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크는 이 단계에서 스스로 자신을 제자와 같은 수평적 위치로 내려놓는다. 장자크는 교사들을 향해서 학생이 "여러분과 동등한 사람이 되도록, 그들을 여러분과 동등하게 취급하라"고 주문하며, 만일 "그들이 아직 여러분의 수준에 오를 수가 없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과감히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가라"고 요구한다. 교사가 "위엄을 꾸미고" "완벽한 인간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은 오히려 교사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완벽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을 감동시키지도 설득시키지도 못한다"며, "학생의 약점을 고쳐주고 싶으면, 그에게 여러분의 약점을 보여주고, "그가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싸움이 여러분의 내면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하라"고 충고한다.
공화국으로 구체화되는 루소의 시민적 일반의지는 합리적 판단력을 넘어서 정서적 감정이 동반된 어떤 전인격인 도덕심에 토대를 두고 있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연대의 감정을 토대로 해서만 시민은 평등에 대한 의지와 그것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 정의감을 발휘하며 사회공동체 전체에 이익이 되는 선을 지향하고 실천하고자 한다는것이다. 일반의지의 전제로서 정의감, 정의감의 전제로서 공감과 연대감에는 청년기의 평등한 인간관계의 경험이 필수적이기에, 장 자크와 에밀의 의사소통은 이제 문답법을 넘어 ‘고백화행‘으로 전환된다. "이제부터 교사와 학생은 솔직하고 대화적인 우정의 관계가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학생뿐 아니라 교사도 솔직해야 한다는 점이다. " 고백화행에서 나타나는 교사의 솔직성은
수업에 참여한 철학과 88학번
그 학기 나는 내 인생 최고의 수업을 받았다. () 진리(인식)의 의사소통적 면모를 이해하는 학기였는데, 나는 거의 나를 위한 강의라고느끼며 학기를 보냈다. () 내가 궁금해하는 것들이 거의 다음 시간에이야기가 되곤 하였다. 그러나 그런 느낌과는 상반되게도, 나의 학업에 있어 그가 개입된 흔적은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은 온전히 내 스스로, 나의 고민과 탐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느꼈다. 당시엔!). 학기가끝나갈 때,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곳으로 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는 그곳을 내 스스로 찾아가게끔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로부터 받는 가장 큰 혜택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와 이야기하면, 왠지 내가 높아지는 느낌이 든다. 존중과 배려에서 비롯된 아니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가끔 그의 말에 용기와 위로를 얻기도 했었는데. 의례적인 말로써가 아니라 언제나 사실과 진실에 의거해서, 그러했다.
나는 거기서 진심으로, 용기를 얻고 위로를 받았다. 그와 이야기를 하고 나면 멈추었던 머리가 마구 돌아가기 시작하고, 질문거리가 폭발하고 찾아볼 것이 수십 가지 늘어나곤 했다.
그리고 강도와 방식은 조금 달라도 장춘익 교수가 교수법에 충분히 익숙해진 2010년 이후의 수강생들로부터도 방금 소개된 한승일의 경험과 유사한 실존적 상호존중의 관계와 자아효능감에 대한 증언은 자주 발견된다. 나는 앞에서 장춘익 교수의 토론 중심 수업에서 학습자가 스스로 문제와 답을 찾아가는 지적 적극성과 열정을 자극하는 수업 구성의 방식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지점에서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의 토론 중심 교수 방법에서 학생들을 감동시키고 자발적 지적 열정으로 나가게 하는 동력은 자세히 살펴보면 토론이라는 형식 자체보다, 토론이라는 형식 조건을 상호적 관계 맺기, 더 나아가 진정한 인간적 존중의 정서가 동반되는 상호적 관계 맺기로 전환하는 교수자의 특별한 태도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여성주의철학>과 같이 개인별, 성별, 세대별 정체성 및 자기이해와 결부된 수업 내용에 대해 학습자들이 마음을 열고 상대와 토론하는 것은 결코쉽지 않다.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철학> 강의실에서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곳에서만큼은 나의 의견과 정서, 판단과 자아가 의심이나 불신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즉 신뢰하는 권위자와 진정한 존중의 관계 맺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장춘익 교수 여성주의 페다고지의 실존 도덕적 특징이라
