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까다로운 아버지에 맞춰 밥상을 차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되풀이해서 말했다. 요양병원 침대에 누운 엄마를 보기만 해도 죄책감이 들었는데, 엄마는 ‘밥‘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곳이 좋다고 했다. 엄마는 음식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경제력이 없는 엄마는 자신이 자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 밥이라고 생각했다. 한 끼도 대충 차리지 않았다. 없는 돈으로ㅈ세끼를 준비하면서 늘 필수영양소가 제대로 들어갔는지를 따졌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우리는 그 흔한 석유풍로조차 없어 엄마는 연탄아궁이에서 세끼를 준비해야했다. 풍로를 들여놓던 날, 엄마의 기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풍로를 들인 기념으로 선택한 요리는 튀김이었다. 엄마는 여름에는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에 고열량 음식을 자주 먹어야 한다고 했다. 감자와 당근, 양파 말고도 쑥갓, 가지, 깻잎, 고추, 고구마 등 채소란 채소는 다 튀겼다.
우리가 좋아하는 오징어 튀김은 마른 오징어를 물에 불려 튀겼다. 아버지가 그나마 드시는 바다 것은 마른 오징어와 김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 P-1
돼지고기가 흔해진 뒤에는 채소뿐 아니라 돈가스와 탕수육도 직접 튀겼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며 돈가스 정도는 집에서 직접 튀겼지만, 다른 튀김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에어컨도 없는 한여름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 튀김을 하던 엄마의 수고는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마른 오징어와 김, 미역을 제외하고는 물에서 나는 모든 음식을 거부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한테 알레르기가 있는 줄 알았다. 나와 막내도 등푸른 생선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 말로는 알레르기라기보다 어려서 이유식을 할 때부터 생선을 강력하게 거부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위로 두 아들을 병으로 잃은 뒤였기에 아버지가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란 오기 전까지 아버지는 대니면 만성리의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누구도 아버지의 유아독존을 방해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은 그때 굳어졌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가 미웠다. - P-1
그래서 나는 독립하기 전까지 밥이 질다 되다, 반찬이 싱겁다 짜다 맵다 따위의 말을 한 적이 없다. 나 역시 아버지 못지않게 편식이 심한 편이었지만, 아버지처럼 밥상에서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직접 한 음식만 먹었고, 결혼해서는 오로지 엄마가 만든 음식만 먹었다. 엄마가 더는 요리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막내가 해주는 것만 먹었다. 아버지의 편식은 식이장애에 가까웠다.
딸들이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성격장애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태도나 성격을 분석해 보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섣불리 아버지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 성향이 강한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아버지는 과시하는 경향이 강하지는 않았고, 권력이나 부를 병적으로 탐낸 적은 없다. 그러나 아름다움, 이상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세상의 중심이 자기였고, 자신이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사랑했다는 엄마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아내가 우울증을 겪 - P-1
고, 신경성 위염으로 고통받을 때도 아버지는 엄마의 고통에 아파하기보다는 그런 엄마를 지켜봐야 하는 자신의 아픔에 더 집중했다.
엄마가 요양병원과 요양원에 있을 때도 고립된 엄마가 겪을 두려움이나 외로움보다는 사랑하는 아내의 결여로 인한 자신의 슬픔이 더 컸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일화를 들어보면 내 그런의심이 영 틀린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가난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것들에 관심이 없었고, 성장기 자녀들이 자신 때문에 고른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하는 것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해 첫 월급을 타ㅈ월급봉투를 내밀자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걸 보네?"
아버지는 늘 자신의 부족함이나 실패를 마주하지 않고 회피했다.
아버지가 시선을 두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스무살이 채 되지 않은 딸이 받은 월급봉투를 보지 않는 것도 당신의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도 큰딸이 월급날 사 오는 버터 빵을 먹을 때면 세상에서 - P-1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진짜 버터가 들어 있는 빵이 다 있구나. 이걸 얼마만에 먹는지 모르갔다." 나는 아버지가 기뻐하는 그 모습이 뿌듯해 월급날마다 빵을 사서 갔다.
