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편지가 올 것을 생각하면 미리미리 기쁘다

풀과 나무가 시들어 떨어지면 바로 뿌리에서 싹이 돋아나고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일지라도 마침내 날아오는 편지에서 봄기운은 온다.
모든 것들을 시들게 하는 기운 가운데서도 태어나고 성장하는 기운이 항상 주를 이루니 이것으로 곧 자연의 마음을 알수 있다.

겨울 속에 입춘이 들어있듯이 눈 밑에 봄이 와 있다는 말이 있다. 그와 비슷한 의미로 미국의 작가 루시 쇼는 이런 근사한 말을 했다.
"봄은 긴긴 겨울이 주먹 속에 쥐고 있는 희망이다."
그 겨울의 주먹이 펴지는 날 희망이 올 것이라는 두근거림을 갖게 된다. 희망은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루쉰이 말했듯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것‘이며, 사람 사이에 길이 생기면 그것이 곧 소통이라78

는 희망이 된다. 그러나 희망은 필요하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절망은 필요 없다고 해서 버려지는것이 아니다.

3월이 가까워오면 새 기운으로 나무들이 푸른빛을띠기 시작한다. 그때가 되면 나도 새 기운으로 가슴이설렌다. 시든 가운데서도 태어나는 기운이 가득 찬 것이 자연의 마음이다. 그 마음이 나에게도 옮아와, 변모하는 새로운 시를 써야겠다는 각오가 생긴다.

마음이 겨울처럼 얼어있는 사람에게는 들어오던 새기운도 나가게 되고, 마음이 봄기운처럼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나가려는 기운도 새롭게 들어오게 될 것이다. 마음을 봄기운으로 살려야 몸도 건강해진다는 사실을 날이 갈수록 실감하게 된다. 살아 있는 기운이 없는 몸은 불 꺼진 재와 같다.

나는 해마다 입춘이 될 무렵에 ‘‘이라 크게써서 현관문에 붙여 놓고 봄을 맞이한다. 문을 여닫을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네 글자가 마치 새 기운을 주는봄 같이 내 마음속에 들어온다. 봄이 올 것을 생각하면 나는 미리미리 반갑다. "네 편지가 올 것을 생각하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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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코치님은 손가락을 편 상태에서 옆 부분을 이용해 먼저 내 허리 각도를 조정해줬다. 너무 드러눕듯 누워 있던 걸 살짝 앞쪽으로 옮겨준 것이다. 이어서 지렁이처럼 바닥에 붙어 꿈틀꿈틀대던 다리가 문제였는지 역시또 손가락으로 무릎 뒤쪽을 위로 밀어줬다. 무릎을 더 가슴쪽으로 끌어당기라고 하면서.
코치님은 교정된 자세로 다시 해보라고 했다. 나는 아까보다 선 허리로, 아까보다 높아진 무릎으로 복근운동을 재개했다. 어쩐지 아까보다 움직임이 더 편해진 듯도 했는데,
어쩐지 아까보다 더 빨리 몸 여기저기에서 불이 나는 듯도했다. 교정된 자세로 배를 부르르 떨며 운동하는 내 모습을본 코치님은 말없이 일어나 다른 회원에게로 갔다. 그리고나는 지금까지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이곳 체육관을 다니며 서서히 마음을 놓았던 이유를 그날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코치님이 저 말을 하기 전, 다른 코치님들은 저 말 없이 내 몸을 말 그대로 ‘터치‘하기도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분들 역시 늘 저 말을 한 것 같은 태도로 그랬다. 약간의 거리. 늘 거리를 둔 태도였다. 내가 당신을 터치하는 건 당신의 자세를 교정해주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 확고히 자리 잡은 거리감 있는 태도.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를 이쪽에서 확실히 보장해주겠다는 태도.

코치님들은 매일 뭔가를 물었고, 그 물음 속에는 사생활에 해당하는 것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물음에 불쾌하지 않았던 것 역시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 덕분이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금방 수긍한 뒤 더는 묻지 않으려는듯한 태도 위의 물음이었다. 