이제 나는 여성주의적으로 생각한다
설문조사 12번, 13번, 19번 문항은 참여자들에게 각각 ‘수업에 대한 종합적 만족도‘ ‘수업 이후 성차별, 성평등 문제 인식 전환에 미친영향‘ ‘수업이 삶 전반에 미친 영향‘에 대해 5점 만점으로 점수를 부여하도록 요구했다. 또한 14번 문항에서는 수업의 경험과 의미에 대한 평가를 세부적으로 규정하는 문장 4개를 제시하고 동의하는 경우 복수로 긍정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이 설문조사 객관식 문항들에 대한 긍정적 응답률은 약 50% 정도로 나타났다. 즉 객관식 문항에 대한 응답 역시 앞서 워드클라우드와 키워드 네트워크 분석으로 밝혀낸 학습자들의 수업 경험의 내용 및 ‘여성주의적 인식 전환‘이라는실천적 효과를 뒷받침해 준다. 사실 도구적 지식은 합리적인 인지과정을 통해 그 원리와 내용을이해함으로써 자기 지식으로 수용된다. 하지만 성차별과 젠더 불평등을 생산하는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는 섹슈얼리티와 신체 감각에서 비롯되는 은밀한 개인의 욕망에서부터 미시적인 일상의 관습, 사회문화적 가치와 삼심질서, 거시적인 정치·경제 질서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다층적으로 조직된 메타 규범이기에, 여성주의적 비판은 개인의 깊은 지하 감정과 문화적 정체성, 또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건드린다.
따라서 여성주의 철학)과 같은 수업의 학습자는 종종 심리적 불쾌감을 방어하기 위해,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수업의 내용적 흐름을 거부하거나 도구적 지식처럼 자신과 분리해서 내상화한다. 하지만 장춘익 교수의 수업에 대해서는 많은 설문 응답자들이 여학
생이든 남학생이든, ‘성차별이나 젠더이분법 같은 문제에 대해 이성의 집단과 이렇게 많이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거나, 수업이 너무 재미있어서 학과방 틈에서 같이 수강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수업 내용을 다시 열게 이야기하곤 했다는 경험을 증언했다.
장춘의 교수는 <여성주의철학> 수업에서 주제가 되는 사안에 대해 그리 여성주의적 해석을 제시하지 않았고, 학생들 스스로 다각도의의견을 제시하고 경합하도록 유도했다. 어떤 경우는 이 자유로운 토론과 논박 과정 자체를 학생들이 스스로 조직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여남 학습자 집단은 대립하고 반박하는 팽팽한 긴장과 동시에 반박과 재반박의 논증을 거치며, 낯선 상대와 어떤 소통을하었다는 이기지 못한 해방감과 즐거움을 느꼈음을 설문조사 응답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적지 않은 학생들이 ‘비판적이 해방적인 자기변화를 경험했음을 보고하는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 철학)은 블랙페미니즘의 창시자이자 영문학자이며, 대안교육이론가인 벨 훅스가 말하는 차이를 극복하는 교육, 비판과 재미가 공존하는 참여교육‘과 유사한 면이 있다.
벨 훅스가 말하는 ‘참여교육‘은 일차적으로 수업 과정에 학습자들이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함께 사유하려는 내적 동기를 유발하는 교육이다. 여기서 토론은 매우 중요한 과정인데, 목표가 되는 민식 또는 지식 내용을 교사가 지시사항처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 집단이 권위에 의한 억압 없이 자유롭게, 그리고 함께 토론하고 사유하면서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벨 훅스는 "참여교육이야말로
•교실에서 흥을 진정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가르침의 유형이다. 학생과 교수 모두가 학습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사유하는 가운데 학습자들은 관습적으로 수용하던 사회문화적 관념과 규범에서 벗어나 스스로 참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습자들이 상호 존중심을 가지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적 연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벨 훅스는 학습자들이 개방된 태도를 가지고, 생각하는 일에 열정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교사의 책임이라고 말하며 이런 교육 경험을 통해 학습자들은 비판적 사고를 내면화하고 ‘정치적 행동 참여‘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내가 참여교육을 실천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주의를 표현하는 것"이며 "참며 교육을 실천하는 일은, 교수가 학생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기꺼이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갖는 일이라고 말한다.
