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친절한 노동
아버지는 한평생 노동자로 살았다. 한국전쟁중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아버지의 첫 노동은 쥐약을 먹고 죽은 개의 사체를 찾아 동네 어른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죽은 개를 손질해 내장은 버리고 살코기를 몇 번이고 물에 씻어 삶아 먹었다. 들짐승도 없고 그렇다고 가축을 잘 키우지 않는 사대문 안 동네에서 가난한 이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큰 개의 사체를 찾은 날이면 아버지는 평소보다 몇 푼의 돈을 더 받아 쥐었다.
또 아버지는 동대문이나 청량리, 멀리는 창동까지 동네 아이들과 함께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나대지 같은 곳에서 일렬로 나아가며 쇠붙이며 유리 같은 것을 줍는 것인데 힘이 센 순서로 대열을 정했던 터라, 앞에 선 아이가 큰 고물을 줍 - P-1
는 반면 뒤편의 아이들은 잔챙이를 줍거나 그마저도 건지지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1965년 아버지는 메리야스 공장에 취직을 해 10년 넘게 일한다. 평시에는 2교대로 근무하고 일감이 떨어지는 단오부터 가을까지는 무급휴가를 주는 곳이었다. 전태일 열사가인근 평화시장에 찾아든 것이 그 이듬해이니 꼭 아버지로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나는 당시 그곳의 노동 환경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서른 무렵부터 구청 기능직 공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의 삶은 조금 깊이 말하고 싶다. 아버지는 환경미화원들이 동네 골목을 돌며 리어카로 수거해온 생활쓰레기를 트럭에 싣고 난지도 매립지를 오갔다. 그때는 나도 종종 따라나선 적이 있다. 어린 눈으로 보았던 난지도는 사막같았다. 커다란 쓰레기더미들이 사구처럼 하루에도 몇 개씩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광활하고 삭막한 난지도의 풍경보다 더 선명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던 넝마주이들이었다. 넝마주이들은 난지도 입구에서 호객을 하듯 아버지의 트 - P-1
럭을 불러 세웠다. 이미 큰 산이 되어버린 그곳을 걷지 않고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해가 질 무렵 그들은 다시 아버지의 트럭을 얻어 타고 경사진 길을 내려왔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나선 날이면 넝마주이들은 낮 동안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로봇 장난감 같은 것을 내 손에 쥐여주곤 했다. 하나같이 팔이나 다리 한쪽이 떨어져나간 것들이었다. 언제 한번은 한쪽 눈이 없는 봉제 인형을 건네받은 적도 있었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작은 단추로 없었던 인형의 한쪽 눈을 만들어주셨다.
2002년이 되자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난지도는 생태공원이 되었으며 넝마주이들이 살던 상암동에는 월드컵경기장이 지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아버지는 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즈음 나는 어린 시절 보았던 난지도의 풍경을 찾아보려 관련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1978년 생겨난 난지도 매립장은 1992년 영구 폐쇄되었다. 90만 평의 부지 중 실제로 쓰레기를 매립 · 매축할 수 있는 면적은 55만평 정도였다. 다시 이것은 서울 시내 각 구청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20만 평의 땅과 청소대행업 차량들이 쓰레 - P-1
기를 버리는 35만평으로 분할되었다. 재건대원이라 불리기도 하던 넝마주이들은 약 3천여 명까지 불어났다. 여러 이들이 개입하면서 고물을 줍는 것에도 권리금이 생겨났는데 강남구, 종로구같이 상류층이 주로 거주하는 동네가 두배정도 값이 더 나갔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날 아버지는 평소 잘 들어오지 않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시험을 치르지 말라고 했다. 내일 시험을 보면 대학에 갈 것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을 공산이 큰데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무 불행하고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욱이 가족이 생기면 그 불행이 개인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번져나가므로 여기에서 그 불행의 끈을 자르자고 했다. 절을 알아봐줄 테니 출가를 하는 것도 생각해보라고도 덧붙였다. 당시 나는 그길로 신경질을 내며 아버지에게 나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과 삶에 지친 날이면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설핏 가난을 느낄때면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말을 생각한다. - P-1
근대 이후 민간이 해야하는 노동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관념적으로는 꽤 신성한 가치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특히 누가 해도 비슷한 수준의 결과를 내는 노동의 작품들은 한없이 친대받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노동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놈인사를 쓰니 나는 여러 빈 아버지의 노동을 작품 속에 등장시켰다. 시에서 아버지는 진혜증으로 죽은 태백의 광무로 등장하기도하고 마을버스와 덤프트럭을 묻기도 하며연탄을 나르거나 실직 후 마주에서 혼자 살고 있는 알고옴독지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어떤 것은 사실이고 어던 것은 사실이 아니다.
한번은 태백에 살고 있는 한 독자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자신의 아버지도 광부로 살다 진폐증으로 돌아가셨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편지였다. 반가움과 슬픔이 함께 묻어나는 그 편지에 대한 답서를 적었다. 편지의 말미에는 아래와 같은 글을 적었다. - P-1
죄송한 일이지만 저희 아버지는 사실 광부로 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건강히 계십니다. 태백과 광부가 등장하는 시는 몇 해 전 광산에 대한 글을 청탁받고 취재를 하며 구상한 것입니다. 취재를 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갱도 일을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광부들이 모두 웃고 있던 것입니다. 소리 내어 웃는것은 아니지만 미소를 지으며 드러내 보이는 흰 이가 참 환했습니다.
제가 왜 웃고 계시냐고 물었을 때 그 분들은 당연하다는듯이 일이 끝났으니 웃는다고 답했습니다.
광부의 삶과 저희 아버지의 삶은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하루 일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그렇고 생의 대부분을 노동과 다음 노동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수면욕, 식욕 같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만을 채우기 급급하다가 나이가 들어 병을 얻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기약 없는 자신의 삶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한번 시작된 일의 끝은 너무도 잘 알고 - P-1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내용을 사실처럼 적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여러 사실들을 모아 희미하게나마 진실의 외연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죄송한 마음을 드립니다. - P-1
어느 모임의 저녁 자리에서 연세가 지긋한 한 분을 만났을때의 일이다. 시작은 역시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그분의 말은 달랐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한창 힘들 때겠어요. 적어도 저는 그랬거든요. 사랑이든 진로든 경제적 문제든 어느 한 가지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지요. 아니면 모든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거나. 그런데 나이를 한참 먹다가 생각한 것인데 원래 삶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겠더라고요. 다만 점점 내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나이 먹는일 생각보다 괜찮아요. 준이씨도 걱정하지 말고 어서 나이드세요." 충격이었다.
자신의 과거를 후회로 채워둔 사람과 무엇을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간에 어느 한 시절 후회 없이 살아냈던 사람의 말은 이렇게 달랐다. 될 수 있다면 나는 후자에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이 역시도 쉬운 일은 아니겠다. 사실 내가 가장 자주 하는일 중에 하나가 바로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여전히 나는 후회와 자책으로 삶의 많은 시간 - P-1
글의 앞머리에서 아버지의 세발자전거를 잠깐 이야기했었는데요. 그때가 1953년이나 1954년 즈음입니다. 당시 며칠씩 생으로 굶던 처지의 어린 아버지가 갖기에는 값비싼 물건입니다. 그 자전거는 사실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한 물건이었습니다. 며칠씩 울기만 하는 아들이 불쌍했는지 할아버지가 선물해 준 것이지요. 분명 자전거도 좋았겠지만 ‘엄마‘라는 것이 무엇으로 대신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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