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는 가족들이었다. 만나면서로 싸우고 상처 주고 더러운 기분만 길게 남았다. 경기남부의 만석꾼이었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며 적자들에게는 알짜배기 옥토를 나눠주고, 서자인승균의 아버지에게는 멀리 떨어진 자갈밭을 주었는데 그 자갈밭에 신도시가 들어서는 바람에 크게 이익을 본 게 갈등의 씨앗이었다. 가지고 있던 논밭도 못 지킨 본가의 자식들이 원망에 가득 차있는지라, 모이면 칼부림이 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차별받고 자란 아버지가 또다시 가정생활에 실패한 건 뒤틀린농담 같은 일이었다. 승균도 따지고 보면 혼외 자식이었다. 자갈밭을 판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취미삼아 분당 근교에 인도어 골프장을 차린 아버지는, 잘나가는 학원 강사였던 어머니를 유혹했다. 승균이 태어났을 때도 전처와 이혼이 덜 끝난 상태였으니 깔끔한 구석이 없었고, 억지로 이복 형누나와 교류를 하려던 시도는 처참히 실패했다. 어머니는결혼과 잘 맞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승균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아버지와 이혼했다. 승균을 두고 가며 미안하기는 했는지, 생일엔 잊지 않고 비싼 전자기기를 사주었으나 그걸로는 불충분했다. 승균은 방치된 채, 아버지의 인도어 골프장 초록색 그물망 안에서 자랐다. 어쩌면 수용소에 잘 적응한 이유도 어린 시절과 비슷해서인지 모른다.
엄마 생각하며 꾹 참자, 그랬거든요. 근데 최종 배정된 데가 곰 사육장이더라고요, 세상에. 맨날 새벽 4시에 나가서 애들 먹이 썰고 사육장 청소하고 했어요." "곰・・・・・・ 귀엽잖아요." "새끼 곰이나 다 커도 작은 녀석들은 참 귀여워요. 사실 정도 많이 들었어요. 무릎에 매달리고 재롱도 떨고, 물론 청바지가 찢어지면 좀 화가 났지만도 테디베어가 왜나왔는지 알겠더라고요. 근데 큰 녀석들은 얼마나 무섭다고요. 웬만한 성격이 아니에요. 관람객 하나가 장난치다가 팔이 날아갈 뻔했다니까요. 이력서에 한 줄 쓰자니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어서 있었지만, 곰 사육장에서 일한 게 제 경력에 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갇혀 있는 곰들도 불쌍하고 저도 불쌍하고…………. 세상에 넘쳐나는 인턴이란 거, 특히 나라에서 하는 걸수록 다 그런 식이에요. 정말 자기 전공에 꼭 맞는 자리 구하려면 너무 힘들어요. 이제 겨우
요원들은 연선의 어머니가 초과 근무에 투잡까지 뛰며 밤새 일했던 게 정상이 아니었으며 일종의 중독이었다고 말해 연선에게 상처를 줬다.
자네를 민간인 사찰하고 있었잖아. 사찰을 할 거면 나 같은 사람을 사찰했어야지. 괴물들을 두고 학생들이나 잡아다 고문하고 있었다니 아직도 기가 막히네. 게다가 먼저 찾아갔더니, 기껏 한다는 짓이 나를 무기로 쓰려고 했고, 적국에 가서 사람들을 죽이라질 않나. 우방국에 나를 무슨 선물처럼 바치려 들지 않나. 냉전 시대에도 할 소리가 있고 안 할 소리가 있지…………. 양심적이고 효율적인 독재 정부 같은 소리 누가 하면 혀를 뽑아버릴 거야. 그 억울한 세월을 어떻게 견뎠는데 이런 상황이 또……………. 가서 일목인 변호사나 찾아와! 어딘가에 한 명은 있겠지! 괴물 변호사도 괜찮아! 갇혀 있는 변호사 없어? 찾아와! 소송할 거야! 아, 닥치라고, 소송한다고!"
소장은 경모를 진정시키기 위해 열심히 상부와 조정 중이라며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 조정을 기다리는 동안 연선이 버틸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승균과 하민이 연선을 다른 수용소로 이동이라도 시켜달라고 항의했지만, 연선의 특이한 점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수용소까지 사태가 번질 수 있다며 거절당했다. 변수를 통제해야 한다는 대답이었는데 소장을 한 대 치고 싶고, 벽을 때리고 싶고, 물건을 던지고 싶었지만 그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승균은 자신이 폭력성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시민인데도 갇혀 있다는 게 갑자기 믿을 수 없어졌다.
