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하는 우리 두 사람

저 가을 산을어떻게 혼자 넘나우리 둘이서도그렇게 힘들었는데.
중국, 7세기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고... 다른 방, 다른 곳에서 다른사건이 일어난다. 우리 삶에는 열리고 닫히는 많은 문들이 있다. 어떤 문들은 조금 열어둔 채 떠난다. 다시 돌아올 희망과 포부를 안고. 또 어떤 문들은 쾅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닫히고 만다. "더 이상은안 돼!" 하며, 어떤 문들은 "괜찮았어, 하지만 끝난 일이야" 하며 후회속에서 조용히 닫힌다. 떠남은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한 문을 닫고서 그 문을 뒤로하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전망과 모험, 새로운 가능성과 동기를 일으키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53년 동안 함께 살았던 스코트가 만 100세가 된 지 3주일 뒤에 메인에 있는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날 하나의 장이 막을 내렸지만,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이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그이는 오랫동안 최선의 삶을 살았고, 일부러 음식을 끊음으로써 위엄을 잃지 않은 채삶을 마쳤다. 나는 느슨하게 그의 손에 마지막까지 쥐어져 있던 고삐를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내 삶을 꾸려갈 수 있다. 나는 의기소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알고 있다. ‘우리 머리 위로 새가 슬퍼하며 날아다닌다고 해서 우리 머리에 새 둥지를 틀게 할 필요는 없다‘는 고대 중국의 격언이 생각난다.
나는 스코트가 아직 여기에 있는 것처럼 살려고 애쓸 것이다. 그이는 우리 집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보물창고였다. 그이와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안정되었다. 이제 나 혼자가 되었으니 내 스스로모든 일, 모든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 새뮤얼 존슨(S. Johnson)은 1780년에 아내와 사별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연민을 담아 다음과 같이썼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상대방을 잃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사랑한 아내를 잃고 뒤에 남은 사람은 희망과 걱정, 관심사를같이했던 유일한 존재가 그리고 많은 고락을 나누며 지나온 날들을함께 돌아보고 앞날을 함께 그려본 유일한 반려자가 떨어져나갔음을봅니다. 삶의 연속성이 상처받고, 감정의 안정이 멈추며, 외부의 자극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때까지 삶의 흐름이 중단되고 움직임이 둔해집니다. 그 중단된 시간은 끔찍합니다."
스코트가 떠난 뒤 몇 달은 내 정신에서 축복받은 공백의 시기였다. 친구들은 내가 규칙을 지키면서 겉으로 보아 명랑하게 모든 일상 활동을해나가려 했다고 말하지만, 아마도 내게서 어떤 거리감과 관심이 옅어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찾아오는 친구들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루이스(C. S. Lewis)는 <눈에 보이는 비통함 A Grief Observed》에서이렇게 썼다.
"잃음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에 뒤따라오기 마련인 한 부분이다.
결혼이 구혼에 뒤따르듯, 가을이 여름 뒤에 오듯 사별은 결혼에 이어서 온다. 잃는다는 것은 단절이 아니라 또 하나의 다른 국면이며, 춤

의 중단이 아니라 그 다음 차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을 때그 사람 손에 이끌려 우리는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우리는 앞에 남아 있도록 배워야 하는 것이 이 춤의 슬픈 장면이다."
나는 나보다 스물한 살이 많은 스코트가 먼저 갈 가능성이 많다고는알고 있었지만, 거의 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지내왔다. 스코트는 매우건강하고 힘차게 활동했으며 삶에 충실했으므로, 언제나 그렇게 살아갈것만 같았다. 나는 무대 밖으로 사라진 그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되었고, 그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떠나갔다. 이제 그이는 더 이상 농장에서 일하지 않고, 트럭 안으로 해초를 던져넣지 않는다. 저녁마다 벽난로 옆에서 함께 소리내어 책을 읽을 수도없고, 여행도 떠나지 못하며, 책을 쓰거나 세상사에 대해 설득력있는논평도 하지 못한다. 그이는 나보다 조금 앞서 우리의 조화로운 관계 밖으로 떠나갔다.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물건을 정리하고 집안일, 책, 원고, 농장에 관한 일들을 적절하게 결정하여 정리한 뒤 나 또한 홀로 떠날 것이다. 나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사실 이제 떠난다고 해서 결코 이르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특별히 운이 좋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왔으며, 이제 나날이 되풀이되는 자질구레한 일에서 빠르게 떨어져나가고 있다. 만일 저 반짝이는 바다가 가라앉게 된다면, 나는 기쁘게 내몸을 그 속에 잠글 것이다. 그리고 저 너머 도달한 곳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있다면, 나는 잠깐 숨을 쉬고 주위를 돌아본 뒤에 기꺼이 그 일과맞닥뜨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앞으로 남은 삶의 열쇠가 내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 나는 우리가 가기로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으며 평화롭고 고요한 가운데 위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코