대답할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이 내게 있는 물음이었고, 내가 거리를 조정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물음이었다. 

모든 코치님이 다 이런 거리 조정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이곳 체육관 나름의 교육 시스템이있는 듯하다.

억지로 밀어붙여 친밀함을 조작하는 대신 거리를 존중하려는 태도, 이 태도를 지켜나가려는 노력. 
이 체육관을 마음 편히 드나들 공간으로 생각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했다.

"원, 투, 원, 투, 잽잽, 투! 요거 요거 재미있다.
내가 제대로만 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

발을 바꿔 찼다. 탕. 또 찼다. 탕. 나는 내가 신이 났다는 걸 느꼈다. 통쾌했다. 내 몸의 일부를 이렇듯 다른 대상을 향해 최대한의 힘으로 밀어붙인 적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주먹을 뻗고 발을 찬다는 건 그간은 상상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상상할 수 없던 일을 하러 이곳에 왔고, 상상을넘어 직접 몸을 움직였다. 몸을 움직이자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내보지 못한 소리가 났다. 탕. 이 소리는 쾌감 그 자체였다. 탕. 이 소리가 좋아서라도계속 발차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흔들리고 상처받아 주저앉고 싶어질 때마다근육의 힘으로 거뜬히 일어나기 위해나는 오늘도 체육관에 갑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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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쏠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개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손을 잡지 않는 펭귄 공동체

공동체의 이기심도있다고 본다
공동체의 이기심 속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이기심도있다고 본다
펭귄들의 포옹이
어색한 것은
팔이 짧고
배가 너무 나왔기 때문이다
세상도 팔이 짧고
배가 너무 나왔다
나도 그렇다
남극 눈보라 속에
손을 잡지 않는 펭귄 공동체가 있다

저마다 홀로 서는
펭귄 공동체
뿔뿔이 흩어진 채 모여 사는 펭귄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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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렴치한, 너무나 파렴치한 
정신질환을 양산하는 사회

정신질환에서 주변 환경의 영향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이야기의 절반밖에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천식 환자에게 약만주고서 호흡기에 유해한 환경에 계속 노출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정신질환의 문제를 전적으로 가족의 문제로개인화하며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환자와 그 가족에게 다중의 낙인을 찍고 굴레를 씌워왔다. 하지만 정신적 고통의 급증을 가져오는 사회의 문제를 고찰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점점 나빠질 것이다.
석사를 마치고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재연 양이 나를 찾았다.
그만두고 싶다는 이유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구에 많은 열의를 보이던 유망한 사람이었는데 이유가 궁금했다.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울해서 극단적인 생각을 할 때까지있어요."
내가 재연 양에게 마련해줄 수 있는 연구 여건은 타 대학과 비교해서 결코 좋은 것은 못 되었다. 내가 처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줄 수 있을 뿐이었고 그러한 여건 아래서 연구자가 해외 학회에서 인정받는 수준의 연구 업적을 계속 유지하는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도와줄 것은 없을지, 쉬는 방법 말고는 없을지대화했지만 결국 ‘잠시 쉬다가 꼭 돌아오라.‘는 말밖에는 해

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돌아올 리 없다는 것은 내가 더잘 알았다.
재연 양이 사직한 후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은혜 양이 사직서를 들고 왔다. 이유는 같았다. 우울해서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두 젊은 연구자를 잃었다. 1년 후 이번에는 대학원생이 중도 하차를 했다. 우울함 그리고 극단적인 생각, 이 두가지가반복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연구실을 계속 꾸려나가는것이 타당한 일일지 깊이 고민하고 있는데 남편이 그날 있었던대학원생 면담 이야기를 해주었다.
"제가 어느날 인터넷에서 밧줄을 구입하려 하고 있었어요."
결국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서도 같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아프면 개인적 문제이겠지만 여러 사람이 아프면사회문제이다. 내 아이의 문제와 겹쳐 보면서 우리가 지금 어떤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다시 성찰해야 했다.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 김규항 씨의 몇년 전 칼럼이 다시금 기억났다.

