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정책의 창이 열렸을 때 창작자 보호를 위해 시도했어야하는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창작자에게 최후의 보루이자, 최선의 안전망인 「저작권법」의 개정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저작권법에서 저작재산권의 양도는 유효하며, 별다른 제한이 없다. 사적자치의 원칙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국가의 저작권법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독일 「저작권법」에 의하면, 저작권의 양도는 허용되지 않는다. 프랑스 지식재산권법」에 의하면 장래의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의 포괄적 양도는무효이다. 저작권 양도 계약 시 양도되는 권리도 이용 목적과 범위및 이용 장소와 기간으로 제한되며, 그 요건이 결여되면 무효라고

본다. 23536우리나라도 이제 ‘모든 권리에 대한 기간 제한 없는 포괄적인 양도 계약‘은 무효라든지, ‘양도 계약의 기간을 5년으로 한정‘하는 등양도 계약의 범위와 기간을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방향의 저작권법개정이 필요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의 저작권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발의되었으나, 정부의 의지가 없어 번번이 폐기되었다.) 설사법을 잘 몰라서, 혹은 현실적인 힘의 관계 때문에 창작자가 잘못된계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저작권을 되찾아 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저작권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는 창작자에겐 형벌이나 행정벌로 정부가 상대방을 처벌하는 것보다 훨씬 실효적인 권리구제 수단이다. 비록 당장은 누군가를 처벌한다는 속 시원함도 없고, 산업계의 반대도 많으며, 법 개정을 위한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래도 정공법이 필요하다. 나는이 사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때를 놓치고 정책의창이 닫혀버린 게 못내 아쉽고 원통하다.
문체부는 항상 ‘창작자 보호‘가 최우선 과제라고 말한다. 당연한이야기다. 문화의 근간은 바로 창작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의 발전 역시 중요한 가치이지만 방송, 미디어, 콘텐츠, 플랫폼 업계

는 문체부가 아니더라도 방통위, 산자부, 중기부 등 정부 내에 아군이 될 만한 조직이 많다. 하지만 창작자는 문체부가 아니면 전적으로만들어 줄 곳이 없다. 따라서 정부 내 이견을 감수하더라도 문체부는 창작자의 편을 드는 것이 타당하고도 마땅한 태도다. 조직이 지닌 본연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간 문체부가 한 일을 보면 과연 창작자 편을 제대로 들고 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예를 들어 주요 선진국의 경우 공공장소에서 음악을 재생하면 원칙적으로 음악 저작권자에게 저작권료(공연권)가 발생하고, 예외적으로만 그 공연권이 제한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저작권법」의 경우엔 그와 반대다. 원칙적으로 공연권이 제한되고, 카페 등에서만 예외적으로 발생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처럼 ‘공연에 대한 원칙 제한 및 예외적 보장의 형식‘은 그간창작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EU(유럽연합)에서 우리나라에 단골로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해당조항은 일본의 구(舊) 저작권법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평가도많은데, 일본은 공연권을 제한하는 해당 조항을 1999년 폐지하였는데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더욱이 공연권 제한의 근거가 되는 「저작권법」 제29조 제2항은 헌법재판소에 위헌 제청되

었지만, 끝내 합헌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법이 개정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야 하지만, 저작권료를 부담해야 하는 소상공인 등의 반발이 두렵다는 이유로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그러한 예시는 이것 말고도 수없이 많다. 우리나라는 세계 6위권의 음악 강국이지만, GDP 대비 음악 저작권료 비중은 0.017%로 세계 33위에 불과하다. 정부가 승인하는 저작권료가 지난 10년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작자 보호가 최우선이라는 문체부의 일상은 그래서 거짓말이다.
구름빵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창작자보호 차원에서 저작권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창작자 보호라는 본연의 기능을 제외하면 문체부의 존재 의의에 무엇이 남을까.
솔직히 산업의 지원이나 보조금 집행은 다른 부치나 지자체에서 많아도 그만인데 말이다. 하지만 공주식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않아도 웬만해서는 없어지거나 대체되지 않는다. 충격적인 사건이일어나고 비난 여론이 드세어진 배도 있지만, 그때의 바람만 잘 피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공직사회와 관료는 반복된 학습으로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접근 대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졸속 대책이 판을 친다.

