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자르고 신체를 두 동강 내고 귀신이 물어뜯는 등 순진하고 착한 내용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치 그런 동화를 보는 것 같다. 그가 묘사한 유토피아, 천국, 환상 세계는 색감이 기가 막히고 아름답다. 이런 색을 쓸 수 있구나, 잔혹한 그림에서 보이는 색감은 의도 또는 무의식•적인 결과물이구나, 깨닫는다. 나라면 절대 그리지 않을 그림이기에 매력을 느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트레이싱을 했다고 하면 엄청난 비판을 받는데, 만약 헨리 다거의 스타일로 트레이싱을 했다면 도둑질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적인 기법으로 인정받을 것 같다. 베껴 그리며 자신만의 시선으로재구성, 재활용했기에 개성 넘치는 작품으로 재탄생했을 터. 베껴 그렸지만 누구의 그림보다도 독창적이며 자유분방하고 특이하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그의 이런 독특한 분위기는 다른 많은 화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책을 사기 전에는 헨리 다거의 그림을 조각조각 보았고, 그의 일생을대략적으로만 알았다. 영어로 쓰이긴 했지만 여러 이야기가 실려 있어 그를 더 자세히 알게 됐다. 특히 인터넷에 없는 그림을 볼 수 있어 정말 좋았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은 가로로 긴
그림이 많은데, 이 책도 가로로 긴 판형에다 중간중간 끼운 접지를 펼치민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비율로 볼 수 있다. 한 화가의 예술 세계를 이토록 자세히 보여주는 책이라니. 많은 화집이 화가의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묵직한 종이 더미로 어딘가에 존재한다.
책에는 ‘구성‘이 있다. 작가의 생애와 생각이 순서대로 편집되어 한 인간의 세계를 만나게 해준다. 화집 감상은 내겐 선배, 이 업계의 길을 먼저 간사람의 노트를 훔쳐보는 일이다. 하여 수업 노트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 전시회 한 번 연적 없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화가를 책 한 권으로만난다. 어떻게 이 종이 더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직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만나지 못한 화집이 전 세계에 수만 종이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모험 정신이 불끈불끈 솟는다. 비인기 분야이고 제작비가 꽤 들어가는 책임에도 여기저기서 꾸준히 나오는 건 나 같은 독자가 있어서겠지. 화집을 만드는 분들, 늘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살 테니 어서 마케팅을 해주세요! 돈을 벌고 나서 제일 좋은 것 중 하나가 화집을 살때 예전보다 덜 망설인다는 점이다. 다만 화집은 일반 서점에서 흔하게 볼수 없다. 요즘은 더더욱 구매가 힘들어졌기에 바지런히 찾아다녀야 한다.
내가 한 작가의 책을 전부 다 보기로는 우리나라 작가 중에선 마영신 작가가 유일하다. 우리나라에선 『19년 뽀삐라는, 한 소년이 청년이 될 때까지 함께 지냈던 반려견을 이야기하는 만화가 많이 알려져 있다.
나는 작가님 만화 중에서 「콘센트」와 「엄마들」이 가장 재미있었다.
두 만화 모두 여성이 주인공인데, 커다란 체구의 남성 작가님이 이렇게나 여자의 인생을 잘 그릴 수 있다니 작가님의 섬세한 관찰력과 통찰력이 놀라웠다. 내용은 꽤나 현실적이고 적나라하다. 「콘센트』는 심지어 19금이다. 그런데 야하지 않다. 오히려 현실 속 남녀의 젠더 의식과 주인공의 외모콤플렉스가 리얼하게 그려진다. 너무 리얼해서 읽다 보면 내 어떤부분이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엄마들은 무려 중년 여성들의 연애 이야기다. 이 짧은 설명만으로도 어디에서 볼 수 없는 만화라는걸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만화는 너무 솔직해서 때론 시커멓고 때가 묻어보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다른 만화가 하지 못하는 일을 담당한다. 작가님은 기존 만화 클리셰를 반복하며 복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삶에서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원본
을 만들어낸다. 그 점이 가장 좋다. "와, 나도 이런 사람 알아. 나도 이런 거 겪어본 적 있어." 작가님의 책을 보다 보면 이런 말이 절로 나온다. (마영신작가님의 만화책을 보고 이런 말이 안 나오는 분이 있다면 부럽다. 굴곡 없는 행복한 삶을 산 거다.)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는 타카노 후미코와 오카자키 교코다. (마영신 작가님이 만화 공부를 하라며 보내주신 만화가 나중에 알고 보니 타카노 후미코의 작품이었다.) 둘 다 만화책이 국내에 번역된 지 얼마 안 됐다. 타카노 후미코는 2016년에 첫 책이 나와 근 3~4년 사이에 쭉쭉 책이 나왔다. 오카자키 교코 역시 2018년부터 만화책이 번역 출간되었고, 모두 ‘고트‘라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재미있는 시도를 많이 하는 곳인 것 같아인스타그램으로 늘 구경했던 곳인데 여기서 타카노 후미코와 오카자키교코를 설명하는 내용이 흥미로워 관심이 갔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알려질 가치가 있는 책을 선별하여 펴낸다고 한다. 정말 말 그대로 출판사 덕에 이 책들이 나에게 알려졌고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 적어도 나에게는 출판사의 기치가 실현된 셈이다. 감사합니다! 타카노 후미코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만화를 발표했는데 세상에나지금까지 그린 만화가 40년 동안 고작 단행본 일곱 권밖에 되지 않는다.
