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용기, 억압과 자유, 상처와 치유
삶과 문학의 영원한 화두에 관해 이야기하는 고전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희망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어리지만 사자왕처럼 용감한
요나탄과 칼 형제의 분투는 인간이 왜 끝까지 타인의 존재를 믿어야 하며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세계를 구해야 하는지 해답을 보여 준다. 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 - P-1

책등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았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198~99면)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난 서울의 여름, 이상한 열정으로『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있는 열두 살의 내가 있다.
그건 평범한 동화책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서는 놀랍게도 처음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부엌의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픈 소년 칼에게, 그를 사랑하는 형 요나탄이 말한다. 네가 죽으면 하얀 새가 되어 나에게 돌아올 거야. 나는 너를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얼마 뒤 집에 불이 나고, 칼을 업고 뛰어내린 요나탄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과연 하얀 새가 되어 창가로 날아온 요나탄이 들려준 말대로,
뒤이어 병으로 숨을 거둔 칼은 낭기열라라는 아름다운 세계에서 건강한 몸으로 다시 눈을 뜬다. 그러나 그곳은 아름답기만 한 세계가 아니다. 들장미 골짜기의 텡일이라는 무자비한독재자가 괴물 카틀라의 힘을 등에 업은 채 사람들을 지배하 - P-1

고 핍박한다. 이웃한 벚나무 골짜기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에게 맞서는데, 요나탄은 ‘사자왕‘이라는 그곳에서의 별명대로 용감하고 순정하게 자신의 몫을 다해 싸우는 중이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 싸움의 과정에서 연약하고 겁 많은 칼이 서서히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
‘사자왕 칼‘이 되어 가는 모습이었다.

 일인칭 화자인 칼이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았으므로, 처음부터 나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그를 이해했다. 형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사랑과 믿음,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 그리고 두려움과 떨림까지.
거기에 더해, 칼이 관찰하는 독재자 텡일의 모습, 그가 조종하는 살인의 화신 카틀라, 그에 맞서 연약한 사람들이 연대하는 과정이 어째서인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들이 결국 승리하기는 하지만, 그 싸움의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반군의 지도자 오르바르만은 울지 않는다. 그 대목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불길한 예감을 기억한다. 그 어두운 예감과 폭력의 기억으로 그늘진-그러나 동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세계, 낭기열라에서 소년들이 다시 죽음의 형식으로 함께 떠나가는 마지막 - P-1

장면을 읽다가, 어느새 해가 져서 캄캄해진 내 방의 서늘한 벽에 기대앉아 오래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서로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들의 사랑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잔인한가?

그 후 삼십여 년이 흘러, 오슬로로의 여행을 앞두고 이 책을다시 완독한 지금에야 비로소 내가 왜 연도를 착각해 왔는지 깨달았다. 나의 내면에서 이 책이 80년 광주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1980년 아홉 살의 내가 문득 생각했던, 그 여름을 이미 건너지 못했으므로 그 가을로도 영영 함께 들어갈 수 없게 된 그 도시의 소년들의 넋이, 그로부터 삼 년 뒤 읽은 이 책에서 두 번의 죽음과 재생을 겪는 소년들에게로 연결되어 내몸속 어딘가에 새겨졌다는 것을. 
마치 운명의 실에 묶인 듯, 현실과 허구, 시간과 공간의 불투명한 벽을 단번에 관통해서.

2.
2012년 겨울부터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내면의 투쟁을 치르고 있었다. 인간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에서 인간의 존엄을 증거하는 자 - P-1

료들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광주는 더 이상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극단적으로 공존한 시간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가 되어 있었다. 신대륙의 학살,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관동과 난징의 학살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잔혹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그 폭력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연약한 몸짓들에 대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월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하고 있는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 먼저 이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 촛불을 밝히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하고 싶었다. 촛불의 불꽃의 중심을 통과하여, 삼십여 년을 건너 우리에게 오는 넋들의 - P-1

걸음걸이를 생각했다. 그 불가능한 재생을 단 한 순간이라도 가능케 하고 싶었다. 열다섯 살에 그곳에서 죽어 여름으로 건나오지 못한 소년 동호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다만 애도하고 온 힘을 다해 존엄에까지 가자고 결심은 했지만. 「소년이 온다」를 써 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스스로 흔들리곤 했다. 

4장 ‘쇠와피‘ 같은 경우에는 내가 흔들리며 회의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소년에게 매달렸다. 
그가 나를 밝은 쪽으로 이끌고 가기를 바랐고, 실세로 그에게 끌려가듯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했다. 
그러므로 만일 지금 누군가 나에게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폭력보다 먼저, 인간의 참혹보다 먼저, 6장에서 어린 동호가 엄마의 손을 잡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고 느낀다.

그 마음으로 에필로그에 이 대목을 썼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얻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 P-1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 안에 기득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벌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진 생의 깃 같은 존엄을 기억해 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 P-1

밖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폭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212~13년)

3.
고백하자면, 사자왕 형제의 모험과 그 소년들을 거의 잊은 채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어린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책들 중 한 권이라는 사실 외에는 실상 많은 것이 희미했다. 

그러니 당연히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이 오래된 책을 기억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삼십여 년이 흐른 뒤 다시 읽게 된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불꽃에 손바닥을 덴 것처럼 놀라며 깨달았다. 
열두 살의 내가 어두워져 가는 방의 벽에 기대앉아 이 책을 쥐고 무엇이 내 눈과 목구멍을 뜨겁게 하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의 의미를 그 - P-1

질문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생생히 살아 어른어른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사랑하는가?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그 열두 살의 나에게, 이제야 더듬더듬 나는 말할 수 있을것 같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는 거라고. 
존엄을 믿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우리의 고통이야말로 열쇠이며 단단한 씨앗이라고.


한국어로 번역된 린드그렌의 평전을 이어 읽다가, 생전의 작가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의 뉴스들에 유난히 민감했으며 진심으로 고통스러워했다는 대목을 발견하고 나는 조용히 짐작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그녀의 고통이 이 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 배음으로 깔려있다는 것을. 
열두 살의 내가 비밀로서 품고 있었던 어렴풋한 사랑과 고통이 먼 시간과 공간을 건너 그녀의 사랑과 고통에 잠시 맞닿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거의 불가능한 방식으로 때로 우리가 만남을 경험하는지도 모른다고. 그 경험이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우리들의 심장과 목구멍에 눈물이 고였던 눈에 뜨겁게 새겨지기도 하는 것이리라고. - P-1

허락된다면, 린드그렌의 이 아름다운 책의 한 대목을 읽으며 나의 이야기를 마치고 싶다.

우리는 시냇가 푸른 잔디밭에 누워 있었습니다. 텡일이라든가그 밖의 끔찍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차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침나절이었습니다. 햇살은 맑고 따스했습니다. 어찌나 조용한지 들리는 거라고는 약간씩 거품을 일으키며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푸른 하늘 군데군데 흩어진 흰 구름을 바라보며 행복한 기분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근심 걱정 없이 즐거운 기분이었는데 요나탄 형이 뎅일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
"스코르판, 잠시 동안 너 혼자 기사의 농장에 남아 있어야겠어. 나는 들장미 골짜기에 다녀와야 하니까."
요나탄 형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혼자는 단 일 분도 기사의 농장에서 살 수 없다는 걸 형은 정말 모르는 걸까요? 만일 형이 탱일의 소굴로 가면 나도 따라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요나탄 형이 아주 야릇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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