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발전과 또 후쿠야마의 주장을 고려해본다면, 민주주의라는 이상 속에는 민주주의가 서양 문명의 자연스러운 종착지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J. G. 프레이저가 미신에서 종교로 그리고 마침내 합리성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상정하거나, 영국의 고고학자 존 러벅이 이른바 진보란 수렵채집 경제에서 농경으로, 그리고 국가의 발달로 이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처럼, 절대적인 군주제, 과두 정치, 또는 신권 정치라는 야만적인 상태는 최종적인 종착지를 향해 가는 길에 반드시 거치는 단계였던 것이다. 바로 문명화된 민주주의라는 종착지 말이다.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문명적인 사회의 핵심 축으로 그려진다. 다른 모든 문명적인 이상들의 바퀴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붙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자유 시장 경제, 사회적 이동의 자유가 있는 능력주의 사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법이 통치하는 법치주의를 말이다. 사회 복지, 보편적인 교육과 정치 참여를 보장하고, 예술 문화 활동 공간을 제공하는 정부 체제다. 민주주의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문명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이 여전히 공통적인 의견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고등학교 토론 대회에서 민주주의는 이길 수 있는 선택이었다. 앞선 장들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서양 문명을 한데 묶어
주는 진정한 이상은 바로 사회적 위계라는 관념이다. 그리고 위계질서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민주주의는 평등과 자유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민주주의는 이런 사상들이 끊임없이 패배를 겪은 지점이었다. 인종과 계급이라는 사회적 불평등과 더불어, 젠더와 장애 여부를 바탕으로 하는 불평등이 서양 사회에는 너무나 깊이 새겨져 있어, 실제로는 자유도 평등도 전혀 가능하지 않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그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서양에서는 민주주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 합당하다.
그렇다면 수많은 질문이 생겨난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해서 계속 이렇게 강력한 브랜드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상을 계속해서 믿고 있는 것일까?
서양 민주주의라는 브랜드가 지닌 힘은 과연실제로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또, 정말로 서양의 통치 체계를구성하고 있는 사상들은 무엇일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테네 사람들도 시민들의 정치적인 대표자를 선출하기는했지만, 오늘날 대표자를 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대우했다. 그 사람들에게는 호화로운 집도, 전용차나 전용기도 없었다. 아테네의 대표들은 추첨, 또는 복권을 이용해 정해졌다.
장차 대표가 될 후보자들은 스스로 입후보를 했고, 선별 기계가 이들의 청동 토큰을 뽑으면 일을 맡게 되는 것이었다. 임명된 사람들이 일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부패하거나, 심지어는 전반적으로 별로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추방이라는 벌을 받았다. 도시국가 전역에서 10년 동안 추방되는 것이었다. 통치자들 역시도 잘못된 행동이나 나쁜 결정을 내리면 배심원단에게 재판을 받을 수도 있었으며, 유죄라고 확정될 경우 사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확실히 200년을 이어져온, 대단히 참여적이고 효과적인 정부 체제였다. 이 방식이 멈춘 것은 아테네라는 도시가 이웃 도시인 스파르타의 제국주의적 열망에희생되었을 때였다.
민주주의의 ‘승리‘는 결코 따놓은 당상이었던 적이 없었다. ‘민중‘과 ‘권력‘을 뜻하는 그리스어를 결합한 이 말은, 이 관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용했다.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의 적들은 줄곧 단 한 가지 비판을 제기하고 또 제기했다. 자신들이 보기에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결함이라 생각하는 것에 매달리면서 말이다. 이들의 논지는 간단히 얘기하자면 정치에 참여하여 스스로를 통치하려는 사람들이 최악이라
는 점이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온 소크라테스는 평균적인 고대 그리스 시민에게 그 어떤 신뢰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 자는 때로 플루트 소리를 들으며 거하게 술을 마신다. 또 어떨 때는 물만 마시며 식단을 조절한다. 어떨 때는 몸을 단련하러 간다. 또 어떤 때는 게으르게 지내며 모든 것들을 무시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철학이라 생각하는 것에 골몰한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미화된 중우정치와 다를 바 없다고 바라보았다.
집합적이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가난한 시민들이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소수를 통치할 힘을 지닌다는 것은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꼴이고, 야만인이 문명화된 사람들을 통치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던 고대 그리스인들, 그러니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부유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유한계급 엘리트들은 어떻게 가난한 다수가 부유한 소수를 통치할 수가 있냐며 괴로워했다.
이들의 의문은 이것이었다. 대체 왜 민중이 통치하는 정부를 원한단 말인가?
그보다 몇백 년이 흐른 뒤 헤겔은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형태 정부라고 이야기했지만, 민주주의의 역사 전반에서 주된 걱정거리는 민중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는 점이 만회되지는 않았다.