그녀는 57년생이다. 그럼에도 각각의 작품이 뛰어나 데즈카오사무문화상 만화대상을 받은 것은 물론 일본에서는 그녀를 ‘만화가들의 만화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연 그녀의 만화를 보고 처음 느낀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우선 눈이너무 즐겁다. 그녀는 소녀 활극(「럭키 아가씨의 새로운 일)부터 젊은 여성의 일상을 담은 짧은 만화(빨래가 마르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와 청소년의 성장기 (「친구』, 「노란책」)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는데 하나같이 데생의 완성도가 지나치게 높다. 물론 기존 소년소녀 만화와는 전혀 다른 그림체라 불호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만화 속 칸의 구성과 앵글, 인물의 표정과 다양한 자세는 기발하고 훌륭했다. 나는 그녀의 만화를 그냥보기만 하는 것만으로도 그림 실력이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녀의 만화를 여러 번 정독한 후 따라 그리는 연습 같은 걸 하지 않았는데도 예전보다 사람 몸이 다양한 자세로 잘 그려졌다. 나 또한 그렇고 많은 만화가 인물 대화 장면을 그릴 때 아이앵글로인물의 상반신이나 가슴팍까지 묘사하는 쉬운 방식을 선택한다. 하지만그녀는 아주 평범한 대화 장면을 로우앵글이나 하이앵글을 과감하고도아름답게, 신선하고 자유롭게 사용한다. 그런 시도가 시선의 흐름을 방해
하기는커녕 지루하지 않고 다채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이렇게 작은 칸으로도 다양한 앵글을 시도할 수 있구나, 반성하게 된다. 앵글이나 레이아웃뿐만 아니라 시원시원하고 단순한 선으로 완벽한 인체를 그려낸다. 그림을 좋아하거나 공부하고 싶은 분이라면 반드시 도움 될 것이다.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공각기동대」 등 작품성 높은 작업에자주 참여한 천재 애니메이터 안도 마사시는 타카노 후미코의 팬이라며그녀의 인체 표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만화 내용도 재미있다. 캐릭터들은 산뜻함, 진중함, 귀여움이 넘친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음 직한 엉뚱한 발상을 잘 다루는데, ‘어떻게이런 귀여운 생각을 할까!‘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노란책」이라는 만화. 한 소녀가 「티보가의 사람들』이라는 책에 빠져든 모습을 다룬다. 소녀는 소란스러운 가족들 틈에서 마지막까지 작은 전등불 아래 책을 읽고, 학교에서도 길을가다가도 책을 생각한다. 소녀는 마음속에서 책 속 사람들과 대화하기도한다. 보시다시피 줄거리가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흠뻑 빠져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만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친구라는 만화도 한 편의 아름다운 영화 같아 매우 아낀다. 어린아이들의 감
아무튼산책
산책을 다루는 책이라면 주저 없이 사버린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산책을 만나기 전에는 단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산책』이 내 마음을지배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산책』이라는 책이 있었기에 나는 오래도록 산책이라는 행위를 사랑할 수 있었다. 오가와 요코의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와 서울의 빈민들 이야기를 담은 가난한 도시생활자의 서울 산책』, 오래도록 나무를 관찰한 이야기를 담은 「도시의 나무 산책기등 산책이라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산책이라는 키워드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책을 모두 사랑한다.
하지만 지금 내게 산책 책 중 베스트는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이다. 아니 「산책』은 내가 가진 거의 모든 책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 정도로 이 만화책을 매우 좋아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의 ‘이상형‘에 가깝고 내가 가진 모든 책 중 가장 나와 닮았다. 나는 이런 책을•추구하고 싶다. 굉장히 차분한 분위기의 만화다. 그러면서도 엉뚱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다. 만화지만 대사가 많이 나오지 않고 이렇다 할 스토리나 갈등도 없다. 안경 낀 중년 남성이 터벅터벅 기회가 될 때마다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는 내용이 전부다. 그렇지만 이 책은 아름답다. 대사가 없기 때문에 느낄 수 있고 서사가 없기 때문에 나의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다. 이 만화 속 장면이 조용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내가 산책했을 때의 느낌이 더욱 생생하게 다시 떠오른다. 본디 산책이란 끊임없이 차분해지는행위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활기찬 곳을 걷는다 해도 그 길을 다른 누군가와 함께가 아닌 홀로 산책하는 중이라면 내면은 자기 자신에게로 방향을 비추어 그 행위는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 입을 꾹 다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자극을 받는 동안 내 안의 감정은 분주하되 소리 없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 그런 게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에 담겨 있다. 이 만화책은 그림이 매우 정교하다. 한 컷 한 컷을 떼어서 보면 모두
물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보는 쉬운 책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S의 말처럼 예술적인 책, 철학적인 책은 물론 아이디어가 재기 발랄하여 웃음이 나오는책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훌륭한 그림이 너무 많았다. 그림책 카페가 아니라 미술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세상에 난다 긴다 하는 그림쟁이들이 다 그림책을 만들고 있었구나.‘ 그 후로 홍대에 갈 일이 생기면 몇번이고 달달한 작당을 다니면서 눈에 불을 켜고 좋은 책을 찾았다. 그땐내용보다 그림을 보는 데 흠뻑 빠졌던 것 같다. 지망생일 때라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가 가장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숀탠, 앤서니 브라운, 로베르토 인노첸티. 완성도 높은 그림과 꽉 찬채색, 세밀한 묘사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와 그 집 이야기는 지금도 자주 펼쳐본다. 「빨간 모자는 우리가 아는 그 내용이 아니라 성폭력에 관해 매서운 통찰력과 시선을 담은현대식 동화다. 아동 성폭력의 현실과 원인을 빨간 모자 이야기를 빌려소름 돋을 정도로 멋지게 그렸다. 이 책 한 권으로 열띤 토론을 벌일 만큼압축적이고 놀라운 그림책이었다. 앤서니 브라운은 워낙 작품이 많아 조금씩 꾸준히 계속 모으는 중인데, 아직까지는 「공원에서라는 책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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