2장에서 지금까지 밝혀낸 <여성주의철학> 수강생 집단의 여성주의적 자기 변화를 이제 구체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확인해보겠다.
벨 훅스 참여교육 이론의 3가지 구성요소를 원용해서 첫째, 학습자들이 어떻게 <여성주의철학> ‘교육에 참여‘하는지, 둘째, 그들이 이런 자발적 지적 참여를 통해 얼마나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고‘에 도달하는지, 셋째, 비판적 사고를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실제 현실에서 여성주의적 ‘정치적 행동 참여를
시도하는지 검토하겠다. 우선 수업 자체에 대한 주관적 현상학적 기억을 요구하는 9번 ~12번 문항의 응답들을 중심으로, 가부장제 남성중심주의와 성불평등에 대한 토론과 성찰을 지향하는 (여성주의철학>의 ‘참여교육‘과 자•발적인 ‘비판적 사고‘를 증언하는 목소리를 살펴보았다. 더불어 현재삶의 관점에서 수업을 평가해주기를 요구하는 18번 문항, 즉 사후 관정의 수업 인상과 평가 문항에 대한 회상에서도 간접적이지만 수업중경험한 ‘참여교육‘ 및 ‘비판적 사고‘에 대한 흥미로운 증언들이 발견되어 추가로 제시했다.
특히 대학은 청년들이 현실의 이해관계와 사회적 역할에 들어서기 직전에 자유롭게 학습하고 생활하는 사회화의 마지막 단계이자 개방적인 문화적 공간으로, 바로 이러한 보편 도덕에 근거한 실천적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는 최적의 무대가 될 수 있다고 장춘익 교수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철학교수로서 발을 내딛는 1990년대 초반부터 마지막 강의를 진행했던 2020년까지 생활세계 영역으로서의 대학의 역할 및 평등한 의사소통적 교육에 내재된 도덕적 실천적 의미를 일관되게 강조했다.
() 사회철학이 오늘날 할 수 있는 일은 경제의 효율성의 논리의 월권을 막는 문화적 저항에 기여하는 일이다. 사회철학의 이러한 역할 규정은 물론 사회운동이 문화운동으로 축소,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은아니다. 이 역할 규정은 노동계를 비롯한 각 사회영역이 자체적 조직능력을 확장해가고 있고, 다른 한편 사회철학적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실질적으로 대학을 비롯한 문화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만일 비판적 사회철학의 주장들이 이해관계의 대립에서•비교적 자유롭고 토론을 위한 심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공간에서 설 ‘득력을 확보해 내지 못한다면 그 외의 공간에서는 현실성 없는 주장으로 앞서 가거나 이미 있는 사회운동에 대한 별 필요 없는 응원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이기적이고 수평적인 관계의 경험이 보편주의적 도덕의식의 형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비이기적 관계가 규법적 의식을, 수평적 관계가 보편주의적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경우 보편주의적 도덕의식을 형성하는 데에는 지난 세기 중후반부터 인구의 상당수가 어린이부터 청년기까지 사회화 과정의 대부분 시간 동안 공교육체계 속에서 또래 집단과 수평적 교류를 경험한 것이 하나의 중요한 실질적 지반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수평적 고문의 경험 속에서 하비마스가 말하는 이성적 자유, 즉 ‘모두와 삭자들 상호수관적으로 공유되고 완전히 답중식화된 상호적 관계들의 연관성 속에 강세 없이 외시소통적으로 포함시키고자 하는 자유에 대한 지향성이 형성되고 강화되었을 것이다. 이런 추측이 맞는 것이라면, 경쟁논리와 사회적 지별이 교육체계 깊숙이 파고들이 사회화 과정이 동시에 수팅적 교류를 체득하는 과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도덕의식의 발전과 관련하여 가장 염려해야 하는 부분이 될 것이다.
