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직접 말을 하는 대신짧은 필담을 주고받은 것이다. 나는 ‘훈희 10결‘이라 제목을 붙이고 그동안 정리한 것들을 눈으로 읽었다.
-바둑은 서로 번갈아가며 한 번씩만 두는 거야. 힘이 세고돈이 많다고 해도 두 번 둘 수 없어. 반대로 응수할 자신이 없거나 실력이 없다고 해서 한 번을 안 두거나 건너뛸 수 없어. 맞아. 한 판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도망치지 않고 150수가량을 방어하거나 공격해야 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니까혼자서 끝까지 책임져야 해.
-19줄 바둑판은 약 2천 년 전부터 사용됐어. 인간이 만든 놀이 중 가장 변화무쌍하고 가장 고요한 동작을 결합한 것.
-그래, 바둑판은 무한대의 공간이고 또 다른 우주야. 우리가
즐기는 놀이 중 수학적으로 가장 복잡한 종목이어서 누구도 쉽게예측할 수 없어. 돌아가신 우리 아빠 최 사범이 자주 하신 말씀.
-실력은 경력이나 학연, 혈연, 지연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오로지 승부에 의해 결정돼. 기력과 성적은 높으면 높을수록 우월한거야. 이건 어깨너머 8급인 우리 아버지 말씀.
-바둑이 멋있는 건 상황을 타개할 묘수가 언제든 있다는 거야. 근데 그건 오직 실력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여. 실력 좋은 사람은 곧 시력 좋은 사람.
-집중력을 잃으면 패착을 두게 돼. 반대로 어깨에 너무 힘이들어가면 지고 말아. 힘을 적당히 빼는 게 곧 실력.
ㅡ한 판이 끝나면 돌을 거둬서 바둑판을 비워야 해. 그래야만다음 대국을 할 수 있어. 이전 판의 돌을 비워내지 않으면 새로운게임도 없는 거야.
-바둑은 돌을 버릴 때조차 선수를 다투는 기자쟁선(爭先)을 가르쳐줘. 다급한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을 찾으라는.
-오직 손으로만 나누는 대화. 나는 말소리보다 그 손의 움직임으로 얘기하는 게 더 좋아. 말을 잘 못해서일까?
"바둑을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힘이 뭐예요?" 사범님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먹는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사범님의 접시는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도망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둘 수 있는 힘은 결국 유희에서 나와. 이게 어려운 숙제라든지, 완수할 책임이라든지, 막중한 사명이 되면 끝까지 하기 힘들어. 대부분 도망치고 싶지. 그러니까 끝까지 놀아야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유희여야 해." 그새 형은 내 포테이토를 다 먹고 냅킨으로 손가락의 기름을 닦으며 물었다. "결국 끝까지 놀라는 말인데, 끝까지 놀기도 쉽지 않잖아요? 좀 특별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요?"
"어떤 마음을 가지려 애쓸 필요는 없고, 차라리 마음을 비워야해. 승부에 집착하면 손가락에 쥔 돌이 쇠처럼 무거워져, 반대로 마음을 비우면 어느 순간 돌이 반짝거리지, 유리알처럼." 사범님은 씽긋 웃으며 옛날에 한창 승률이 좋을 때 그런 경험을 했다고 했다. 형과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저녁을 차려달라고 할까 말까가 당장 더 고민이었다. 연희는 나보다 국어 점수는 낮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훨씬 잘 알아들었다.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에 적절히 반응했다. 다만 나는 바둑돌이 유리알처럼 반짝거린다. 는 표현이 좋아서 조용히 웃었다. 롯데리아를 나와서 우리는 기원까지 함께 걸었다.
그길로 나는 울면서 집에 갔다. 스포츠 거리와 중동사거리, 조홍은행 앞을 지나 자주 걷던 가로수 길을 눈물을 훔치며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옆으로 지나갔지만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나는 주문처럼 연희의 이름만 불렀다. 그녀를 처음 인식하던 미술 시간부터 고형을 이기던 놀라운 한판, 허리를 곧게 펴고 착수하는 가늘고 긴 손가락, 웃을 때마다 둥글게 휘는 반달 같은 눈매, 난감한 상황에서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던 표정, 내가 유리컵을 깨자 용기 있게 그것을 쓸어 담던 모습. 음료수를 마실 때 모아지던 입술의 긴장, 처음 돈가스를 먹고 극장에서 영화를 봤다고 말하던 순간, 그 처음을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던 장면들이 떠오르자 나는 못내 그녀가 불쌍하고 가엾고 애틋했다. 매교 다리를 지나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길모퉁이에서 토하고 말았다. 두 귀로는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입에서는 울음이 터져 나오고, 눈과 코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토록 커다란 슬픔의 주머니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주먹으로 세게 맞은 것처럼 눈알이 빠져나올 듯 아팠다.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이 내 배 속에 손을 넣어 내장을 몽땅 끄집어낸 듯 속이 허전했다.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 접힌 편지지를 펼쳤다.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즈음이면 나는 아마 비행기를 타고 푸른 하늘을 날고 있을 거야, 훈아, 사실 나 많이 무서워, 샌프란시스코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겠어. 말도 통하지 않고 친구도 없는 곳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불 꺼진 지하실에 갇힌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 훈아, 어제와 오늘은 짐을 싸며 오래 울었어.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며 참았거든. 근데 네가 그동안 작성해준 기보를 손에 들었는데, 그 못생긴 글씨를 보니까 터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어. 너는 아마 모를 거야. 너의 관전기가 내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는지. 엄마로부터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던 그 막연한 시간을 어떻게 버티게 해줬는지....... 마지막 부탁이 있어.
겁쟁이가 되지 말고 용감한 사람이 되어줘. 이기는 바둑을 두지 말고 즐기는 바둑을 두어줘. 얼간이가 되지 말고 부디 근사한 사람이 되어줘. 그리고 나를 꼭 만나러 와줘.
너의 영원한 상수, 연희.
P.S. 십번기 마지막 한 판 남은 거 알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될 거야. 그럼 내가 첫수를 둘게. 4의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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