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인간 김홍도, 열세 살 아들의 천진하면서도 가감 없는 시선으로 다시 태어나다!
"그림은 붓으로 그리는아니다. 네 마음을 쪼개 그 조각으로 그리는 것이다. 너만이 듣고 볼 수 있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그것이 쉽겠느냐? 그래서 사람이 일평생 그릴 수 있는 그림에는 한도가 있는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내 그림을 얼마든 흉내 내팔아도 좋다. 하지만 그런 그림을 그리는 너는 화가는 아니다. 내 말, 알겠느냐?" "네. "연록아, 내 다시 묻겠다. 정말로 그림을 그리고 싶으냐?" 나는 아버지의 질문에 답하지 못합니다. 네, 라고도 못 하고 아니요, 라고도 못 합니다. 그저 바닥에 머리 붙이고 눈물만 쏟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잊어라. 내 그림을 잊어라." -본문에서
김홍도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40대 후반에 얻은 아들, 김양기가 있었습니다. 늦게 얻은 아들인 까닭에 김홍도가 세상을 떠났을 때 김양기의 나이는 열넷 내지 열다섯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김양기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소년은 어떻게 어른이 되었을까요? 내가 궁금한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의 주인공은 김홍도가 아니라 김양기입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가 아니라 무명에 가까운 그의 아들 김양기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입니다. 「작가의 말」에서
"선왕께서는 달을 무척 좋아하셨나 봅니다." 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봅니다. 아버지는 허허 소리내어 웃습니다. "그렇다. 네 말대로 선왕께서는 달을 무척 좋아하셨다. 스스로를 달이라고 생각하셨다.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달, 온 천지를 비추는 말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셨다. 그래서 선왕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人)이라는 호를 스스로 지으셨지." 만천명월주인옹, 듣기만 해도 마음이 저절로 포근해지는 이름입니다. 세상 모든 물을 비추는 하늘의 밝은 달, 그리고 그 주인인 할아버지! 너그러운 시선으로 온 세상을 굽어살피는 인정 많고 세심한 할아버지! 나중에 나는 정조 임금님이 오십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정조 임금님의 성격이 포근하기는커녕 엄하고 까다로웠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도「월만수만도」를 통해 얻은 정조 임금님에 대한 내 첫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조 임금님은 그림 한 점으로 나에겐 언제나 포근하고따뜻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지금 세상에도 달은 있으나 그 달은 이전의 달이 아니다. 한때 달은포근했으나 지금은 냉랭하다. 포근하지 않고 냉랭하기만 한 달은 더는달이 아니다." 내게 하는 말일까요? 아버지의 얼굴을 봅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나를 보고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 또한 아버지가 한 말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혼내는 대신사람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말했습니다. 그 말이, 회초리보다 더 아프게 내 종아리를 때립니다. 하지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속으로만 웁니다. 아버지가 나에 대한 화를 아끼듯 나 또한 눈물을아껴야만 합니다. 나는 눈물을 아끼며, 속으로만 울려 애쓰며 아버지가 하는 말을 하나 놓치지 않고 들었습니다. 그랬기에 나는 나중에 내친구에게 아버지의 자부심이었던 그림과 인품을 함께 말하게 되고, 내 친구는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후 다음과 같은 글로 정리하게됩니다.
원나라 때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많이 나타났다. 그중에서 가장두드러진 이는 예찬이다. 그의 인품이 높았던 까닭이다. 단원이 김득신최북, 이인문 사이에서 홀로 독보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인품이 높아야필법도 높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나를 보며 아버지로선 드물게 목소리를 높입니다. "네가 한 짓이 곧 내가 한 짓이다. 그게 나라는 사람이다."
표암 선생에게 한결같았고 표암 선생 또한 아버지에게 한결같았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표암 선생은 아버지의 선생이 아니라 ‘친구‘였고 실제로도 아버지를 제자가 아닌 친구로 대했습니다. 표암 선생이 「단원기」에 ‘군과 나는 나이와 지위를 잊은 친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쓴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나중에 아버지와 표암 선생이 함께등장하는 희귀한 그림을 보게 됩니다. 스물도 안 된 아버지와 오십이 넘은 표암 선생이 선생의 친구이자 일세를 풍미한 문인이자 화가들인허필, 심사정, 최북과 함께 등장하는 그림을 보게 됩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와 문인들의 모임에 아직 스물도 안 된 아버지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뜻하는 바가 뭘까요? 그건 바로 표암 선생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를 향한 표암 선생의 우정 어린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 그림을 통해 나는 표암 선생이 말로만 아버지를 아끼고 친구로여긴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됩니다. "너는 어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표암 선생과의 추억을 말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집니다. 아버지의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아버지가 내게 그림을 가르쳐 주지 않은 이유를 문득 깨닫습니다.
지금껏 내겐 오직 하나의 생각밖에없었습니다. 어서 빨리 화원이 되고 싶다는 그 하나의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제야 나는 지난봄 아버지가 스쳐 가듯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그말!
화원이 되고 싶다는 것,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남을 위한 그림만그리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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