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였다. 기사 속 마루야마 겐지는 첫인상부터가 강렬했다. 

"나는 데뷔 후 50여 년간 일본 문단과 전혀 교류하지 않는다. 자기연민 가득한 글만 쓰는 나르시시스트 집단인 일본 작가들을 싫어한다." 

오! 난 이렇게 주대 있는 사람이 좋더라, 죽 읽어나갔다. 스물두 살 데뷔작 「여름의 흐름」으로 최연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단다. 남달라 보였다. 

뒤이어 사람은왜 자립해야 하는지, 자신이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 우리는 왜 계속 살아 나가야 하는지, 그의 생각이 이어졌다. 말투는 단호하고 분명했다. 
당장 그의 책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샀다. 부제로 ‘인생이란 멋대로살아도 좋은 것이다‘를 단 에세이였다.
조금 읽고서 글자가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동안 내팽개쳐두었다. 3~4년 정도 지나서였나, 계속 눈에 밟혀 다시 읽기 시작했더니 그의 생각이 너무 좋아서 단숨에 읽었다. 

요약하자면 부모, 가족,
국가, 직장, 종교에 휘둘리며 살지 말고 자신 있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서 살아가라는 내용이었다. 청춘은 멋대로 살아도 좋은 것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자신의 할 일을 밀어붙이라며 쉬지 않고 일갈했다.

나 또한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중요했던 키워드는주체적인 자유와 세상으로부터 자립하는 것이었다. 타인에 휘둘리지 않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해외에서 판매 중인 헨리 다거 화집을 발견해 선물해주었다. 그래, 외국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됐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화집에는 헨리 다거의 그림은 물론 개인 이야기도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그는 생전 병원 청소부로 일했고 죽고 나서야 방에서 방대한 원고가 발견돼 이름을 알렸다. 15,145쪽에 달하는 글과 수백 점이 넘는 삽화가실린 「비현실 왕국에서 In the Realms of Unreal]]라는 판타지 동화였다. 원제목은 ‘비현실 왕국의 비비안 걸스 이야기, 어린이 노예의 반란으로 인한 글랜디코-안젤리안 전쟁 폭풍 속The Story of the Vivian Girls, in What is known as theRealms of the Unreal, of the Glandeco-Angelinnian War Storm, Caused by the Child SlaveRebellion‘으로 매우 길다. 

헨리 다거는 평생 홀로 살며 몰래 작업했고, 한번도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자신만의 책을 손수 제본해 금색으로 제목을 적었다. "이 세상 모든 금광의 금으로도, 은으로도 이 그림을 나에게서 살 수없다. 이들을 훔치거나 훼손하는 이들에게 잔혹한 복수가 있을 것이다"라는 메모까지 남겼다.
나는 늘 그림을 그리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남들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 그림이 알려지고, 알려져야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어서다. 나뿐만 아니라 화가 대부분이 자신의 그림을 세상에 발표하는 것을 전제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발표해 인정을 받고 명예를 쌓는것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보여줄 수 없다면 그리려는 마음을갖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언제부턴가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그림이 아니라면 애초에 그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반면 헨리 다거는 평생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자신의창작 세계에 빠져들어 그림을 끊임없이 그렸다.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림을 사랑한다고 온 천하에 떠들고 다니는주제에 실은 꾸준히 그리지 않는 내 모습이, 남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기가두려워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마감 없이, 누군가의 부탁이나 청탁 없이, 돈을 벌려는 생각 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이토록 방대하게 오래도록 만들어가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창작‘이라는 단어에 혹시 다른 모습이나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화가 기묘하지만 그의 그림은 더욱 특이하다. 「비현실 왕국에서는 평화로운 왕국의 아이들이 자기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어른들의 침공을 받아 싸우고 투쟁하는 이야기다. 그가 상상한 왕국 속에서

수많은 아이가 뛰어놀고 싸운다. 그 아이들 위로 형형색색 꽃과 푸르른들판이 끝없이 펼쳐진다. 때로는 괴물과 먹구름, 시체가 나뒹굴기도 한다.