의 표현에 기대어 말하자면, 단지 수평적으로 연결하리는 앞의 두 개의 장에서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철학> 수업을 통해 캠퍼스 운동권 여학생들에 국한된 주변부 담론이었던 캠퍼스페미니즘이 어떻게 여남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전공 교육의 중심무대에서 생생한 실천적 의사소통의 과정으로 새롭게 의미화되었는지 확인했다. 그의 수업에서 학습자들은 교수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기정당화의 압박에서 벗어나, 보다 쉽게 상호적 의사소통에 들어설 수 있었고, 그 정서적 편안함 속에서 긴장감 가득한 성차별과 성정체성 문제를 평등하게 논의하는 내적 경험으로 재의미화했다. 그리고 그 평등한 의사소통의 관계 속에서 참여자들은 상대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는 자기성찰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 결과 나의 기존 도덕 감정의 한계를 인식하거나 또는 나와 다른 상대를 마주보고 연결되는 행복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의 강의실에서 경험하는 평등한 토론과 상호적 성찰, 그리고 발견의 행복한 감정은 많은 학생들로 하여금 여성주의 페다고지가 지향하는 연대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편주의 도덕에 근거한 이러한 연대의 가치를 내면화한 학생들은 강의실 밖에서•만나는 젠더 억압에 새롭게 주목해 저항하거나, 스스로 연대의 요구를 이어가는 파생 공론장을 만드는 행위로 나아갔다. 이 수업의 적극적 학습자들은 교내외에서 이차적인 공론장, 즉 각종 동아리, 독시회, 토론회, 문화행사 등의 활동을 자발적으로 기획했음이 구체적으
운동권의 남학우들에 의해서도 비일비재하게 소외와 차별을 받는 경험을 했다. 조한진희는 "캠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지나가던 체대생들이 위협적인 눈빛을 보내"거나 "이렇게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은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두르는 이들도 자주 만났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캠퍼스 내 익명의 위협보다 더 큰 문제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철학과 남학생으로부터 여자가 왜 담배를 피우나, 무책임한 모성이 아니냐 등 갖가지 이유로 추궁을 받는 일이있다. 이유진은 "철학과에서 벌어진 성희롱 사건을 공론화하고 문제제기했을 때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녀를 비난하거나 고립시키거나방관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다. 운동권 여학생들의 저항적, 도덕적 자존감을 염두에 두면, 이런 위협과 배척은 일반적인 불안 외에 깊은 분노와 긴장을 야기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저항적, 도덕적 자존감은 사회화 과정에서 소수자나 주변화의 경험에 노출되었을 때, 자아의 자기중심적, 도덕적 힘이 강한 개인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계급, 인종, 젠더의 차별적 배제 기제가 이런 도덕적이고 혁명적 개인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소외와 차별, 억압이 초기 사회화 과정에서부터 각인되면, 즉 가정과 부모가 개인의 세계를 지배하는 유년기와 아동기부터 직접적인 소외와 억압에 노출될 경우, 자아는 충분한 자아효능감 및 대상에 대한 신뢰를 획득하지 못한 채 근본적인 불안을 떠안을 수 있다. 이것은 이후 성인기에 다양한 계기로 전면적인 내적 위기로 소환되는데, 상담학은 바로 이런 자아의 위기에서 어떻게 자
아가 자기효능감과 대상에 대한 신뢰를 되찾도록 도울 수 있는지 탐구한다.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남성중심주의적 권위적 핵가족 모델이 지배하던 1980년대에 아동기를 거쳤을 페미니스트 세대 여성들은 다소간 이런 문제적 사회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신드롬은 200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여성들의 생애사적 우울과 좌절에 대한 우리 사회의 뒤늦은 고발이자 위로인 셈이다. 앞서 보고한 여성주의 운동권 학생으로서 조한진희나 이유진이 캠퍼스 내에서 겪었던 위협과 배척은 그들의 자아에 진지한 위기일 수 있었고, 자아의 도덕적 통합성을 충분히 와해시킬 수 있는경험이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여성주의 철학>이라는 작지만 확실하게 중심에 위치한 교육 공론장, 그리고 문제적 상황마다 적극적인 공감에 바탕한 장춘익 교수의 개입과 지지는 이들의 내면에 힘을 북돋우고 자아의 심리적 자원을 회복해주었을 것이다. 조한진희는 학과 술자리에서 다시 ‘담배 피우는 여자‘로 공격을 받을 때, 장춘익 교수가 "그러니까 ‘겨우 여성의 담배 문제로 표현해 보여준 반응을 잊지 못한다고 전한다. 성인의 기호식품에 대해 제삼자가 비난하는 것의 부당함을 그는 "타인의 자유, 책임, 평등의 개념을 가지고 설명과 질문을 이어갔는데, 더 놀란 것은 장춘익 교수가 "당시자나 느낄 법한 분노로 고양되어 있었고, 그 두터운 분노를 숨길 의지가 없는 듯했고, 동시에 적절한 방식(수업시간의 연장 같은 토론의 태도)으로 표출했다는 사실이었다.
