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편지
아버님 어머님께.
4월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이곳의 개나리는 쌀알만한 꽃봉오리를 달고서 벌써 2주째 태연자약하게 봄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꽃을 피울 기온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연의 섭리를 체득하고 있는 생명에게서 기다림의 여유를 배웁니다. 어머님 편지 21시까지 잘 받았습니다. 2년 반 동안 172통의 어머님 편지를 받았습니다. 깊은 사랑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1968년도 늦가을, 부산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깨알 같은 펜글씨로 ‘부중입학‘이라는 기원을 노트표지 가득히 채우시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제나 저제나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아버님 어머님의 사랑과 정성과 염려와 기도가 큰 뒷받침이 되었음을 징역살이를 정리하며 새삼 느끼 - P-1
게 됩니다. 172통의 편지가 말해주듯이 지속적인 관심과 염려 덕분에 알찬 생활을 이제 마무리하고 건강한 모습으로나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월 면회 시에, 출소하면 바로 하향하여 계속 부산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도 간략히 답변드렸지만 그후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함께 살자고요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며 자식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모님의 염려와 희망 모두를 잘 이해할수 있으며 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 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제가 서울이나 인천에서 어떤 장사를 하는 처지였다면 저는 부산에서 함께 살기 위해 가게를 처분하고업종을 바꿔서라도 내려갔을 것입니다. 제가 의사라면 병원을 옮겨 부산에서 개업하며 부모님을 모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의 처지에서 부산에 내려가 산다는 것은 제가 그동안 젊음과 정열을 바쳐가며 노력해왔던 일, 바로 저의 직업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면서 동시에 한 인격체로서 자신의 인생함로를 분명히 해나가는 두가지 일을 조화시켜 둘 다 이뤄낼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날 제가 드린 답변도 바로 이런 취지에서였습니다. 물론 저는 형식적으로 도 - P-1
리를 지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화목하게 오래오래 동고동락하며 생활하는 것은 그 실현 여부를 떠나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희망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로 부산에 내려와 살자는 말씀을 들으며 다른 한편으론 큰 아픔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수십년간 자신의 정열과 노력을 다 바쳐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피아니스트가 당장 피아노 치는 일을 그만두고 시골에 내려와 농사를 지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음악세계에 대한 이해도 실성한 일이지만, 37살 먹은 피아니스트에게 직업을 바꾸라는 얘기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 나이가 될 때까지 해온 일을 아주 고는 일이라 규정하는 것과 다를 바 있습니다. 이제까지 헛살았으니 이제부터 다른 일하며 바로 살라는 얘기입니다. 바로 저를 체포한 수사관들이 그랬습니다. 검사도 그렇고 유죄를 선고한 판사 역시 그랬습니다 정치범이 한경 명도 없다는 노태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모두 저에게 해주한일 그만두고 만일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실제로 검사는 반성문을 쓰면 바로 내보내주겠다고 얘기했었죠. 제가 한 일이 정당하고 올바르다고 믿기에 저는 반성문 쓰기를 거부하고 대신 2년 6개월의 징역살이는 택했습니다. 그간의 징역생활을 여유있고 안정된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단 한순간도 - P-1
후회하거나 신세를 한탄하는 일이 없이 꿋꿋하고 낙천적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가족·친지들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도 도움이 되었지만 그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제가 한 일에 대한 확신, 그 정당함에 대한 자부심 이런 것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은 하루를살아도 지옥을 경험한 것처럼 싫어하는 징역살이를 웃으며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달리 인내심이 강해서 참은것이 아닙니다. 이만한 고생은 오래전부터 각오했던 일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이기에 고생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영광스런 일, 보람된 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인간이 인간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을 근절시켜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런사회운동, 정치운동을 펼치는 것이 바로 저의 직업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상한 사상에 물든 결과가 아닙니다. 의롭게살아야 한다. 불의와 싸우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개인의출세나 영달보다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살아야 한다.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옳은 일을 위해 싸우는 사람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제가 초등학교에서부터대학교에 이르기까지 개근상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면서 - P-1
배운 내용이며 또 그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온 것들입니다. 간혹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어머님께서 그리 간절하게 제가 좋은 학교에 입학하길 원하실 때 어머님께선 제가 그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사람이 되길 바라셨습니까? 저는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바로 20년 전 1972년 2월,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시는 어머님을 뒤로 하고 정든 집을떠났습니다. 그날 기차가 낙동강변을 거슬러 올라갈 때 붉은 태양이 강물을 비추며 서쪽으로 지고 있었습니다. 그 태양을 보며 저는 맹세했습니다. "객지타향에 가더라도 한눈팔지 않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력하여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볼 때 보다 더 열심히 살지 못한 점들이 반성되고부모님을 보다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점이 가슴 아픕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 제가 다짐한 대로 정도만은 곧게 걸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계속이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편하게 사는 길들도있다지만 저는 그런 인생의 길에선 아무런 살 의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비록 힘든 길이긴 하지만 그간의 노력으로 저는 일정한 역량을 쌓았고 또 남달리 이런 일에 재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고생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부모님께서도 염려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다른 사람이 보는 것보다는 덜 힘들며 무엇보다도 의롭고 - P-1
보람된 일이며 다른 사람들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처럼 오랫동안 마음먹고 노력해왔으며 또 재질을 가진 사람들이 앞장서서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학생들이 오직 정의감 하나 갖고 앞뒤 가리지 않고 화염병을 던지거나 밀가루를 뒤집어씌우는 것과는 질이 다릅니다. 현실적 조건에 맞춰 합리적이고 현명한 방법을 찾아나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직업과 그것에 대한 저의 생각을 널리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먼 길에서 돌아온 아들을 불을 끄고 글씨를 쓰게 한 후 아직 멀었다며 바로 쫓아낸 한석봉의 어머님처럼 제가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불의와 타협하지는 않는지, 성실하게 일하는지를 관심을 갖고 채찍질해주시기 바랍니다.