‘하우데노사우니‘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
‘하우데노사우니 Haudenosaunce‘ (정착형 식민주의자들은 이로쿼이 연합Iroquois League 이라고 불렀다)는 공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함께 모인 북아메리카 지역의 다양한 토착민족 연합이었다. 처음에는 세네카족, 카유가족, 오다가족, 오나이더족, 모호크족이 있었고, 나중에는 투스카로라족도 합류했다. 대평화법률 Great Lawof Peace에 따라 살던 하우데노사우니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통치할 새로운 방식을 찾던 영국 식민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우데노사우니도 대의제 정부였다. 족장이라 부르는 여러 임원이 각 부족을 대표했으며, 이 대표자는 총 50명이었다. 이들은 의회에서 만나 협동해서 결정을 내렸는데, 결정을 내릴 때는 만장일치가 되어야 했다.
대법률Great Law은 추가조항 117개로 이뤄져 있었고, 그 가운데 많은 조항이 의회의 권력을 제한하며, 보다 중요하거나 시급한 사안은 대비책으로 총투표를 거쳐 결정을 내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남성 족장들은 여성인 씨족 우두머리들이 선정했으며, 같은 가족 안에서 다음 세대로 역할을 물려줄 수 있었으나, 새로운 족장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얼마
든지 간단히 철회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보존되었던 기록과 고고학적 조사를 결합해 살펴보면, 하우데노사우니 연합은 아무리 못해도 서기 1150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의회 가운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서기 930년부터 시작된 아이슬란드 국회에 뒤이어 두 번째다). 1642년에 새로운 정착지인 뉴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네덜란드 변호사 아드리안 반 데르 동크에 따르면, 하우데노사우나는 "본질적으로 모두 자유로우며, 그 위에는 어떤 지배 권력도없다"라고 한다. 하우데노사우니는 실용적이고도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민족 연합의 사례를 미국인들에게 보여주었다. 그전에는 정치철학만 지니고 있던 이들이었다. 영국 철학자 존 로크가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권리를 보장하는 자연법이 있고, 또 사람들은 이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와 사회적인 계약을 맺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적어두지 않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부의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를 분리해 권력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실천이 참고로 삼을 만큼 현실화된 이론은 없었다. 반역을 일으키며 새롭게 등장한 유럽계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하우데노사우니였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체제가 문명적인 것인가가 문제였다.
실질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확실히 실현 가능한 체제라고 여겨졌다. 1751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적었다. "무지한 야만인 민족 여섯 곳이 그런 연합을 만드는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 그렇지만 이런 연합이 필요한 영국 식민지가 열 개쯤 된다 하더라도, 영국 식민지에다 이런 연합체를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정부가 과거에 비해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남겼다.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정착형 식민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는 당연히 덜 발전된 곳이었다. 정착민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군주제가 발달하기 이전 정부가 어떤 모습이었을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표본이었다.
미국 독립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인 토머스 페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상태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모습 말이다." 토착민들의 정부 체제와 생활 방식은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이었지만, 여기에는 한계도 있었다. 페인은 자신이라든가 동료 정착형 식민주의자 같은 진보한 유럽인들이 "문명화된 상태에서 자연 상태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현대적인 서양의 민주주의가 이 진퇴양난을 해결한 것은 철학적인 타협안을 통해서였다. 모든 사람이 관여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직접 민주주의가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면, 자유 민주주의가 그 역할을 대신 맡을 수가 있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하우데노사우니의 ‘야만적인‘ 양상이라 여겼던 것들 상당수를 떼어놓을 수 있어 달가워했다. 이들은 여성의 권력과 책임과 연계를 맺고 있던 씨족 기반 시스템을 무시하고 고전적인 모델을 따랐다. 이들이 하우데노사우니에서 취해온 딱 한 가지는 연방제였다. 하나의 국가 안에 있는 독립적인 자치주들이 집합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할 때면 자신들의 대표들로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방식 말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이들은 교묘한 속임수를 부린다. 이들이 얘기하는 ‘대표의 기적miracleal representation‘을 이용해서 말이다. 이런 식이다. 국민의 의지가 대표된 것은 국민의 실제 의지와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합당하다고 느껴진다. 아테네식 모델과 비교해본다면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연방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개별 주의 정부는 이를 지배하는 국가 차원의 정부를 동반했다. 국민은 이 두 정치체 가운데 어느 한 쪽에 직접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임원을 선출해 자신들 대신에 권력을 행사하도록 한다. 미국의 정부 모델은 유권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지니는 골칫거리가 없게끔, 즉 유권자들이 스스로 진정한 권력을 지니는 이득을 누릴 수 없게끔, 모든 의사결정을 가로막았다. 영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거의 똑같은 결과로 끝이 난다. 영국은 자신들이 혁명을 거쳐 민주주의에
이른 것이 아니라, 서서히 일어난 일련의 개혁들을 거쳐 이르렀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는 앞에서 살펴보았다. 마그나 카르타에서 시작해, 19세기의 영국 권리장전과 여러 개혁을 거치며, ‘자유로운 사람‘의 정의가 점점 넓어져 여성까지 포함하게 되었고, 그렇게 1928년에 보편적인 투표권에 도달한 것이다. 그 결과, 영국이라는 국가는 일종의 키메라가 되었다. 서로 다른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끼워 맞춘, 서로 다른 우선순위와 이데올로기에 얽혀 있는 법과 개혁이 한데 모여 민주주의라는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나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아닌 채로 말이다. 설령 영국이 실제로 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그리고 왕과 민주주의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은 잘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는 로마인들도 알고 있었다), 영국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아테네식 모델보다는 공화국 모델에 더욱 가깝다.
