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탁에서
아이 둘 낳아 기를 매 나의 아이들 아직 어렸을 때 만약에 우리가 이혼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면절대로 자기는 아이들 떼놓고 집을 나가는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아이들 키울 자신이 없어 분명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짐짓 가슴이 아리다 그렇다면 우리 집 아이들은 어디서 누구하고 산단 말이냐 아이들 울고불고 길거리를 헤매고 그랬을 일을 생각하면 우리가 젊어서 이혼한 사람들이 아닌 게 참 잘 한 일이지 같이 살아 늙은 사람이 된 것이 참 좋은 일이지 있지도 않았던 일들을 생각하며 가슴 쓸어내리는 어떤 아침이 있었다.
다시 중학생에게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버스를 놓칠 때가 있단다 잘못 한 일도 없이 버스를 놓치듯 힘든 일 당할 때가 있단다 그럴 때마다 아이야 잊지 말아라 다음에도 버스는 오고 그다음에 오는 버스가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경우라도 아이야 너 자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너 자신임을 잊지 말아라.
꽃들아 안녕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멀리서 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유언시1 아들에게 딸에게
아들아 딸아, 지구라는 별에서 너희들 애비로 만난 행운을 감사한다 애비의 삶 길고 가느른 강물이었다 약관의 나이, 문학에의 꿈을 품고 교직에 들어와 43 년 넘게 밥을 벌어먹고 살았으며 시인교장이란 말을 들을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지 싶다 그 무엇보다도 한 사람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우렁차고 커다란 소리를 내는 악기보다는 조그맣고 고운소리를 내는 악기이고 싶었다
아들아, 이후에도 애비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함부로 대하지 않기를 부탁한다 딸아, 네가 나서서 애비의 글이나 인생을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작품은 내가 숨이 있을 때도 나의 소유가 아니고 내가 지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나의 것이 아니다 저희들끼리 어울려 잘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거라 민들레 홀씨가 되어 날아가는 느티나무가 되든 종소리가 되어
사라지고 말든 내버려 두거라.
인생은 귀한 것이고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란 걸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을 터, 하루하루를 이 세상 첫날처럼 맞이하고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정리하면서 살 일이다부디 너희들도 아름다운 지구에서의 날들 잘 지내다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담에 다시 만날 지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태백선
두고 온 것 없지만 무언가 두고 온 느낌 잃은 것 없지만 무언가 잃은 것 같은 느낌 두고 왔다면 마음을 두고 왔겠고 잃었다면 또한 마음을 잃었겠지 푸른 산 돌고 돌아 아스라이 높은 산 조팝나무꽃 이팝나무꽃 소복으로 피어서 흐느끼는 골짜기 골짜기 기다려줄 사람 이미 없으니 이 길도 이제는다시 올 일 없겠다.
별리
우리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 그대 꽃이 되고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내 앞에 있는다 해도 차마 그대 눈치채지 못하고 나 또한 구름 되고 바람 되고 천둥이 되어 그대 옆을 흐른다 해도 차마 나 알아보지 못하고 눈물은 번져 조그만 새암을 만든다 지구라는 별에서의 마지막 만남과 헤어짐 우리 다시 사람으로는 만나지 못하리.
오늘의 약속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발을 멈췄다든지 매미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가족사진
아들이 군대에 가고 대학생이 된 딸아이마저 서울로 가게 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자고 했다 아는 사진관을 찾아가서 두 아이는 앉히고 아내도 그 옆자리에 앉히고 나는 뒤에 서서 가족사진이란 걸 찍었다 미장원에 다녀오고 무쓰도 발라보고 웃는 표정을 짓는다고 지어보았지만 그만 찡그린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떫은 땡감을 씹은 듯 껄쩍지근한 아내의 얼굴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나의 얼굴 그것은 결혼 이십오 년 만에
아름다움
놓일 곳에 놓인 그릇은 아름답다 뿌리 내릴 곳에 뿌리 내린 나무는 아름답다 꽃필때를 알아 피운 꽃은 아름답다 쓰일 곳에 쓰인 인간의 말 또한 아름답다.
행복 2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풀꽃
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 봐 참 좋아,
촉
무심히 지나치는 골목길 두껍고 단단한 아스팔트 각질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새싹의 촉을 본다 얼랄라 저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한 개의 촉 끝에 지구를 들어 올리는 힘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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