훗날 후손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했으나 이 나라와 민중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남겨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모님의 이해와 격려는 제가 이 세상에서 뜻을 펴고 또 사회에기여하는 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저 역시 자식된 도리를 다하면서 또 저의 직분을 다하는데 진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맹장 아래 약졸 없듯이 강한 부모 밑에 약한 자식 없을 것입니다. 보다 강하게이 험한 세파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타의에 의해 강제된 징역생활이었지만 인생에 유 - P-1
익한 시간으로 활용함으로써 결국 승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지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승리한 사람들답게 웃는 얼굴로 만나기 바랍니다. 또 늘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도록 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게 되는데 아버님께선 이곳까지 안 오셨으면 합니다. 제가 찾아가서 뵙는게 도리일 듯싶습니다. 어머님께선 멀미 예방약으로 ‘귀밑에‘ (붙이는 약 이름)를 이용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1992년 3월 25일 회찬 올림 - P-1
우리는 직장 동료입니다
여러분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갑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이전 17대 국회 때 현역 의원 중에 제가 제일 먼저 제안했는데, 그때도 함께하셨던 분 계십니까? 한분 계시네요. 그리고 19대 때는 본청 귀빈식당에 한번 모셔야겠다. 해서 그곳에서도 식사를 같이 했었습니다. 이런 행사는 저희가 사진 몇 장 찍으려고 형식적으로 하는것은 아닙니다.
저희 정의당 의원들은 여러분과 같은 공간, 국회라는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입니다.
비록 맡은 바 업무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국민을 위해 한공간에서 일하는 동료라는 의식을 저희는 늘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20대 국회가 시작되는 오늘 첫 행사로 여러분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은 여러분이 늘 직장 동료라는 점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 P-1
우리나라 곳곳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여러분과 같은 처지의 많은 분들이 저희가 누구보다도 먼저 생각하고 대변해야 하는 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소 어색하고, 다소 불편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저희의 진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과 진심이 잘 통하기를 바라고 저희가 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옆에서 같이 깨우쳐주시기 바랍니다. 또 여러분이 일하는 동안 겪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 저희가 저희 일로 생각하고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원래 쓰던, 여러분들의 노조가 쓰던 공간이 잘 유지되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도록 또 저희가 노력할 것이고요. 혹 일이 잘 안 되면, 저희 사무실 같이 씁시다. 그냥 공동으로 저희 정의당이 국회에 있는 한 여러분들이 외로워 - P-1
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원내대표로서 약속드리겠습니다. 오늘 식사 맛있게 하시고, 종종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5.30, 국회 청소 노동자와의 오찬 간담회 인사말 - P-1
고(故) 노회찬 의원의 20대 국회의 첫 공식 일정은 다름 아닌 국회 청소 노동자들과의 식사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직장 동료입니다‘라는 담담한 한마디에는 그가 꿈꾼 정치의 많은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매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면 청소 노동자들에게 장미꽃을 건넸고, 국회사무처가 휴게 공간을 비워달라고 요구하자 "그럼 저희 사무실 같이 씁시다"라고 손 내밀던 사람이었습니다.
2018년 7월 27일, 그의 국회 영결식 날, 작업복을 입은 국회 청소노동자들이 국회 앞 운구차 길목에 조용히 도열했습니다. 평소 자신들을 진심으로 대해주었던 단 한 사람의 정치인을 보내며, 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군가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존중했던 노회찬이라는 이름이 왜 그토록 오래 가슴에 남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이 인사말을 책에 싣는 이유는, 정치가 누구 곁에서 시작해야 하고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 글은 20대 국회의원 노회찬 의원의 ‘처음‘이었고, 또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마지막‘이기도 합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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