내가 3부에서 적었던 여러 사례가 보여주듯이 정책 실패의 주된요인은 관료제의 뿌리 깊은 무책임과 단기적 성과주의에 기인한다.
여론이 들끓을 때는 그럴듯한 해결책이 급히 발표되지만, 정작 근본적인 법적·제도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흐지부지된다. 진정한정책 개선은 여론에 휘둘리지 않는 일관적 철학과 장기적인 전략에서 나올 것이다. 우리 공직사회에 그러한 철학과 전략이 부재하다는 사실을 나는 거듭 강조했다.
관료제의 무책임함과 정치적 외풍에 쉽게 흔들리는 행정의 현실은 정부를 점점 더 위태롭게 만든다. 그러나 단순히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데서 그치거나 단기적 처방에 의존한다면 이러한 상황을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공직사회의 구조적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실질적이고 지속가능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다. 4부에서는 이러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다뤄보려 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4부에서 전개할 논의의 목표는 우리나라의 관료들이 본래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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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치매에 걸린사람 중 많은 이들은 때때로 오랜 과거의 일들을 선명하게 기억해 내는 마술 같은 힘을 얻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두루봉이 하르방이 치매 때문에 이 모든 기억을 쏟아내게 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가기 바빴던 그 시절의 아버지에겐 기억이 머무를 공간이 없었다. 하물며 하르방은 많은 제주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상처받은 그 시절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모두에게 상처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을 터이다. 

제주출신 소설가 김석범이 4.3을 두고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이 자신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하지만 하르방의 기억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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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꼬마가 목격한 전쟁이란 처절한 굶주림이었다. 배고픔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나약하다는 사실을 꼬마도 느꼈던 길까. 고구마를 얻어먹으며 머리를 조아리던 병사들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돌아가는 노래 (할망의 표현에 의하면)‘를 합창하며 마을을 떠나갔을 때, 아마도 할망은 그중 몇몇을 향해 작게 손 흔들지 않았을까 감히 상상해 보는 것이다.

할망이 말한 ‘그보다 더 몹쓸 짓‘은 해방 후 삼 년이 지난 194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할망의 마을은 웃뜨르(중산간 마을)라 해서 4.3의 주된 희생지역이다. 지옥 같은 나날들은 몇 해나 계속되었다. 언젠가 집으로 찾아온 ‘무장대‘가 쌀과 쇠를 얻어가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군경(軍警) 토벌대‘의 진압에 맞서 싸우던 무장대는 대부분 제주 출신의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폭도‘, ‘빨갱이‘라 불리던 그들에게 쌀을 준 사실이 발각되면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던 시절이다. 심지어 그들을 본 적이 없는데도 폭도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무장대 청년들에게 노란 쌀을 나누어 주며 어머니는 "제발 홀리지 말고 흔적 없이 가주십사." 하고 사정을 했다. 지금이니 이런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한다지만 당시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망은 ‘폭도가 와서 먹을 것을 앗아갔다‘는 말이 아닌 ‘청년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라는 표현을 썼다. 

이렇듯, 4.3을 경험하고 이야기하는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폭도‘라는 말은 겹겹이 가려져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은

실체다.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 왜 싸우는지조차 몰랐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일치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름이 존재한다. 해안가에 살던 사람들은 중산간 마을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폭도‘라 하기도 했고 많은 할망들은 지금도 무장대를 ‘폭도‘라 부른다.

또한 검은 옷을 입고 마을에 나타나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던 경찰을 ‘검둥개, 노란 옷을 입고 사람들을 괴롭히던 군인을 ‘노랑개‘라 칭하던 할망을 만난 적도 있다. 
4.3이 ‘아직 쓰이지 못한 현대사‘인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다. 한 줄기의 역사로 정리되지 못한 단어들이 서로의 가슴에 칼을 후비는 상황 속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말하지 못하는 사연을 지닌 채 한 맺힌 노년을 보내고 있는섬의 노인들이 허다하다.

할망의 기억 속에 또렷이 존재하는 무장대 청년들은 어머니에게 고구마를 얻어가던 굶주린 일본군 병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터이다. 그러나 상황은 훨씬 참혹했고 불쌍한 것은 할망을 포함한 마을 사람 모두였다. 

군경 토벌대는 마을의 집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죄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밑으로, 해안가로 내려가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경찰의 말에 사람들은 밑으로 내려가다가 토벌대에게 총살을 당했고 젊은이들은 산으로 올라가야 산다고 산을 오르다 죽었다. 
위로도 아래로도 가지 않은 사람들은 동굴에 가 살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서로가 어디에 간 줄도 모르게 뿔뿔이 흩어져 몇 년을 버텼다. 할망의 부모는 밑으로도 위로도 가지 않은 채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몸을 숨기다가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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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을 금방 뽑아 숨 쉬면 아픈데도 내 방 앞에 줄은 한정 없이 길었소...."
당시엔 물론 자궁을 잃은 줄도 몰랐다. 그걸 안 건 나중에 훌륭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 이후였다.
"혼인을 했으면 아이를 낳아줘야 하는 게 여자의 임무인데...암만해도 아가 안 생깁디더. 그래서 혼자 병원에 가봤더니 자궁을 끊어내고 없다 캅데다."
그 사연을 어떻게 말로 다 풀어낼 수 있으랴. 우리는 밤을 꼬박 샜다. 울고 웃었다. 왜냐하면 김수해 할머니의 이후 삶이 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온 남편