트가 그랬듯이 음식 먹는 일을 멈출 수 있다. 죽음이 우리의 목적이라한다면, 음식은 우리를 육체에 매이게 하는 미끼요 독이다. 육체에 음식물 공급을 멈추면, 육체는 기울어져 죽음에 이른다. 죽음은 삶의 모힘을 끝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육체가 끝나는 것일 뿐이다.
간디는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면 할수록 헤어짐에서 오는 슬픔이 아마도가장 큰 망상이라고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망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가 친구들을 사랑하게되는 것은 그들 속에서 우리가 보는 실체 때문인데도, 우리는 잠깐 동안 그 실체를 덮고 있던 껍데기가 사라지는 것을 한탄합니다. 실체의죽음, 실체와 이별하는 일은 없습니다. 진실한 우정은 겉껍질이 사라진 뒤에도 그 실체를 만나고 지켜갑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생각은 1세기에 티아나(Tyana)의 아폴로니우스(Apolonius)가 남긴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말고는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본질에서 자연계로 건너가는 것은 탄생이요, 자연계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 창조되거나 사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눈에 보이거나 안 보이게 될 뿐이다."
스코트는 언젠가 죽은 뒤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친구의 질문에 이렇게 답장을 쓴 일이 있다.
"나는 다르게 묻고 싶네. 사람은 그가 속해 있는 우주와 계속해서관계를 유지해가는가? 내가 이르게 된 결론은 삶이 본질에서 아주 다른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일세. 삶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합적인 것이고, 그 복합적인 것의 하나는 삶이 길거나 짧은 지속기간을 갖는 여러 조각들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네. 그리고 어떤 조각의 삶이든 이 땅에서 우리 삶을 이어가도록 해주는 몸의 기관보다는 영속

적이라네."
우리 삶에는 너무 많은 ‘나‘가 있다. 저마다의 인격은 우리의 본체가아니라 우리가 걸치고 있는 무엇이다. 우리 몸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다. 우리 생각 또한 우리가 아니다. 우리생각에 지침을 주는 것이 우리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리다. 우리는 가치있거나 또는 한탄할 만한 인격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기도 하고 망칠 수도 있다.
우주는 너무 광대해서 낱낱의 인격과 맺는 관계를 초월해 있다.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 자신의 작은 자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전체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속에서 우리의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40년쯤 전 남쪽 버몬트에서 살 적에 여러 친구들과 식탁에 둘러앉아있을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훌륭한 여성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한 평화사업에 대해 꽤 많은 얘기를 했다. 나는 그 이야기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일인칭 대명사가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한 가지 모험스런 제안을 했다.
"하루 종일, 아니면 한 시간, 아니 지금같은 식사 시간만이라도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지낼 수가 있을까요?"
모인 사람들은 재미있는 실험이 될 거라고 동의했다. 우리들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 문제에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좋을까 생각하느라고 방 안이 조용해졌다. 간단한 생각을 표현하는데도한참 생각해야 했고 문장을 다시 짜야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나라는말이 끼여들어 성공할 수 없었으며, 말을 하다가도 규칙 위반이라는 외침으로 중단되곤 했다. 자꾸만 다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서로가 자연스런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 게임은 도무지 안 되겠네요! 이런 식으론 얘기가 끝을 보지 못하

겠어요." 마침내 이것을 게임이라고 부른 한 참석자가 그만하자고 말했다. 나는 이 기억할 만한 식사 모임에서 우리가 나날의 대화에서 얼마나자기 중심으로 되어 있는지, 우리 삶 속에 얼마나 많은 ‘나‘가 있는지배우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 스스로도 대화 속에서 일인칭을 떼고 말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할 수 있는지실험해볼 것을 권한다. 여러분은 벙어리처럼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마련이다.
도대체 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우리는 우리 몸을 나의 것‘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 몸 속에서 살지만 몸이 곧 우리는 아니다. 우리 삶에서 내내 확대되고 중심을 이루는 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우리는 삶이라는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부분들이다. 유일한 실재는전체성 (oneness)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로서의 자의식이다. 몇몇 사람들만이 그 자의식에 눈을 돌리지 않거나 무관심하다. 우리는 과연 자기 중심(self-centered)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 자기 중심주의를 뿌리뽑을 수 있을까?
이제 나 자신도 똑같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음을 알고 있다. 회고록의저자로서 수많은 일인칭 대명사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최선의 삶을살고, 배우고, 사랑하고, 마감하는 것에 관한 이 이야기를 쓰면서 계속되는 나‘, 나‘, ‘나‘ 일인칭 단수대명사를 어떻게 이야기의 뒷전으로밀어넣을 수 있을까?
인도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강연자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Khrishnamurti)는 말년에 한 강연에서 경탄할 만하게 비인칭으로 말했다. 그 자신 또는 자신의 경험을 얘기할 때 나‘라는 말 대신에 ‘연사‘가이런 일을 했다거나 ‘연사‘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스코트는 자기 책이나 강연에서 나라는 말을 드물게 썼고, 보통 대화에서도 되도록 적게 쓰려고 애를 써서 나중에는 거의 쓰지 않게 되었

