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을 가로지르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이를테면 어슐러 K. 르 귄이 『밤의 언어』에서 본격문학과 사실주의소설만을 높게 평가하는 문학계 분위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SF.판타지 작가가 폄하된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나 아니면
"대체 착상을 어디에서 얻으시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모든SF 작가가 놀라울 만큼 주기적으로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그렇다. 분명 에세이가 쓰인 시점과 지금은 반세기 정도의 시차가 있는데 말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해외에서도 꼭 옛날 일인가 싶기도 하

흔히 경시되고 마는 어떤 일들, 그리고 여성의 나이듦의가치를 말하고 있어서 좋았다. 툴툴거리며 우주선에 오른 인류를 대표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엘리자베스 문의 『잔류 인구에서 얼마나 매력적으로 그려지는지 이미 목격했기에 더더욱 그렇다.

배명훈의 SF 작가입니다』는 당장 일하러 책상 앞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SF 에세이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배명훈 소설가는 부지런한 연구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조망하고그 통찰을 SF에 녹여내는데 나는 늘 그 연구자적인 자세를 흠모하고는 했다. 이 에세이에서는 특히 그의 세상을 해석하는 태도, 세계관의 개성이 확연히 느껴진다. 

게다가 한국에서SF를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모호하게 체감할 어떤 현상을 아주 시원하고 명료하게 짚어내는 꼭지가 많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SF를 쓰는 작가가 반드시 직면하는 장벽으로 언어와 공간의 문제를 든다든지, ‘일확천금을 꿈꾸며 성실하게‘가 직업모토가 되는 작가의 경제적 토대를 설명한다든지. 아무튼 여러모로 성실해지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을 일깨우는 책이다.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도 매력적인 장르 에세이다. SF, 판타지, 호러, 미스터리 같은 각각의 장르가 어떻게형성되고 발전해왔는지, 장르 거장들은 얼마나 매력적이고

이제 나는 외계 유물을 역으로 설계하듯좋아하는 책들을 들여다본다. 아무리 경이로운 세계도 그것을 구성하는 원칙과 기술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생각하며 책을 읽는다.

어느 날 작업실에 앉아 책장을 쭉 둘러보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 같았다면 존재조차 몰랐을 책들이 눈에 잔뜩 들어왔다.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필요해서 사들인 게 아니었다면 살면서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을 책들이 책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순수한애정과 즐거움 대신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 독자가 되었지만, 그래서 그게 일종의 직업병이라며 투덜대고 있었지만, 혹시 이 불순한 독서가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잘못 탄 버스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도시의 낯선 장소로 나를 데려가주는 것처럼.
나는 이 책들에 실려 뜻밖의 세계로 자주 향한다. 의외와우연의 영역들, 그것은 불순한 독서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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