신선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땅으로 내려온 것을 적강라고 부른다. 김 할머니가 만난 남편이 바로 그 적강이었다. 믿을 수 없이 관대하고 여자를 귀하게 사랑할 줄 알며 남의 아픔을 애통할 줄 아는 남자. 그는 산판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는 쿨리(하층 육체노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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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칼럼니스트,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남의 이야기 듣기를 즐겨 급기야 사람을 만나 이야기 듣는 것을 직업으로 삼게 됐다. 
사람이 우주이며 한 인간의 생애 안에 가히 우주의 천변만화가 담겨 있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숱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지난 세기 초중반 한국 여자로 태어나 우리 역사의 우여곡절을 온몸으로 밀고 온 분들, 그들의 삶 앞에서 전율의 농도가 가장 컸다. 이 책은 그 감동의 기록이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이 우리들의 가장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 과일이서리를 맞아야 단맛이 돌고 향기를 풍기듯 인생도 고난 속에서 익어간다는 것을 믿는다. 
여기 실린 이야기들이 지금 행복한 사람에겐 삶의 확장을, 지금 불행한 사람에겐 삶의 깊이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팔뚝이 잘린 사람 앞에선 손가락이 잘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앞세대가 몸부림치며 살아온 이야기가 뒷세대의 가슴을 울리기를, 그 울분과 통한이 서로를 연대하고 위안하고 사랑하게 만들기를, 더불어 고통을 뚫고 나와 더 너그럽고 강인해진 분들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통찰해내기를 희망한다.

한때는 국어교사였다가 신문, 잡지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잡지 <샘이깊은 물》에서 인물 인터뷰의 매력에 눈떴다. 최근에는 《동아일보》, 《신동아》, 《월간중앙> 등에 인물칼럼과 시사칼럼을 연재 중이다. 
저서에 우리시대를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집안을 열어 보인 <김서령의家)가 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긍정, 비관을 털어내는 유머,
따뜻한 인간애로 수난의 한국 현대사를 밀치고 나온 여덟 인생을 만나다.

김서령은 남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작가다.
<여자전>에 대해 무엇이든 덧붙이는 글은 너절한 사족이다. 전쟁, 가난, 분단 등 현대사의 진창을 건너오신 그분들의 삶 앞에서 언어는 초라하고 우리는 부끄럽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분들의 삶을 몸으로 느끼고, 자생력과 자기치유력을 기억하며, 용기와 지혜를 배울 뿐이다. 이따금 눈물을 찍어내고 한숨을 내쉬면서.
:소설가 김형경

한국 근현대사를 ‘수난사‘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김서령 선생이 인터뷰한 파란만장한 운명을 헤쳐온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난은 있어도 ‘수난사‘는 없다고 느껴진다. 
이데올로기 갈등, 분단,
외세의 침입, 경찰국가의 억압 등의 수난이 닥쳐와도, 이들은 끈질긴 생명력과 자존심으로 고비를 슬기롭게 넘어왔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과 이웃의 인생들을 따스하게 가꾸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생을 즐기려는 욕망, 유머 감각과 낙관을 결코 잃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서야 한국 사회가 분단, 전쟁, 독재를 넘어서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원동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 오슬로대 교수 박노자

"실을 금방 뽑아 숨 쉬면 아픈데도 내 방 앞에 줄은 한정 없이 길었소...."
당시엔 물론 자궁을 잃은 줄도 몰랐다. 그걸 안 건 나중에 훌륭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 이후였다.
"혼인을 했으면 아이를 낳아줘야 하는 게 여자의 임무인데…암만해도 아가 안 생깁니더. 그래서 혼자 병원에 가봤더니 자궁을 끊어내고 없다 캅데다."
그 사연을 어떻게 말로 다 풀어낼 수 있으랴. 우리는 밤을 꼬박 샜다. 울고 웃었다. 왜냐하면 김수해 할머니의 이후 삶이너무나 행복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온 남편

신선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땅으로 내려온 것을 적강이라고 부른다. 김 할머니가 만난 남편이 바로 그 적강이었다. 믿을 수 없이 관대하고 여자를 귀하게 사랑할 줄 알며 남의 아픔을 애통할 줄 아는 남자, 그는 산판에서 벌목공으로 일하는 쿨리(하층 육체노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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