으며 대화 전체에서 공동체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중심에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이는 자기 손으로 땅을 파고 흙을 퍼내어수천 번 외바퀴 수레에 담아 농장으로 나르며 만든 연못도 언제나 ‘우리연못‘이라고 불렀다. 농장도 대부분 그가 심고 가꾸었지만 언제나 ‘우리 농장‘이라고 불렀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도 온갖 수고를 다 해지은 집인데도 그의 집이나 우리 집이 아닌 ‘헬렌의 집‘이라고 불렀다.
나는 개체적 자이를 넘어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속에서 살았으면 한다.
스코트나 나도 우리 책 속에서 우리의 내면 생활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우리 둘 다 대부분 대중의 눈에 드러난 삶을 살긴 했어도 눈에 띄지 않는 사람으로 있기를 더 좋아했다. 스코트가 자서전을 쓰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 사람은 자서전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서전을 쓰도록 설득하기 위해서는 대변혁을 겪은 한 세기에 걸쳐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역사적인 면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이는 정치적 성격을 띤 자서전을 썼다. 나는 무심코 그 중 여섯줄을 보았는데 보면 볼수록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 책을 스코트에게 바치면서 그이에 관한 추억을 더듬어보니, 우리가 만나기 전의 내 삶의 일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의 일부는크리슈나무르티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하지만 내삶은 50년 넘게 스코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왔으므로 이 책은 스코트에초점을 맞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내 삶에서 태양은 오직 하나이다. 크리슈나무르티는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또 그렇게 떠났으며, 곧 시야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사람은 10대에 내 눈을 부시게 하였으나, 잠깐동안의 에피소드로 그쳤다.
삶은 모든 사람에게 운 좋게 거머쥐거나 잘못 빠지기 쉬운 기회와 함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가능성의 그물망이다. 모든 존재, 모든 행위는거대한 현시 ()의 부분이다.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의 모든 순간을

통해 자신의 음표, 노래를 더해주며 이바지한다. 우리는 우리 삶을 꾸려감으로써 그 표적을 남기는 것이다. 지금부터 백 년 뒤의 세상이 어떻게되든지 우리들 저마다의 존재 양식, 행위, 생각에 어떤 부분이든 영향을받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와 형제 자매,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해온 남편 스코트 니어링과 나 자신이 함께 또는 따로 새겨온 표적들이 세상의 모습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다른 사람들의 삶, 그리고 아마도 이책을 읽을 여러분들의 삶에 영향을 미쳐왔을 것이다.
좀더 너그럽고 내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처음에는 이 이야기를 3인칭으로 썼다. 그런데 유능한 편집자들이 권고하기를 독자들과 가까워지고 다정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나에게‘, ‘나는‘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애썼지만 편안하지가 않았고 주제넘은 듯 여겨졌다. ‘나‘를 적어넣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나를 싫어하며, ‘나‘와 상관없이 남은 여생 (이 책을 쓰는동안을 포함하여)을 보내면 행복하겠다. 그래서 전문가의 충고를 따르지않고 헬렌과 스코트의 이야기를 ‘그 사람‘ 또는 ‘그들‘ 이라는 시점으로 거리를 두고 쓰기를 고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마침내 장애에 부딪쳐 나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1단 기어와 3단 기어를 왔다갔다하듯1인칭을 앞뒤로 옮겨가며 쓰는 방법을 택했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이 책은 이처럼 하찮은 개체성을 넘어서려고 애쓴 뒤의 ‘우리‘와 나‘에 관한 책이다. 내가 때때로 1인칭을 견디지 못하고 ‘그 사람‘ 또는 ‘헬렌‘을 쓰기 위해 3단 기어를 넣더라도 여러분들은참고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이 책 속의 열려진 창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짧은 만남이 소개되지만,
이야기의 주된 흐름은 스코트 니어링과 나의 관계, 우리의 닮은꼴 생활에관한 것이다. 이 책은 스코트와 내가 같이 쓴 다른 책처럼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공동작업, 농장생활, 식생활, 정원 가꾸기 또는 집짓기에 관한 보

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반세기 넘게 함께 하고자 애써온, 최선의 삶을 살고, 그 삶을 사랑하며 우리가 겪은 여러 가지 출발과 떠남에관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제목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 의 첫 단어Loving‘ 다음에 쉼표를 찍어야 한다. 
최선의 삶을 사랑하는 것(lovingthe good life)도 중요하지만, 
최선의 삶에 들어 있는 그 특유의 변할 수 없는 요소는 바로 
사랑(loving)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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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서관협회가 선정한 청소년 부문 최고의 책,
우주에 남은 마지막 책을 구하라!

요즘은 아무도 글을 읽지 않는다. 누가 굳이 글을 읽으려고 하겠는가? 마인드프로브 바늘을 머리에 꽂기만 하면 온갖 영상과 오락물이 뇌에 직접 복제되는것을!

책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백타임이라는때에 그러니까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사람이 다 잘살있었다는 백타임에나 존재했었다는 책! 대지진 이후 도시 구역이 이런저런깡패집단손아귀에 들어가고, 유전자조작으로 완벽하게 향상된 프루브들이 세상을 지배하기 전인 백타임에 존재했었다는 책!