기괴한 한편 너무나 아름답다. 이런 그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없다.
헨리 다거는 미술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아 인체를 자유롭게 그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이들 동작이나 표정을 그릴 때는 기존 광고 사진이나일러스트, 만화를 베끼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그림 속 아이가 사람이아니라 인형처럼 보이기도 하고 콜라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그림을독특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세련됨이나 능숙함은 없지만 신선하다. 인물데생은 그렇다 치고 그림 구도와 색감이 조화로우며 과감하고 색달라서힙하다고 느껴진다. 나비나 용 같은 환상적인 상상의 동물은 꿈속 이미지를 자아낸다.
두텁지 않은 채색도 마음에 든다. 수채화로 단 한 겹, 하나의 테두리 안에 하나의 색을 칠하거나 한 그림 안에 서너 가지 색밖에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충분하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아이들이 주인공이면서도 간혹 기괴하고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데, 오히려 그런 것이 더욱 자연스럽고 강렬하게 끌린다. 실제로 어린아이에게 이야기를 지으라고 하면 머리

를 자르고 신체를 두 동강 내고 귀신이 물어뜯는 등 순진하고 착한 내용이 아니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치 그런 동화를 보는 것 같다. 그•가 묘사한 유토피아, 천국, 환상 세계는 색감이 기가 막히고 아름답다. 이런 색을 쓸 수 있구나, 잔혹한 그림에서 보이는 색감은 의도 또는 무의식적인 결과물이구나, 깨닫는다. 나라면 절대 그리지 않을 그림이기에 매력을 느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트레이싱을 했다고 하면 엄청난 비판을 받는데, 만약 헨리 다거의 스타일로 트레이싱을 했다면 도둑질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적인 기법으로 인정받을 것 같다. 베껴 그리며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구성, 재활용했기에 개성 넘치는 작품으로 재탄생했을 터. 
베껴 그렸지만 누구의 그림보다도 독창적이며 자유분방하고 특이하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그의 이런 독특한 분위기는 다른 많은 화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책을 사기 전에는 헨리 다거의 그림을 조각조각 보았고, 그의 일생을대략적으로만 알았다. 
영어로 쓰이긴 했지만 여러 이야기가 실려 있어 그를 더 자세히 알게 됐다. 특히 인터넷에 없는 그림을 볼 수 있어 정말 좋았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은 가로로 긴

그림이 많은데, 이 책도 가로로 긴 판형에다 중간중간 끼운 접지를 펼치면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비율로 볼 수 있다.
한 화가의 예술 세계를 이토록 자세히 보여주는 책이라니. 많은 화집이 화가의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묵직한 종이 더미로 어딘가에 존재한다.
책에는 ‘구성‘이 있다. 작가의 생애와 생각이 순서대로 편집되어 한 인간의 세계를 만나게 해준다. 
화집 감상은 내겐 선배, 이 업계의 길을 먼저 간사람의 노트를 훔쳐보는 일이다. 하여 수업 노트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 전시회 한 번 연 적 없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화가를 책 한 권으로만난다. 어떻게 이 종이 더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직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만나지 못한 화집이 전 세계에 수만 종이존재한다고 생각하면 모험 정신이 불끈불끈 솟는다. 비인기 분야이고 제작비가 꽤 들어가는 책임에도 여기저기서 꾸준히 나오는 건 나 같은 독자가 있어서겠지. 화집을 만드는 분들, 늘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살 테니 어서 마케팅을 해주세요! 

돈을 벌고 나서 제일 좋은 것 중 하나가 화집을 살때 예전보다 덜 망설인다는 점이다. 다만 화집은 일반 서점에서 흔하게 볼수 없다. 요즘은 더더욱 구매가 힘들어졌기에 바지런히 찾아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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