15지난 몇해 동안 한국에서 발간된 책 가운데 가장 파렴치한 책을 꼽는다면 단연 「아프니까 청춘이다」일 것이다. ‘청년의 지옥‘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 청년에게 할 첫번째 말은 ‘미안하다‘여야 한다. 좀더 사리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실을

바꾸자, 나도 함께하겠다‘여야 한다. 그런데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정규직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중심 틀로 하는 노동유연화정책은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순으로 조직력이 약한 노동 부문과 세대로 내려갈수록 모순을 강화했고 결국 노동의 출발점에 선 청년들 앞엔 비정규직과 알바만 기다리는극단적 상황에 이르렀다.

2020년에 죽음의 준비에 관한 책을 낸 후 관련 강의를 하러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가운데 가장 경악했던 점은 20대의 젊은이들에게서 내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호응도가 가장 높았다는 것이다.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흐느끼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았다. 그들에게 죽음은 먼 미래가 아니었다. 우리는 도대체 젊은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만들어준 것일까? 국회미래연구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래는 지금보다 더 좋아질까?"라는 물음에20대는 6.5퍼센트, 30대는 10퍼센트만 동의했다. 161930년대 세계 대공황 당시 거시경제 정책을 통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이론에 반기를 들고 오로지 사회 운영의 기본 원리를 자연 발생적인 힘, 특히 경쟁에만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74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의 이론은 나치 독일의 악몽과 같은 전체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자유주의의 극단을 추구했지만 불행히도그로 인해 (아마도 자신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자본주의의 지옥문이 활짝 열렸다. 
그는 가치관, 도덕관 등은 모두 개인이 결정하는 것이라 주장했고 따라서 공동선이나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을 완강히 거부했다.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 같은 힘센 정치인들이 하이에크의 이론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자본가들은 그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범지구적인 시장주의는 국가가 개입하는 모든 형태의 규율을 무력화하는 무기로 이용되었고, 그런 시류에 약삭빠르게 올라탄 하버드 경영대학의 마이클 포터 같은 학자에 의해 주창된 경쟁제일주의는 1980년대 이후의 세계를 풍미했던 신자유주의와 결합하여 세상을 무섭게 바꾸어버렸다.

인류는 표면적으로는 과거 어느 세대와도 비교가 안 될 만큼 풍요로워 보인다. 그리고 엄청나게 불행해졌다. 

한병철 교수가통찰한 대로 "자기 착취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피로사회"가 되어버린 현대에 인간은 잠시도 휴식을 가지지 못한다. 쉬면 누군가에게 뒤처질 것이라는 끊임없는 불안에 삶의 여유는 산산조각이 났다. 여기에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기술제일주의와 과잉 데이터는 그나마 남아 있던 인간적인 삶의 조각들을 마저 분쇄해버렸다. 남은 것이라고는 죽을 때까지 옆 사람도 아닌 전세계와,
심지어는 로봇과 경쟁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지옥이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우리가 자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경쟁에 내

몰려 어린 시절부터 잠도 못 자고 때로는 적성에도 맞지 않고 의미도 없는 온갖 공부 노동을 치르며 학대에 가까운 유년기를 보냈다. 대학에 들어가도 천정부지로 올라간 등록금 마련과 취업준비에 캠퍼스의 낭만이라고는 느껴보지도 못한 채 자신을 갈아가며 살았지만 정작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뿐이었다. 