내 생각엔 그 백타임이라는 것 자체가 진짜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그저 마음을 위로하려고 하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는 유전적으로 향상된 프루브이고 아빠는 구역의 보스인데 언젠가 나를 구하러 와서다 같이 에덴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그런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 그런 이야기는 뇌에 바늘을 꽂으면 되는 가상현실 게임에나 있는 일이다. 실제로는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난당해봐서 안다.

그런데, 사람들이 라이터라고 부르는 영감탱이를 만나고 말았다. 말도 안되게 엄청난 생각을 품고 있는 늙은이와 스파즈라는 좀 울적한 이름을 가진내가 힘을 합쳐 세상을 한번 바꿔보려고 했다.

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흥분해서 숨을 헐떡이며 그가 외친다.
"아름다운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이제 그 소녀를살려 낸 거야! 얼마나 훌륭한 이야기야! 얼른 그 이야기를 써야하는데! 자네가 무슨 일을 해낸 건지 알기나 하나? 내 이야기의해피엔드를 자네가 선사한 걸세!"
하지만 빈을 살린 건 내가 아니고 프루브들이에요."
내가 라이터를 일깨워 준다.
"게다가 에덴에 오자고 한 것도 내가 아니잖아요."
라이터가 고개를 젓는다. 그의 늙고 촉촉한 눈이 내 속까지 환히 들여다보는 듯하다.
"맞아, 우리 모두 자네를 도왔지. 나도, 라나야도, 심지어 작은얼굴 녀석까지도. 하지만 이 여정을 시작한바로 자네야. 자네가 감히 이 여정을 상상할 용기가 없었다면 아무 일도 해낼 수없었을 거 아닌가."
이 노인네가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진짜 영웅이 누구인지안다. 그건 나도 아니고, 심지어 용감한 라나야도 아니다. 진정한 영웅은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 다니는 하얀 수염이 난 노인네다. 아무도 읽지 않을 책에 이야기를 적는 것으로 세상을 바꿀수 있다는 믿음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버리지 않고 그 커다란 심장 속에 그 희망을 간직하고 다니는 이 노인네인 것이다.

기밖에 보이는 저런 초록색 물건들 같은 걸 말이야."
"풀이랑 나무 말이구나."
"좋은 이름이야. 평화로운 이름."
빈이 꿈꾸듯 말한다.
"풀과 나무."
라나야가 빈의 손을 잡고 유리창으로 간다.
"저건 홀로그램 풍경이 아니야."
라나야가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킨다.
"저것들은 진짜 풀과 나무야."
빈은 바깥 풍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쉰다.
"아름다워. 하지만 홀로그램 풍경과 다를 게 없어."
라나야가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묻는다.
"왜?"
"우리가 여기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지."
빈이 대답한다.
"그럴 수 있어? 내가 나으면 우릴 다시 돌려보낼 거잖아. 회색콘크리트에 산성비가 내리고 구역 폭력배들이 싸움을 하는 그곳으로."
라나야가 풀과 나무를 쳐다보다가 빈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그녀의 눈이 빛을 발하고, 치열한 표정이 떠오른다.
"방법만 있으면 보내지 않을 거야."

는 뜻으로 보인다.
"죄를 인정하는가?"
나이 든 지도자가 다시 한 번 묻는다.
라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언덕 끝까지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규칙을 어기는 일이라면, 그 규칙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많은 지도자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지팡이를 두드린다.
"설명을 해 보거라."
"저 사람들이 제 목숨을 살려 줬습니다. 그래서 저도 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 주고 싶었습니다."
"라나야, 자초지종을 설명하도록 해라."
지도자가 재촉한다.
"하나하나 꼬치꼬치 물어볼 수 없으니."
라나야가 지도자에게 절을 한 다음 말을 잇는다.
"라일라 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라일라 님이 앉아 계신 자리에 앉아서 라일라 님이 하신 일을 제가 이어서 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지요. 라일라 님만큼 잘할 수 있기를 소원할 뿐입니다."
"굳이 내 호감을 사려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다."
라일라가 잘라 말한다.

"그리고 이 보통 사람, 부모도 없는 소년, 모두가 천대하고 피하는 이 소년은 저를 구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죽어 가는 누이동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에덴으로 데려올 수만 있다면 그 누이동생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알고 제가 어떻게 그들을 외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프루브들 몇몇이 라나야의 말이 맞다는 듯한 소리를 내기는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저 소녀의 병은 우리가 가진 기술로 쉽게 고칠 수 있었습니다. 도시 지역을 휩쓸고 있는 전염병을 고칠수 있는 기술을 우리는 대부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도조차 해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병들고 죽는 것을 보고만 있고, 굶주리는 것을 방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구역이 불에 타들어 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과연 옳은행동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다고 저는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언덕에 앉아 있는 군중들로부터 야유가 터져 나온다. 라나야가 지나치게 과격한 발언을 한 것이다. 누군가가 소리친다.
"저들을 봐! 추하잖아! 괴물 같아! 멍청하고! 저들은 보통 사람들이야!"
라나야는 사람들이 소리치는 것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손을 들어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킨다.

