운 사람도 없고 24시간 한심한 사람도 없어요. 
그것이 <오피스>의 카메라가 제게 늘 일깨워주는것이죠. 누군가의 치명적인 결점이 그가 삶을 견디고 돌파하는 방식이 되기도 하고요. <오피스>를 보며 - P-1

에세이스트로서 저는 이런 메모를 적었습니다.

에세이스트 옆에는 늘 카메라 한 대가 돌아가고 있다.
자기 눈 말고도 눈동자가 하나 더 있다. 이 눈이 관찰하고 발견한다. 나 자신의 우스움, 의외의 멋짐, 예상치 못했던 코믹 포인트, 허를 찌르는 슬픔의 순간・・・・・・

결정적인 일을 겪을 때마다 늘 상상해요. 지금 만약<오피스>라면 내 상황을 어떤 이야기로 가공할까? 어떻게 편집하고 어떻게 극화하고 놀릴까? 

그럼으로써 어떻게 못잊게 할까?

좋은 에세이를 쓰는 작가들은 알고 있어요. 모든 사건은 세 사람이 겪는다는 것을. 나, 당신,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 

그러니까 ‘겪는 나‘ 말고도 ‘응시하는 나‘가 또있는 것이죠. 경험하는 내 눈 말고도, 경험하는 나를 보는 또 다른 눈동자. 그것이 바로 내 안의 타인, 서술자의 눈일 거예요.
이어서 ‘작가의 광대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 P-1

작가랑 광대가 무슨 상관인가 싶으시겠지만 저는 재밌는 글을 쓰는 작가들은 죄다 조금씩 광대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자초하고 즐기는 사람의 기세 말이에요. 
이 광대성에 대해 동료 작가 안담은 ‘나는 놀려질 만큼 강하다‘는 태도이기도 하다고 제게 말해 주었지요.
적극적으로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할때, 양다솔이라는 작가 겸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빼먹을 수없겠죠. 양다솔은 종이책 작가이지만 그가 갑자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 중 하나는 제 결혼식 영상에서의 활약 때문이에요. 참고로 저의 결혼식 영상은 그냥 지인들에게 전해주는 용도로 조용히 만들어서 유튜브에 올린 것인데요. 정신 차려보니 조회수가 벌써 삼십만 회 가까이 향해 가고 있답니다. 제 책이 그렇게 팔렸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아무튼 결혼식 영상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저의 친구 양다솔 작가의 스탠드업 코미디 장면이에요. 코미디 공연에서 양다솔은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아는 이슬아는 최고의 효율맨입니다. 취할 건 취하고 - P-1

가차 없이 버려요. 그가 버리지 않는 건 딱 세 가지입니다.
책, 독자, 이훤.....

여기서 이미 모두가 빵빵 터지며 웃었죠. 양다솔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술 더 떠요.

그 외에는 쓸모없다 싶은 건 계절마다 정리해서 싹 다 버립니다. 저도 여러 번 쓰레기장에서 돌아왔어요.

이젠 사람들이 웃다가 쓰러지죠. "저도 여러 번 쓰레기장에서 돌아왔어요"라니. 너무 뛰어난 펀치라인이잖아요? 사실 이 얘기는 얼마든지 재미없는 버전으로 얘기될 수 있었어요. 양다솔이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만 했다면 말이에요.
‘슬아야, 넌 왜 나를 버리니? 내가 그렇게 별로니?
난 너무 슬퍼...... 난 너를 좋아하는데 왜 너는 그만큼 나를 좋아해주지 않는 거야......?‘
조금만 들어도 질척이는 이야기죠. 그러나 양다솔은 이걸 코미디로 승화하기로 선택하죠. 그게 양다솔의 작가성이고,
남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양다솔만의 페르소나예요. - P-1

그는 알고 있어요. 우정이란 딱 떨어지지 않고, 삶은 서럽고 불공평한 것임을요. "이슬아는 쓸모없다 싶은 건 계절마다 정리해서 싹 다 버립니다"라고 그가 말했을 때 관중들이 예상했을 다음 문장은 "저도 버려질 뻔했어요"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양다솔은 거기서 한 걸음 더 갑니다. "저도 여러 번 쓰레기장에서 돌아왔어요"라는 대사로요.
해명하자면 저는 양다솔을 사랑하지만 때때로 그를 외면하고 지냈던 것 같아요. 분명 양다솔을 버린 몇 번의 계절이 있었어요. 양다솔은 자신이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버려졌음을 직면할 뿐 아니라, 이슬아가 절대로 쓰레기장에 자신을 데리러 와준 적이 없다는 사실도 직면합니다.
그래서 제 발로 쓰레기장을 벗어나 다시 이슬아를 찾아갔다고 서술합니다. 동료 작가들은 이것을 ‘돌아온 쓰레기로서의 자부심‘이라고 칭송하기 시작했어요.
제 발로 돌아온 쓰레기의 긍지. 어떤 작가가 이 페르소나를 흉내 낼 수 있을까요? 양다솔은 천재입니다. 그가 아니지 이 코미디를 시전했을 때 저는 진심으로・・・・・・ 그에게 - P-1

섹시함을 느끼고 말았어요. 어떤 창작자가 섹시하다는 것은 크게 꺾인 자신을 어디까지 승화시키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물론 양다솔도 처음부터 이런 얘기를 웃으면서 여유롭게 할 수는 없었겠죠. 하지만 시간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를 적절히 활용하며 가장 매력적인 페르소나를 세공한 것이죠. 이제 누가 양다솔을 딱하다고 생각할까요? 오히려 감탄밖에 들지 않나요? 저 여자가 제발 다른 이야기도 들려주면 좋겠다. 저 여자는 꾼이다. 이야기꾼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죠.
제 주변엔 이렇게 미치도록 웃긴 작가들이 몇 있어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웃기려는 걸까요? 
작가들이 농담력을 갈고 닦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다른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안담은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건 바로
‘끝까지 듣게 하기 위해서‘라고요.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생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개하지 않으면, 독자이든 관객이든 간에 끝까지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제가 썼듯, 슬픔도 지루해질 수 있으니까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는 이런 대사가 - P-1

나오죠.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Every rejection every disappointment has led youhere.)" 

저도 데뷔 전에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받곤 했어요.
내 작업이 거절당할 때의 마음, 위축되는 그 심정을 익히 알고 있어요. 되게 속상하고 주눅들었는데요.  그런 일들조차 나를 근사한 순간으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면 또 용기가 나기도 했었습니다. 소중한 거절들, 그리고 그보다 더 소중한 작은 성공들 속에 계시면 좋겠습니다.

딱 한 시간이 지났네요. 
저는 강연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편입니다. 누드모델로 일했기 때문에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잘 감각해요. 뱃속에서 째깍째깍 시침과 분침이 돌아가고 있는 걸 느끼거든요. 
모쪼록 여러분께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쓰시길 바랄게요. 
고맙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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