아테네식 정부 모델은 직접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이는 사람들이 선거를 거쳐서 정부에서 자신들을 대표해줄 정치적 지도자를 임명하는 대의제 민주주의와는 반대된다.
현대서양에서는, 그리고 보다 광범위하게 본다면 서양식 민주주의에서는, 바로 이런 대의제 민주주의 모델이 장악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직접 모든 결정을 내리지 않고, 크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달라며 맡기는 선출된 소수의 손에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다.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정부의 서로 다른 구성 요소들 사이에 권력
이 분리되어 있어 균형을 유지한다. 이런 구성 요소들이 어떤 것인지는 해당 시대와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가에 달려 있다. 미국에서는 권력이 입법부(법을 만드는 곳), 사법부(법을 집행하고 해석하는 곳), 행정부(대통령) 사이에 나뉘어 있다. 반면,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영국의 민주주의가 시작할 무렵에는 군주와 의회 사이에 권력이 나뉘어 있었다. 의회는 상원에 있는 귀족과 하원으로 대표되는 나머지 사람들로 이뤄져 있었다. 군주의 힘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할지라도, 영국이 국회와 정부를 운영하는 방식을 슬쩍 보기만 해도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못마땅해할 것이다.
사실 권력은 꾸준하게도 그리고 냉혹하게도 훨씬 더 제한된 소수의 사람에게만 양도되어 있음에도, 국민에게 권력이 있는 정부라는 말을 들으면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깜짝 놀랄 것이다. 우리가 하원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권자 전반은 정부의 나머지 절반을 이루는 상원에 임명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가없다. 그리고 의회 안에서만 놓고 보자면, 권력은 여당에게 있으며, 다시 그 안에서 내각과 궁극적으로는 총리에게 권력이 위임된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선거를 못 미더워했다. 애초에, 그리고 내재적으로,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사회적인 엘리트나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다시 말해, 서양식 대의제 정부를 놓고 본다면, 고대아테네들은 우리가 겪는 문제가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250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런 문제를 피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민주주의는 없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이 선거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은 무척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선거에서 당선되어 관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말이다. 오늘날에는 ‘과두제 집권층oligarch‘이라는 말 앞에 ‘러시아‘가 붙는 일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이는 러시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이든 옛날이든, 제한된 소수가 통치한다는 관념은 보편적이었다. 선거에 이겨서 지배력을 독점한다고 해서, 그 소수의 지배층이 훌륭한 통치를 선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실제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은 서로 다른 능력이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최근 우파 정당들은 만약에 선거에서 이기는 데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더욱 극단적인 입장들도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또, 체현된 정치 계급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있다. 자신이 받은 교육 덕분이라든가 특정한 직업에서 거둔 성공 덕분에 더 좋은 자리에 올라 성공을 거두는 정치인들 말이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왕조 권력에도 아주 능통하다. 존 애덤스와 존 퀸시 애덤스,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 같은 미국의 아버지와 아들 대통령부터. 케네디가, 루즈벨트가, 트뤼도가 같은 정치적인 왕조들까지 말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적합한가에 관한 철학적인 우려는 바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였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특히 몇 세기 내내 인간 이하라고 여겨진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다.
미국에서는 이것이 지능과 문맹률 시험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는 사람들,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기 위해 설계한 것이었다. 여성에게도 똑같은 효과를 내기 위해 다양한 주장들을 활용했다. 여성은 오랫동안 선거권을 거부당했다. 선거권을 행사하기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필요한 요소를 제대로 갖추지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해야 한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투표소라거나, 제한적인 투표 시간 같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함으로써,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학자였던 알렉시 드 토크빌이 밝혔던, 억압적인 다수결주의가 통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는 자기 복제를 위해 설계된 것으로만 보일 정도다. 여기에는 기존의불평등을 재생산하고 강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이끈다. 민주주의는 내재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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