다. 잘빠진 프루브용 택비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콘크리트상자 앞에 우리를 내려놓고 사라져 버렸다.
"오, 즐거운 나의 집!"
내가 처음 털었던 그 쓰러져 가는 상자를 보고 라이터가 그렇게 외친다. 이상한 건,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라이터는 자기 상자로 돌아온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다.
"사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에덴에서 살았어도 좋았겠지.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 그랬다면 내 얼굴에 미소가 떠날 날이 없었을 테고. 하지만 그랬다면 내 책을 끝낼 수 있었겠나? 인생이 완벽하다면 책에 쓸 만한 말이 하나도 없지. 한가롭게 노닐고, 다늙은 발을 깨끗한 물이 흐르는 시원한 냇물에나 담그면서 시간을 보내면 책에 쓸 말이 뭐가 있겠나? 작가한테는 도전이 필요하지. 우리는 투쟁과 쟁취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거든."
라이터는 내가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에 턱을 괴고 웅크리고있는 쪽을 살펴본다. 그의 작은 상자는 거의 텅 비어 있다. 책상으로 쓰는 낡은 나무 상자와 그가 ‘책‘이라고 부르는 두터운 종이 묶음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늙은이 냄새가 나는이곳이 나는 너무 싫다. 도시 지역 전체에서 나는 늙은 냄새와다 쓰고 버린 폐품 냄새, 그게 너무 싫어서 참을 수가 없다.
라이터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내 옆에 앉는다. 쭈그려 앉는 것이 어려웠는지 앉으면서 신음 소리를 낸다.
생각에 잠겨 숱 적은 자기 턱수염을 어루만지더니 마침내 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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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미운 오리 새끼를
우연히 만나면 이런 느낌일까
안쓰럽고 도와주고 싶지만 부리에 쏘일 것 같아
선뜻 손을 내밀기도 어려운

담담하게 외로움을 견디는 오늘의 우리에게표명희가 전하는 다정하고도 힘찬 위로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평범한 청소년들이다. 작가는 이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 낸다. 이주배경을 가진 학생이 20만 명이 된 한국 사회에서 친구 중 한두명은 이주 배경을 가지고 있을 테고, 네 가정 중 한 가정이상이 반려동물과 함께 살며, 한부모가족 또한 낯설지 않다.
우리 사회가 겪은 사회적 참사, 역사적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일이거나 이웃의 일일 가능성이 크다.
작가가 세밀하게 그려 낸 한국 사회의 현재가 너무 생생해서일까. 소설 속 인물 하나하나가 아파트 엘리베이터.
편의점 혹은 학교 복도에서 만난 친구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사는 현실을 돌아보게 되고, 공감하는 마음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김중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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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어머니는 "가난을 정면으로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이런 특이한 발랄함"을 치를 떨며 경멸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나‘는 "억센 푸성귀처럼 청청한 생기"(p. 13)에 넘쳐 있는이들과 어울려 살면서 가난을 "소명"으로 삼은 채 살아나간다.
가족들이 죽기 전부터도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번 것은 ‘나‘였다. 대학생 상훈이 ‘가난 체험‘을 위해 ‘나‘를 속이고 가난한 노동자 행세를 하며 동거 생활을 하는 기만적 행동을 하기 전까지
‘나‘는 살아남은 자의 긍지인 가난을 누구에게도 빼앗긴 적 없다. 그러나 그가 가난을 훔쳐간 후 "나에게 있어서 소명"(p.29)이었던 가난은 "무의미한 황폐" (p. 31)로 전락하고 만다. 상훈이 ‘나‘에게서 앗아간 것은 기실 가난만이 보증할 수 있는 삶을향한 ‘나‘의 매혹이기 때문이다.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버는 젊은 여주인공들의 ‘소녀 가장콤플렉스‘는 『나목』의 이경을 상기시키는 「공항에서 만난 사람」과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주인공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가장 뚜렷한 소녀 가장 캐릭터는 「환각의 나비」에 등장하는 두 딸 ‘영주‘와 ‘자연 스님‘이다. 둘은 전혀 다른 듯 닮은 인물들로,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생계를 담당해왔다. 어렵사리 대학의 전임 자리에 취직이 된 영주는 어린 시절부터 하숙집을경영하는 엄마의 동지였고, 처녀 보살로 이름났던 절집(점집)의 자연 스님(속명 마금이) 또한 어려서부터 "집안의 유일한 돈줄"(p.324)이었다. 지금의 절더는 6.25 난리 통에 부역을 한 어떤 가족이 몰살을 당했던 ‘흉가‘인데, 몰살당한 주인의 살아남

은 동생이 그곳에 터를 잡자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네가음흉한 계획을 세워 마금이를 그 집 잔심부름꾼으로 보낸 것이말하자면 ‘신의 한 수‘였다. 마네의 계획(?)대로 그는 열네 살의 마금이를 범하고 이를 안 마금네가 그를 협박하면서 마침내그 집은 마금이네 차지가 된 것이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의 주인공도 전쟁 중 오빠가 비명에 간 이후 후유증을 앓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미군부대에 취직하여 식구들을 부양한 경험이 있다. ‘나‘도 오빠를사랑했지만 "오빠를 따라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살고싶었다" (p.206). 어머니와 올케가 ‘나‘의 결혼 결심을 축하하기보다 괘씸하게 여긴 것은 ‘나‘의 노력으로 그사이 집안에 꽤 목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딸을 밑천으로 삼거나 딸의 적극적 도움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다소 무기력한 가족들의 모습은, 살아남은 이는 ‘명랑해도된다‘고 말하려는 작가의 반대편에 사뭇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러나 작가 박완서는 젊은주인공들로 하여금 죽음에 저당 잡혀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목』의 이경이 말한바 ‘미치지 않을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春秋