몇년 전 나라를 두동강 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자녀 입시관련 논란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던 것은 그들만의 방법으로온갖 스펙을 만들어서 자녀를 의과대학에 입학시켰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부모가 법정에 서야 할 정도의 무리수를 써서라도 자녀를 안정된 체제 안으로 넣으려는 이 사회 엘리트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지금의 헬조선 현실을 개선할 의지가 전혀 없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몇년 후 이런 스펙 쌓기가 더욱 진화했다는 것을 우리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자녀들을 보며 다시 알게 된다. 이제 공직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공직후보자의 자녀들 문제부터 뒤져보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무리수를 써도 이미 안정된 미래란 없을지도 모른다. 
의사들은 일찌감치 자본가들에게 포획되어 소신은 고사하고 전문성까지 위협당하기도 한다. 
100년 걸려 두배로 늘어난 변호사 수가 다시 두배로 늘어나는 데에는 몇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기업의 요구에 맞춰 양성된 고급 인력들이 직업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간은 길지도 않다. 그리고 이들은 밀려 나갈

때까지 죽도록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현실은 물론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킨, 공부 잘하게 해주는 약 애더럴Adderall 열풍은 온 세상이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정신적 도핑에 몰두하고 있는 세태를 보여준다. 
기성세대가 지금이 자신들이 젊었을 때보다는 발전된 사회임을 인정하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유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과연 자신들보다 행복할까에 대해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최저임금의 불안정한 직장에 내몰리고 소위 안정권에 진입한 이들도 언제 자신의 처지가 바뀔지 몰라 불안해하는 사회. 젊은이들은 과거 어떤 시대에도 없었던 그런 시기를 살고 있다. 
중세의 농노들도 자신이 노동을 하면 어떤 결과를 얻을지는 예측할 수 있었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기대가며 살았다.

사회학자 엄기호 씨는 저서 『단속사회에서 망한 사회의 정의를 앞 세대가 뒤 세대에게 물려줄 것이 없는 사회라 했는데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가 바로 그렇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손가락 몇번 놀리면 수치적으로 정확한 정보를 즉각 얻을 수 있는데 굳이 시대착오 작렬하는 늙은이들의 훈계 섞인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졌다. 
같은 책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거나 비슷한 것
‘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으면서 
타인의 고통같이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것은 철저히 차단하고 외면하며 이에 개입하지 않으

려 하는 상태를 ‘단속‘이라고 이름 붙이며 "다름과 차이를 차단하게 되면서, 서로의 경험을 참조하며 나누는 배움과 성장은 불가능해진 ‘사회‘. (...) 책임은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사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 이 세계를 과연 사회라고 부룰 수 있을까?"라고 질문한다. 
젊은이들은 존재적 불안을 홍수처럼 밀려 들어오는 정보들을 습득하며 무마하려 한다. 하지만 늘어나는 것은 불행감과 박탈감, 우울증뿐이다. 한술 더 떠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정보 과잉의 대혼돈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정신을 송두리째 흔든다.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과 가상 세계를 혼동할 정도로 몰입하게 하는 메타버스가 지향하는 바는 정확히 조현병 환자들의 병리 증상이다. 돈이 된다면, 자본축적에 도움이 된다면, 아마도 기술은 이용자들의 정신 건강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미국 IT 기업들의 행태에서 그런 사례들을 익히 보아왔다. 굳이 최첨단 기술이 아니어도 신자유주의의 세계는 우리에게 정신 건강을 해치는 ‘미션 임파서블‘의 매일을 살아낼 것을요구한다. 
파견직 노동자는 파견업체의 요구(매출을 늘려라)와 일터의 요구(반품을 줄여라)라는 완전히 상반된 요구에 시달리며 정신적 혼돈을 겪는다. 
의사들이라고 상황이 낫지는 않다.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명의식은 한 환자에게 시간을 오래 할애할 수 없게 하는 ‘수입을 늘려라.‘라는 병원의 요구에 의

해 산산조각이 난다.