장춘의 교수는 "페미니즘 문제에 있어서 부당한 현실에 대해, 안전한 곳에서 거리를 둔 채 우아하게
장춘익 교수의 페미니즘 강의실이 운영된 20여 년의 기간을 동시적으로 보면, 남학생들의 경우 기존의 안정적인 남성적 자기이해가 의문시되는 것에 대한 불안에서부터 ‘가해자 남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반발심까지, 내적 불편과 긴장의 정도가 점점 높아지는 양상이 드러난다. 이 상황에서 남성 페미니스트라는 교수자의 정체성은 남학생들에게는 긴장도를 완화시키는 순기능으로, 여학생들에게는 같은 성별이라면 기대할 법한 포괄적이고 선제적인 동일시기대를 낮추며 지적 긴장을 유지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동시에 수업의 주제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방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경우도, 남성 교수자라는 정체성은 여남 학습자 모두에게 자아방어를 어렵게 만든다. 페미니즘 이슈를 공감하지 않는 여학생이라면 자신의 전통적인 젠더관계 의식을 확인해 주어야 할 남성 권위자가 오히려 전통적 젠더관계에 비판적인 것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다. 또한 페미니즘을 여성들의 ‘한풀이‘로 사소하게 치부하려는 방어적 남성 학습자의 경우 여성이 아닌 남성 교수가 페미니즘 교육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학습자들은 자기 감정의 정당성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성, 정체성, 성역할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성별 집단 사이에 개방적으로 대화하는 새로운 경험이 시작되는 순간,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집단 설문조사에서 실제로 수강생들은 ‘선생님은 뒤에서 중재해주시고 학생들끼리 열띤 토론을 나누는 "가장 재밌고 신났던 토론 "(83/04 예)이었다고, "수업시간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 발표하고 토론"[BBIO7 여)했다고, "긴장과 자기 경협의 토로 (93/17 남)가 있었다고 답변했다. 특히 남학생들의 참여를 강조하는 답변들이 있었다.
{) 교수님의 성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여자 교수님이 여성학 전공자가 수업을 한다는 부분에서 이를 듣는 남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레포트를 통해서 수업이 끝나고 자기들끼리 하는 대화 속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하는 입장을 나누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철학과는 수업 분위기가 무척 달랐습니다. 남학생들의 발언이 굉장히 활발했어요. 기억에 남은 것은 성매매 관련된 수업이었습니다. 상대와 관련된 내용에서 합법회와 비법화에 대한 자유로운 생각들을 털어놓게 하셨고, 정말 자유로운 남학생들의 의견들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은 어떤 답을 두고 학생들의 의견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래서 더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고요. 또 더한 주제를 골라서 책상을 붙이고 학생들을 토론하게 했던 것이 기억이 남아요. 나머지 학생들이 모든하는 학생들의 내용을 관전할 수
있도록 하는 세월이 흥미로웠습니다. 그 사이 선생님은 사회를 보자면서 양쪽의 입장이 자유롭게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동시에 여성들 간의 입장 차이를 확인하는 당혹스러운 순간에 대한 증언도 있다. ‘의대 및 간호학과 학생들은 "여성주의 자체에 대한 관심과 동의가 있어 보였지만, "내가 머플러 파트 과학, 퀴어챕터 찾아 발표했을 때, 토론이라 하기는 조금 ()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데, 여성주의를 지지하는 집단 내에서 확인되는 그 차이가 당시 나에게는큰 물음(93/17 남)이었다고 한 수강생은 회상한다. 또 여성주의를 통해 차별에 대해 "알게 된 나와 이전의 내가 너무나도 달라 피로감이나 좌절감 등을 느끼기도 하는데, 무지의 욕구‘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는 순간 가벼운 수치심을 느끼며 다시 각성하기도 한다(97/17 예)
(여성주의철학)이 성별 학습자 집단 모두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적 긴장과 자기개방, 자기방어와 소통 사이의 변증법적 동력을 경험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특히 남성들에 대한 여성주의 교육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흥미로운 대답의 단초를 준다.