복원의 꿈

이제 우아하고 기품 있는 중년 및 노년의 인물들과, 생기와재미를 갈구하는 젊은 주인공들의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을 보자. 거기에는 왕년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신이 피폐해진 노인, 잔뜩 위축된 노인, 겉보기에는 고상하지만 위선을 일삼는 노인, 진실보다는 편의를 취하는 중년의 인물들이있다.
「침묵과 실어」의 주인공 정해철은 잡지사 주간인 동시에이류 작가이다. 편집회의에서 경영주의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를 무리하게 도출한 그는 자신의 비굴함에 괴로워하던 차에 윤상하 선생 댁을 찾아간다. 정해철은 "의식이 있는 침묵" (p.100)을 동경하되 실천은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상태이다. 그런 그가 오래전 윤상하 선생의 이름을 딴 ‘상하문학상‘ 수상을 거절한 적이 있다. 오랜만에 윤상하 선생을 방문해, 윤상하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으며 자신이 수상을 거부했던 예전 사건을 상기시켜 "노인의 노여움을 애걸" (p. 107) 해보러 한 것이다.
잡지사에서 무너진 자존심을, 자신이 썼던 멋진 수상 거부의 변을 떠올리면서라도 다시 세워보려는 속셈이다. 그러나 윤상하선생은 중풍에 실어증까지 겸한 환자가 되어 바보같이 "무진장흘러내리는 웃음" (p. 108)만 지을 뿐이다. 정해철의 입장에서윤상하 선생은 정해철 자신을 위해 끝까지 고약한 ‘친일 문인‘
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변명도 하고 증언도 하고 특히 자신을

향해 분노해야 했다. 윤상하의 실어증은 정해철의 ‘침묵‘을 한없이 비굴하고 나약한 지식인의 몸짓으로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다. 일제 말의 암흑기에 변절했던 윤상하와, 친체제적 편집장으로 살고 있는 정해철은 비루함을 공유한 중년과 노인의 어떤전형들이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의 경우에는 ‘나‘가 꿈꾸는 과거의 온전한 복원을 가로막는 대표적 세 인물이 등장한다. 해방기에 서대문형무소에 잠시 수감되었던 친구 혜진, 송사묵의 부인을 문전박대했던 백민세, 아버지 송사묵이 납북된 것이 아니라 사형당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체하는 장남. 이 중에서도
‘나‘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백민세 옹이다. 해방기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는 그 무엇에도 연루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가 "우아하고 고상하게 늙은 노인"(p. 189)으로 보임에는 틀림없지만그는 그런 얼굴을 하고 여전히 시침을 뗀다. "누구나 빠져나갈구멍 먼저 마련해놓고 있었다. 진실이 마치 함정이나 덫이라도된다는 듯이" (p.192).
고교 시절 박완서의 국어 교사였던 소설가 박노갑을 모델로한 작중 인물 송사묵‘은 부역자로 밀고당해 서대문형무소에서억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시절을 통째로 지워버리고싶어 하는 혜진이나 백민세 옹은 그렇다 쳐도, 아버지의 죽음을똑똑히 기억하는 장남까지 송사묵을 ‘납북자‘로 분류하는 데 왜

저항하지 않는가?

네에, 그거요. 납치당하신 것처럼 말하는 것 말이죠. 그건 우리 식구의 말버릇이죠. 사형이나 옥사보다 얼마나 듣기 좋아요.
[・・・・・・] 좋은 일에선 특별나고 싶을지 모르지만 나쁜 일일수록다수의 편에 서는 게 그나마 편하거든요. 일종의 자구책이죠.
불행해진 것도 억울한데 홀로 특별하게 불행해지는 거라도 면해보자는. (p.191)

자신의 가족사가 ‘특별한 종류의 불행‘으로 기록되는 것만은 막고 싶다는 장남의 발언에서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과연 ‘누구의 관점에서 어떻게 복원하느냐‘라는 무거운 질문이다.