나는 가끔 엉뚱하게도 2012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예언했다던 마이레이 맞은 것이 아닐까 의심할 때가 있다. 
나중에 이 멸망론은 마야인들의 순환주기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일 뿐이라고 비판받았지만, 나는 2012년을 기점으로 인류에게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망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징후는 어디에든 있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세상, 여름 기온이 섭씨 50도를 넘다가 곧장 홍수가 밀어닥쳐 국토의 3분의 1이 잠겨버리는 나라들, 이미 임계점을 넘겨버렸다는 탄소배출량, 나날이 사라지는 생물종들. 
그럼에도 멈춤 없는 경제성장을 부르짖는 수많은 국가의 지도자 그들에게 생존의 기로에 놓인 약자들. 꾸역꾸역 만들어지는 의미 없는 재화를 소비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은 더이상 안중에 없는지도 모른다. 
고소득자 감세안 정책을 하루 만에 철회하면서 그 이유로 ‘국민적 고통에 대한 우려‘가아닌 ‘금융시장 대혼란‘을 꼽은 영국 트러스 내각의 사례는 인구집단의 최정점에 자리잡은 인간들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조용한 멸종 중이라 해도 크게 틀림이 없을 이 세상. 이 파렴치한 세상에서 젊은이들에게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앞 세대는 한시도 생각과 행

동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쉴 틈 없는 경쟁에 내몰고 조금만 뒤떨어지면 언제 어디서든 다른 존재로 대체될 수 있는 부품으로 전락시키면서 ‘잉여로움‘을 시대의 키워드로 만든 마이클포터 같은 자들도 오늘날 말기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를 바라보며 자신의 경쟁제일주의가 오류였음을 인정했다. 
그 뛰어난 지력으로 일세를 풍미하고 세상을 엉망으로 만든 자들에게 개념 없이 맞장구친 죗값을 기성세대는 어떤 형태로든 치러야 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나이 잠시 연락이 닿지 않아도 그렇게까지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철망과 고통의 시간 동안 안나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주 조금은 배웠기를 바란다.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실행에 옮기는것은 쉽지 않았다. 정신질환의 낙인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세상에 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두려웠기 때문이다. 

낙인뿐 아니라 인간의 수만큼 다양한 생각을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것도 가능한 곳이 요즘 세상이다.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정지인 옮김. 심심 2019)를 쓴 퓰리처상 수상 작가톤 파워스는 ‘자식을 이용한다‘는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했고,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남미의 정글로 떠난 제임스 프리먼의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샤먼」에는 ‘부자 부모 둬서 여행 경비도 부모한테 받은 주제에‘라는 댓글이 달렸다. 
하지만 결국 부모의 우직한 소명의식이 사사로운 우려를 이겼다. 아이는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았을 자신의 고통을 공개하는 데 동의해주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아이의 병세가 생사를 오가는 심각한 상태에서도 아이는 한번도 부모와의 연결 끈을 놓지 않았다. 극히 일부분의 시간을 제외하면 아이와의 진지한 대화도 항상 가능했다. 세상에는 우리처럼 운이 좋지 못한 환자 가족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야기가 혜택받은 자들의 배

부른 소리로 들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안다. 물론 부질없는 회망을 심어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연약한 삶의 기반 위에 놓여 있다. 
안나의 지난 7년은 이 병의 긴 경과를 감안한다면 이제 초기단계를 간신히 넘긴 상황일 뿐이다.
정신건강의학 전문가가 본다면 한없이 모자란 이야기를 용기내어 하게 된 이유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바꾸는 데 작은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큰 변화는 언제나 어렵다. 

하지만 바위를 뚫는 물처럼 일상의 작은 변화들이 모이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이루어진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용기와 인내이다. 

정신질환 환자들의 가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용기, 인내, 그리고 회복 탄력성resilience 일 텐데, 이미 많은 가족들이 환자를 돌보면서 거의 수도자의 경지에 도달할 정도로 그런 특성들을 체득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작은 변화 중 하나가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정신질환 환자에게 하는 ‘미쳤다‘는 말을 ‘아프다‘로 바꿔보도록 노력한다면 환자에 대한 낙인이 어느정도 옅어질 수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신질환‘이라는 말 자체를 ‘뇌질환‘으로 바꿔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실이 그러하고, 뇌도 엄연히 신체이므로 마치 여타 신체질환과는 달리 의지나 성격의 문제라는편견을 만드는 말은 지양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이다. 물론 그