빵을 사 가기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엄마가 말했다. "중미야, 이제 빵 사 오지 마. 네 아버지는 네가 그 빵 살 돈을 어떻게 버는지 몰라. 괜히 버릇들이지 마."
그때는 그 말을 하는 엄마의 깊은 속을 다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빵을 사 갔는데 얼마 뒤 빵집이 문을 닫았다. 더는 그 빵을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실망하던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아버지 덕에 우리는 방학 때 할머니 댁에 가지 않는 한 생선을 먹을 수 없었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엄마는 한창 자라나는 우리에게 단백질을 마음껏 먹일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밥상에 두부가 빠지지 않았다. 두부볶음, 두부부침, 두부조림, 두부찌개까지. 그래도 부족하다고 느끼면 아주 가끔 꽁치통조 - P-1
스무 살, 병원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집에 오면 오전10시 반쯤 되었다. 엄마는 항상 밥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렸다. 엄마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궁금해했고, 나는 밥을 먹으며 밤새 응급실로 들어온 환자들 이야기를 해주었다.
송림동 산동네에 살던 그때 엄마는 나를 통해 세상을 만났다. 나보다 어린 산재 환자, 돈 때문에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를 데리고 나가야만 하는 가난한 엄마, 병원비를 떼먹고 야반도주한 환자 이야기를 하면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 가난이 다 세상탓만도 아니고......." 가난이 세상 탓이 아니라 누구의 탓이냐고 물으면 엄마 역시 선뜻 개인의 능력 탓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 P-1
엄마는 내가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늘 불안해했다. 심지어 이런 시국에 내가 대학생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까지 했다.
서너 시간 자고 출근하기 위해 일어나면 엄마는 다시 밥상을 차려주었다. 자기 전에 먹은 아침이 소화되지 않았는데도 나는 저녁으로 차려진 그 밥상 앞에서또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내가 밥 먹는 동안 엄마는 남일에 나서지 말라고 때로는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며 살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살아서 지금 우리가 잘 살고 있냐는 말로 어깃장을 놓았다. 그런 갈등이 있던 날이면 엄마는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버스에 오르면 차창 밖으로 집에 돌아가는 엄마의 쓸쓸한 등이 보였다. 그러나 그때는 엄마의 외로움과 두려움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병원 수납처에서 대한민국이란 사회의 현실을 목도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첫딸을 낳았을 때 만석동 판잣집에 와 손녀를 봐주며 엄마가 말했다.
"나는 사실 그때부터 불안했어. 네가 사고 칠 것 같 - P-1
가난한 이들이 홀로 고립되지 않게 몸소 삶으로 연결망이 되어온 김중미 작가의 토대가 된 지난 시절의 고백들 - P-1
"엄마처럼 세상에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빈민 지역으로 들어갔다." - P-1
내장까지 비치는 투명한 글을 만나면 독자는 꿰뚫리고 만다. 글에 꿰여 널린 것처럼 읽는 내내 마음이 펄럭였다. 가난하고 여린 존재들의 곁을 지키려는 작가의 분투가 어디에 뿌리를 둔 것인지 자주 궁금했다. 사명감이나 책임감 같은 단색의 단어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이유를 그가 되살린 ‘엄마들의 시간을 따라가며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한국 여성의 역사 자체인 가족사와, 약한 사람들을 골라 힘자랑하던 불의한 시대와, 딸들에게로 몰려와 고이는 돌봄의 책임, 바스 - P-1
러진 노동을 태우며 질주하는 성장의 단면들이 이야기의 모퉁이마다 ‘사회적 기억들‘을 불러낸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고 엄마로 살았다는 감각만 남은 여자들의 쪼그라든 기억을 따라가며 작가는 그들의 삶을 찾아낸다.
소멸하는 기억 앞을 두 팔 벌려 막아선 이 에세이는 기억되지 않는 존재들을 잊지 않으려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한 문장 한문장 통과하며 가 닿은 끝에는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마다 다른 우리의 엄마가. 이문영 기자·작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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