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몇해 전 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에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할 지인의 목록을 미리 적어 나에게 건넨 일이 있었다  금기형, 박상대, 박상미, 신천식, 샘말 아저씨, 이상봉, 이희창, 양상근, 전경선, 제니네 엄마, 제니네 아빠, 채정근, 몇은 일가였고 다른 몇은 내가 얼굴만 알거나 성함만 들어본 분이었다
"네가 언제 아버지 뜻을 다 따르고 살았니?"라는 상미 고모 말에 용기를 얻어 지난 봄 있었던 아버지의 장례 때 나는 모두에게 부고를 알렸다 빈소 입구에서부터 울음을 터뜨리며 방명록을 쓰던 이들의 이름이 대부분 그 목록에 적혀 있었다 - P-1

귀로

듣고 싶은 답을
떠올리며 내가 물었다

생각대로 당신은
내가 바라던 답을 들려주었다

하나의 답을 정한 것은 나였고
무수한 답을 아는 것은 당신이었다

원망은 매번
멀리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 P-1

「마중도 배웅도 없이]는 조용히 다가와 오래 머무는 언어들로 채워져 있다. 관계의 거리감,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고, 말하지 못한 감정들의 잔여를 섬세하게 떠올린다. 

이전의 시집들이 상실과 그리움, 그 곁의 사랑에 대해 온건하고 단정한 언어로 이야기해 왔다면 이번 시집은 그 감정의 결을 더욱 구체적이고 서사적인 장면들로 드러낸다. 장면들 속의 마음은 느슨한 문장들로 묶인 채 더욱 깊이 고여 있다. 문장 사이의 공백과 쉼, 비워진 자리를 응시하는 일은 지나간 마음의 흔적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한 사람의 일기처럼 읽힌다

이번 시집은 단지 감정을 전하는 ‘문장‘이 아니라, 정직하게 한 시절을 건너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태도‘로까지 확장된다. 
삶의 표면을 넘지 않으면서도, 가장 깊은 데까지 가 닿는 언어의 온도, 박준은 이제 ‘말을 고르는 시‘에서 ‘말이 지나간 자리를 들여다 보는 시‘로 옮겨 왔다. 그리하여 이 언어들은 감정이 머물렀던 자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중도 배응도 없이』는 누군가를 기다리다 끝내 보내지 못한 사람, 보내고도 여전히 기다리는 사람, 그 모두를 위한 시집이다. 

이 시집은 독자의 슬픔을 위로하려 들지 않는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함께 앉아 조용히 등을 내어주는 시집이다. 박준은 언제나 덜 말하는 방식으로 더 많은 울림을 전해왔다.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말하지 않은, 그러나 너무나 많은 말들로 넘실거리는 그 모든 여백일 것이다.
이제니 시인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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