페미니즘의 초기 남성성 연구는 남성역할을 억압적 사회화의 결과로, 남성성을 잠재적 폭력성과 등치하는 방식으로 흘러갔다. 이 단순한 남성성 비판은 현재 연구에서는 제한적으로만 인정되지만 큰 흔적을 남겼다.
비록 로버트 코넬이 ‘지배적 남성성(hegemonic
다. 예를 들어 정치권의 여가부 존폐 논쟁과는 별개로, 현실적인 문제는 여가부 같은 조직은) 리더의 역할에 의해, 그 존재의 의미가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저는 기본적으로 여가부 ‘개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리더(장관)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여가부는 팔요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전반의 젠더 인식이나 여성주의 지식이 향상될 수 없습니다. 구조적인 뒷받침없이 한 사람의 역량으로 성과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여성학은 교수자의 역량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춘의 교수의 사례와 실천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30년, 대학의 안과 밖에서 여성학자나 인문학자는 영원히 필요한 영역이지만 양성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사회를 젠더 시각에서 맥락적으로 분석하는 이들이 극소수이다 보니, ‘여혐‘ ‘남혐‘ 같은 엉뚱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빈발합니다. 이는 사회적 문해력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대학이 여성학을 비롯, 인문학자들 배출하리라는 기대는 없습니다. 지금 그 자리를 소위 ‘작가‘들이 메우고 있지요.
1990년대 초반부터 여성학 공부와 여성운동을 했던 이들은 지금 대부분 정부, 지자체, 국회 등에 취업한 상황입니다. 토크니즘(tokenism)에 의해 구색 맞추기로 자리한 경우 공적 기관에 취업하면, 남성 사회와 ‘협상‘이 불가피합니다. 협상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종속되지요. 대학 교원으로 취업하거나 연구를 지속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독립연구자는 더더욱 드릅니다. 게다가 현재 젊은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주의를 수용하지만 최소 10년 이상 엉덩이를 의자에 묶어두어야하는 공부‘를 자신의 진로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온라인을 중심으로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주도하는 여성들은*생물학적 여성은 여성학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저는 현재 한국 사회의 여성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과제는 여성학자의 양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는 다른 그 어느 학문보다. 언어의 경합이기 때문입니다. 장춘의 선생님의 발자취가 학자로서 모델이자, 그리운 이유입니다.
끝으로 장춘익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저도 주변 사람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인용을 하며 장 선생님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저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는 여성주의자뿐 아니라 모든 ‘주의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중요한 지침일 것입니다.
위치성 자체가 지식은 아닙니다.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알고자하는 의지, 다른 이들과의 연대는 여성주의의 전제입니다.
약자는 언어를 가질 필요가 없고, 단지 소수자라는 정체성만 중요하다는 논리야말로 ‘약자 혐오‘이자 여성학이 학문으로 간주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실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피해자의식(victim-hood)을 내세웁니다. 공동체는 건강해질수 없습니다. 이미 여성주의 심리학에서는 이를 ‘약자의 행패 (tyrannyaf minorities)‘라고 경계해 왔지요.
장춘의 선생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회운동의 원리
에 대해서도,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깊은 식견이 있으셨습니다. 장선생님이 어느 학생에게 한 말씀입니다.
"오래가는 항의는 아무튼 짜증 나는 거야. 별로 동의해 주고 싶지않은 이야기 자꾸 하면 정말 짜증이 안 나겠어? (1) 항의는 내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같은 항의가 오래 반복된다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결핍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항의 기간이 길어지면 지쪽은 짜증 나고 이쪽은 초라하고 비참한거야. (…)
네가 세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흡수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단다. 페미니즘이 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해. 페미니즘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다(편자 강조저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페미니스트가 지적으로 욕망의 대상이 되고 행복하고 건강하면, 그게 바로 여성운동이 아닐까요- 이번 기회에 인용할 만한 좋은 텍스트가 생겨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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