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으로, 타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동시에 다른 여성과 타자로서 동일시하게 되는 경험은 대단한 계몽의 순간이다. 그러나 계몽의 순간이 ‘앎‘의 끝은 아니다. 그다음 순간에 제기되는 질문은 최초에 제기되었던 질문과 경합하고, 또 질문들끼리 맞물려 더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교착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들 사이의 차이는 어떻게 볼지, 모든 남성이 평등하지 않을 때 남성과의 평등이라는 문제에서 누구와 평등을 추구해야 할지, 남성은 모두 가해자인지 등 많은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의 상황과 젠더 권력 관계의 절합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문제 제기 방식, ‘더 나은 해결을 위한 논쟁, 이론화 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쓰였다. 이를 위해 필자들은 현재 여성들이 직면한 이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젠더에 관한 기존의 시각, 사유 방식과 문제 제기의 틀 자체가 변화되어야 함을 제안한다. 다양한 필자들의 문제의식과 질문을 하나의 책으로 엮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이 책이 나오는 데 생각과 에너지를 보태준 권김현영, 김주희, 정희진에게 감사한다. 특히 페미니스트 지성 공동체에 대한 열정으로 이 책이 완성되는 데 최선을 다한 정희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녀 특유의 성실성, 필자 모두와의 우정과 신뢰가 이책의 탄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더딘 작업을 기다려준 휴머니스트 편집부에도 미안함과 감사함을 전한다. 2018년 6월 김은실
머리말 004 서장 페미니스트 크리틱, 새로운 세계를 제안하다-・김은실008 1장 성폭력 폭로 이후의 새로운 문제, 피해자화를 넘어•권김현영031 2장 여성이 군대가면 평등해질까: 신자유주의 시대의 병역과 젠더- 정희진 3장 성매매 여성 ‘되기‘의 문화경제055-・김주희 4장 신자유주의 시대 10대 여성의 자기 보호와 피해-・민가영077099
(5장) 여자 아이돌/걸그룹과 샤덴프로이데:아이유의 《챗셔>논란 다시 읽기-김신현경 6장 10대 여성의 디지털 노동과 ‘소녀성‘ -김애라 7장 저출산 담론과 젠더: 여성주의 비판과 재해석-서정애 8장 다문화 시대 이주 여성의 이름과 젠더-이해응주 21912141719
서장 페미니스트 크리틱, 새로운 세계를 제안하다 김은실 페미니스트 크리틱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여성‘과 관련한 지식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상징으로서, 규범으로서 정의되어왔던 ‘여성‘의 개념에 도전하고 균열을 내는페미니스트 크리틱(feminist critique)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그 의미가 획득되는가. 페미니스트는 어떤 방식의 언어와 글쓰기 양식을 가질 수 있으며, 그 글쓰기 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언어가 수행하는 담론의 권력은 어떤 맥락이 있을 때 작동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여성학 수업에서 세 명의 페미니스트를 ‘지금, 여기‘에 초대하곤 한다.
20세기 전반기, 여성 지식인으로 자신을 정체화했던 세 명의 페미니스트. 식민지 조선의 나혜석,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프랑스의 시몬 드 보부아르다.1
세 사람은 동시대에 살았지만, 역사적 공간은 달랐다. 나혜석은 일
제 식민지 공간에, 울프와 보부아르는 제국주의 침략을 주도하는 제국의 수도에 살았던 페미니스트다. 각자 다른 위치에 있던 여성들이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이후 더 나은 방식으로 젠더 정치를 비판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에게 생각을 여는 좋은 계기가될 수 있다.
1929년을 기점으로 세 페미니스트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자. 나혜석은 1929년에 유럽과 미국 여행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1929년에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을 쓴다. 1929년에 보부아르는 사르트르를 만나 계약 결혼을 하고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일하기 시작하며, 1949년에 <제2의 성》을 출판한다. 세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여성도 사람임을 주장한 나혜석은, 남녀가 불평등한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여성의 조건을 극복하여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면서 자신의 삶이 성 역할에 종속된 현실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사회를 향해 자신이 처한 삶의 곤경을 드러내는데, 그 형식은 자기 진술 혹은 자기 고백의 형식을 띤다. 신여성 나혜석은 결혼 전후로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근대적 인간은 남성으로 대표되기 때문에 나혜석은 남성과 동일시하며 여성도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결혼 이후에는 이전에 그토록 자신이 비판하고 떨쳐버리고 싶었던 ‘여성‘과 더 유사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자신과 구여성의 공통적인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2나혜석이 자신의 삶이 신남성보다 여성과 더 비슷하다는 인식과 자신이 ‘여자‘라는 구조적 조건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유럽과 미국 여행에서 서구 여성들을 보고 돌아와 이혼하고 난 후였다. 나혜석이 여성
의성 역할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또 답을 찾는 모든 출처는 바로 자신의 경험이었다. 나혜석은 그 경험을 거의 모두 잡지에 발표했는데, 그 길이는 몇 페이지를 넘지 못했다. 자기를 설명할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도, 여성의 삶을 설명하는 다른 참고문헌도 전혀 없었다. 나혜석은1948년에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2000년대 나혜석 전집을 읽는 한국 여성들은 나혜석의 고민과 현재 자신의 고민이 같다는 사실에 놀란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당시 영국 사회에서 남성 지식인들은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사서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많은 참고문헌을 사용하며 ‘논문‘을 쓰는 데 반해, 여성들은시간의 단속성과 장소의 불연속성 속에서 참고문헌도 필요하지않은 ‘소설‘을 쓰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개념화하고 논쟁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1년간 글을쓸 수 있도록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울프는 여성의 독립에 필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사유 능력과 자기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울프에게 ‘여성‘은 자신만이 아니라 이미 복수로 존재하는 같은 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기인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존재들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08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192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공화정이도래한 1880년대부터 1914년까지 조직적인 여성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제1차 세계대전, 경제공황, 전체주의, 제2차 세계대전 등의 혼란기를 겪고, 1930년대 파시즘이 국제 평화를 위협하게 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여성의 자리는 가정임이 재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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