복원에 대한 ‘나‘의 욕망은 실현되지 못하고 좌절된다. 그런데
‘나‘는 왜 그토록 진실 찾기에 목말라하는가?
박완서의 문학과 생애가 그에 대한 해답 찾기의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어떨까? 복원이란 ‘원래대로 회복함을 의미한다. 그
‘원래‘의 상태란 어쩌면 가까운 이들이 ‘흉한 죽음‘을 겪기 이전의 삶일 수도 있고, ‘흉한 죽음‘에 얽힌 억울한 사연 그 자체일 수도 있으며, 가족과 지인의 ‘흡한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남은 이들이 절실히 추구하는 생기 있는 삶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 책에 묶인 박완서의 소설들에는 복원의 꿈을 좇아 헤맸던 작가의 모습이 고르게 투영되어 있다. 인간은 시간과 마찰하면서늙고 병들지만 바로 그 때문에 빛나고 아름답다는 것이 박완서

문학이 던지는 하나의 메시지라면, 복원이란 그 마찰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마찰 ‘때문에‘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 연이어 던져진 메시지일 것이다. 허물어지는 것이 있기에 복원의 꿈도 생겨나는 법, 늙어가는 인간은 견고한 물건보다 우아하다. 소멸과 복원의 꿈을 동시에 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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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등골에 전율이 지나갔다" (pp. 48~49).
전율할 만큼 깊이 ‘나‘를 감동시킨 것은 노파와 여인의 기품이다. ‘살아남은 자‘는 과연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박완서만큼 집요하게 매달린 작가도 드물다. 박완서가 찾아낸 대답의 하나는 ‘긍지‘이다. 이 글 서두에서 언급된바 『나목』의 주인공 이경이 품었던 바로 그 욕망과 의지, 즉 "미치지 않을자신감을 박완서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골고루 나눠 준다. 노파는 고통스럽고도 엄숙하게 자신의 업보를 감당함으로써 여인은 그런 시어머니를 "힘껏 보필하는 이의 사명감과 긍지"로써, 살아남은 자의 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위엄 있는 삶의 발견은 그 자체로 ‘나‘에게 해방감을안겨준다. 이북에 노모와 아내를 남겨두고 빈털터리로 월남한무명 화가 남편, 그리고 그가 데려온 어미 없는 어린 딸을 평생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온 것이 "큰 허탕을 친 것처럼 억울하게여겨지고 "속아 산 것 같은, 헛산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던
‘나‘의 방황은 엄살일지 모른다(p. 37). 흉한 죽음이라는 역광속에서 비로소 고운 삶의 장면들이 어렴풋하게나마 드러나게되듯, 노파와 여인이 겪은 참상을 배경으로 한 넓은 화폭의 그림에서 ‘나‘의 번민은 그저 무심히 찍힌 점만큼이나 작아진다.
"너는 결코 헛살지만은 않았어. 암, 헛살지 않았고 말고"(p. 53).
「공항에서 만난 사람」의 경우에도 주인공의 기억 속 ‘무대소아줌마‘는 당당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하루하루의답답증을 주체 못 해"(p. 57) 나선 여행길에서 ‘나‘는 6.25사변

중 알게 되었던 ‘무대소 아줌마‘를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주인공이 미군 PX 점원 노릇을 하던 그 시절 한국인 PX 점원과청소부, 순경은 한패가 되어 물건을 밖으로 빼돌려 이익을 챙기는 동족끼리의 동업에 가담한다. 그때 가공할 만큼 많은 물건을옷 속에 숨기는 능력을 지녀 ‘무대소 아줌마‘로 불렸던 여인을중년이 된 ‘내‘가 다시 만난다. 기억을 더듬던 ‘나‘는 그녀가 얼마나 ‘당당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떠올린다. "그녀에겐 아무도흉내 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위엄 같은 게 있었다. 그녀의처지로는 얼토당토않은 거였지만 묵살할 수도 없는 거였다"(p.
68).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국군이라는 말을 "매우 엄숙하고 품위 있게" (p. 70) 할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다.
이렇게 입이 걸고 안하무인인 무대소와 우리가 오래도록 거래를 계속했던 것은 물론 그녀의 무대소스러운 유능함 때문도있었지만, 그 터무니없는 당당함에 압도당한 때문도 있었다. 그무렵엔 참으로 당당한 사람이 귀했다. 그녀가 거침없이 잘난 척하는 게 밉살스럽다가도 문득 부럽고 보배로워지는 걸 어쩔 수없었다. (p.71)박완서는 이처럼 결코 ‘그럴 것 같지 않은‘ 주변적 인물, 그러니까 참척의 아픔을 겪었거나 먹고살기 위해 한평생 발버둥 쳐온 여인들에게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품위와 당당함을

선사한다. 그 인물들의 보배로움은, 전쟁의 참상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어서 작가 박완서가 피로 물든 과거의 미로에서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이정표 노릇을 한다.
당당한 노인의 모습은 「환각의 나비」에서도 엿보인다. 주인공영주가 낳은 아이들을 한평생 돌본 어머니는 영주가 보기에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 "노인에겐 그 어렵고도 장한 일을 한이의 특권이랄까, 침범할 수 없는 당당함이 있었고, 아이들하고의 자연스러움은 거의 동물적이었다" (p. 303). 젊어서 과부가된 어머니에게는 원래부터 "당신 손으로 자식을 벌어먹이기 위해 일생 서서 일하면서 터득한 당당함"이 있었던 터다. 이 "어머니만의 자존심"은 아무도 능멸할 수 없는 그만의 세계이다(p.
305). 치매를 앓으며 아들네로 딸네로 정처 없이 떠돌던 어머니가 가출을 했다가 우연히 머물게 된 절집에는 다름 아닌 자신의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처녀 보살 마금이가 살고 있다. 어머니를찾아 헤매던 영주는 절집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모습에서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p. 338) 나비 같은가벼움과 자유로움을 발견한다. 노인의 당당함과 자유로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기쁨으로 번지는 듯 보인다.