런다고 낙인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환자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성격장애‘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격‘이라는말이 들어가는 순간 ‘아프다‘는 현실은 지워지고 ‘결격 인간‘이라는 낙인만 깊어진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성격장애들이 진단 목록에서 삭제되고 있다.
2015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타냐 루어먼 박사는 인도와 가나의 연구자들과 함께 조현병 환자의 환청을 연구해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가나의 환자들이 듣는 환청은 주로 신과의 대화,
삶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들이었던 반면 
미국의 환자들이 듣는 환청은 자신 혹은 타인을 해하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인도나 가나의 환자들은 부정적인 환청을 듣는 비율이 각각 20퍼센트,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정신질환 환자들은 사회의 병폐를 가장 예민하게 떠안는 존재들이다. 정신병동이 통념처럼 사회에 해를 끼칠 위험이 있는 환자들을 격리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위해를 당한 영혼들을 보호하는 곳이라는 말은 이런 사실에서 비롯한다.

이 책은 남편 정천기 교수와의 공저라 해도 큰 무리가 없다. 정천기 교수는 신경외과 의사로 뇌 연구에 평생을 바쳤고 이 책에서 뇌와 관련한 부분은 남편과의 긴밀한 논의를 통해 집필했다.
책에는 마치 나 혼자만 힘들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펴내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준 최지수, 하빛, 신채용 편집자에게도 큰 감사를 보낸다. 내가 놓쳤던 부분들을 꼼꼼하고 예리하게 보완하는 하빛 편집자와 일을 하며 우리나라의 출판사도 이제 외국의 유명 출판사에 못지않은 유능한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멋진 표지를 만들어준 이경란 님께도 감사드린다.
아이가 아프면서 많은 분들께 도움을 받았다. 홍경수 교수님,
백지현 교수님, 최정석 교수님에게 가슴에 다 담을 수도 없는 감사를 보낸다. 자신의 담당 환자도 아닌데 부모의 넋두리를 들어준 정명훈 선생님, 안용민 교수님에게도 감사한다.

 큰딸을 10년 넘는 세월 동안 부모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돌보아준 장덕환 선생님께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린다. 박성희 선생님께도 큰 감사를 드린다. 환자의 마음이 산산조각 날 때마다 긴 시간 동안 무한한 참을성으로 한땀 한땀 기워준 송인목 선생님에게 감사함을 표현할 말은 찾을 수조차 없다. 누구에게도 밝히기 싫은 자신들의 아픔을 열어 보인 두 딸의 용기에 무엇보다 감사한다.

당신의 가족이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면

눈부시게 빛나는 딸에게 어느 날 찾아온 양극성 장애
분쉬의학상 수상 의학자 김현아가 전하는 경험 어린 위로와 생생한 조언

왜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은 고통을 숨어서 감내해야만 하는가? 
우리는도대체 언제까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을 격리하고 그들과 공존하지 않으려 하는가? 
이책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자녀를 둔 의사 엄마의 가슴 아픈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과 공존하는 능력이 아직도 무참하게 부족하기만 한 
한국의 민낯을 꼬집어주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가하는 매우 준엄한 채찍이자 통렬한 반성문이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기분을 날씨로 비유하면, 양극성 장애는 맑은 하늘에 해가 쨍쨍 내리쬐다가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과 같다. 맑은 날이 계속되면 보기엔 좋지만 땅은 사막이 되어버리고, 폭풍우가 지나가고 나면 그 밑의 나무는 뿌리째 뽑힌다. 조울증, 반복적 자해와 공황 증상으로 몇년 동안 반복적 입원을 거듭한 딸의 어머니이자 의사인 저자의 마음속도 그랬을 듯하다.
병을 공부해 딸을 이해하려 애쓰고 애정으로 버텨내며 무너지지 않고 나아가는 과정은 마치 험준한 자갈길을 걸어가는 긴 여행 같다. 우리는 쉽사리 부서지지 않는 강한 존재다. 기분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와 가족 모두 위로와 용기를 얻을 책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하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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