살아 있음이라는 사건

폭우로 버스가 끊겨 ‘나‘의 집에 머물게 된 세 여인의 고백과그들에게도 결코 털어놓지 못한 ‘나‘의 비밀로 구성된 「빨갱이바이러스」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이 등장한다. "나는 마모도 소멸도 안 되는 것에 대한 병적이고도 비밀스러운 혐오감을갖고 있었지만" (p. 351). 이 구절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3)에서 ‘나‘가 형님에게 하는 말인 "생떼 같은 목숨도 하루아침에 간데없는 세상에 물건들의 목숨은 왜 그렇게 질긴지, 물건들이 미운 건 아마 그 질김 때문일 거예요. 생각만 해도 타지도 썩지도 않을 물건들한테 치여 죽을 것처럼 숨이 답답해지네요"라는 대사와 나란히 놓고 읽을 필요가 있다.
주인공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건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혐오스럽다. 반면, 썩거나 마모되거나 소멸되는 생명은 바로 그 때문에 매혹적이다. 현재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만이 점차 썩어갈 수 있다. ‘흉한 죽음‘의 덫에서 벗어나 긍지, 생기, 기품 등 인간의 생을 지속시키는 힘을 발견하고 관찰해온 작가 박완서는,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p. 217)에 사로잡혀 비非생명체를 혐오하는 인물을 작품에 등장시킨다.
말기 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남편과 그를 보살피는 주인공의 마지막 1년을 기록한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은
"그의 존재가 시간과 마찰하면서 빛을 내는 것처럼 빛나 보였다"(p. 203, 강조는 필자)라는 문장 하나만으로도 빛이 나는 작

품이다.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생명의 실체"(「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인 몸은 공간을 점유한 물건과 달리 시간을 산다.
시간과 마찰하는 몸은 늙고 병든다. 박완서가 노년의 삶을 반복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간과 마찰한 흔적으로서의 늙고 병든 몸이야말로 ‘흉한 죽음‘을 겪지 않아도 되었던 보배로운 생명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반복하건대 박완서 소설을통틀어 작중 인물이 겪는 가장 큰 사건은 ‘살아 있음‘이라는 사건이다. 가족과 지인이 당한 ‘흉한 죽음‘을 목격한 후 살아남은작중 인물들은 저마다 생기, 활기, 재미를 갈망한다. 물건 - 아닌 존재만이 추구하고 누릴 수 있는 생기, 활기, 재미는 변화를 그 속성으로 삼는다. 계속 활기에 차 있을 수도, 변함없이 즐거울 수도 없다. 박완서는 요컨대, 노화와 질병을 겪는다는 사실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특권이자 비할 데 없는 축복으로여겨질지 모른다는 삶의 진실을 ‘흉한 죽음‘의 역광 속에서 희미하게 그러나 매우 집요하게 드러낸 작가이다.
「해산바가지는 살아생전 치매에 걸려 주인공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인 ‘나‘의 출산 때마다 보여주었던 경건한 의식을 ‘나‘가 생각해내면서 새삼 시어머니의 "노추한 육체에 깃들었던 "아름다운 정신"을 그리게 되는 이야기이다. 연달아 딸을 낳은 며느리를 죄인 취급하는 한 친구를 만난후 주인공은 시어머니의 해산바가지에 얽힌 오래된 추억을 떠올린다. 손녀 손자 가리지 않고 "똑같은 영접을 해주었던 시어머니는 "어디서 배운 바 없이, 또 스스로 노력한 바 없이도 저절

로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경건하게 생명을 대하던 시어머니는 비록 ‘시간과 마찰하면서‘ ‘망가진 정신, 노추한 육체" (p. 148)를 갖게 되었지만 "임종 때의 그분은 주름살까지 말끔히 가셔 평화롭고 순결하기가마치 그분이 이 세상에 갓 태어날 때의 얼굴을 보는 것 같"(p.
149)을 만큼 고요하다. 박완서가 그려내고 싶었던 ‘고운 죽음‘
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반면에 시어머니, 올케, 그리고 ‘나‘
가 모두 공범이 되어 여아 낙태를 저지른 이야기를 다룬 「꿈꾸는 인큐베이터」에는 미처 세상 빛을 보기도 전에 ‘흉한 죽음‘을당한 어린 원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박완서의 글쓰기는 이처럼 전쟁 중에, 극심한 가난 속에서, 남녀차별주의가 미만해 있는 사회에서 ‘흉한 죽음‘을 당한 생명들을 애도하는 데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애도 행위는 살아 있음이야말로 가장 큰 사건이자 축복이라는 작가의 인식과 맞닿아 있다.

소녀 가장 콤플렉스

박완서가 살아남은 자에게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인물 유형은 소녀 가장들이다.
「도둑맞은 가난」의 주인공은 부모와 오빠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동반 자살한 이후 홀로 살아남은 미싱사이다. 주인공의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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