그리고 여기는 여기는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알면 좋을 텐데 전혀 모르겠고, 누가 듣고 계셨으면 하는 마음과 한 분도 듣고 계시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반반입니다." 정규 주파수가 아닌 이상 몇 사람이나 듣겠냐마는 살인자를 각성시키는 목소리가 광범위하게 날아가고 있으니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일목인들은 이해할까? 수용소에서 도서관이 가장 위험했음을 숭균은 대학 시절 우연히 접했던 소책자를 떠올린 후 그 책을 구해달라고 신청했고, 신청은 승인되었다. 소출력 라디오 운동 혹은 커뮤니티 라디오 운동에 필요한 소규모 기지국을 건설하는 법을 자세히 적어둔 책이었다. 〈볼륨을 높여라> 같은 영화가 나올 만큼 유명했던 미국의 급진적 미디어 운동과 이탈리아의 볼로냐 등지에서 활발했던 텔레스트리트 운동에 영향을 받은 듯 한국내 단체의 유행 지난 선전물이, 모조리 폐지되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고는 승균조차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늘이 도왔다. 운동은 팟캐스트의 등장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예측 바깥의 수를 둔 것은 확실했다. 그 책과 다른 책들에서 읽은 것을 응용하여 송출기를 조끼 하나에 부착 가능하도록 압축한 것은 성과라면 성과였다.
승균에게 그것은 무기였고, 협박의 도구였다. 누구를 협박하느냐 하면. 세상을? 살인자를 깨우는 목소리로 해적 방송을 했다.
새로운 종류의 괴물이라서, 괴물 위의 괴물이어서 그들을지배했다면ㆍㆍㆍㆍㆍㆍ 자유를 되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모두를. 중독시켰을 가능성은 분명 있었다. 수용자들은 부탁 한번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였으니까. 그렇다 해도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의 마주 봄으로 영원히 잊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구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전 선생님을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아요." "선생님께 말씀 안 드렸던가요? 내내 애인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목소리가 매력이었는데 왜 저 때문에 그런일을.....…." "저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선생님 때문에 살인자가 되고말았어요. 구치소로 면회 오시겠어요?" "저와 선생님이 만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요. 우리에겐 미래가 없어요." "그때 왜 변태같이 제 손을 잡으셨어요?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전 선생님 같은 사람 딱 질색이에요." "앗, 저 레즈비언인데요." "연하가 취향이라서・・・・・・ 선생님 말고 하민 씨가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연선이 할 만한 다양한 종류의 거절을 세상 끝날 때까지
승균은 웃으면서 하민과 주먹을 부딪쳤다. 대한민국 정재계의 방향을 비틀어버리는 사람이 비밀 수용소의 스물한 살짜리라니. 누가 상상이나 할까. 승균은 처음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 자신과 다른 수용자들이 세상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수용소를 나가자니, 세상은 원래 아주 이상한 곳이었고 그들이 더한 것은 그저 미량의 광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린 구울이었다. 수현은 머리땋기 기술을 응용하여 갖가지 색실로 행운의 팔찌를 만들어 직접 승균의 손목에 매어주었다. 굽은 손가락 끝의 날카로운 손톱이 손목을 할 때 승균은 내색하지 않았다. 팔찌는 엉성했고 젖은 흙냄새가 났지만 앞으로 승균의 보물이 될 것이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고인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애쓸 때 수현이 요청했다. 승균은 뭐든지 들어주마 했다. "나중에 돌아가시면요. 화장 같은 낭비 절대 하지 말고, 미생물이니 캡슐이니 요상한 것도 쓰지 말고 그냥 땅에묻히세요. 정 신경 쓰이면 얇은 판자 관에 천 한 장 정도감고요." "어어....… 그래. 그 정도야."
우주 이주 실패가 의도치 않게 혁명을 성공시켰던 것은 역사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아이러니였다. 사람들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다음에야 이 작은 행성의 가치를 다시 매겼던 것이다.
지구에 파괴적이지 않은 적정 인구수는 25억, 국가별 인구수 상한을 두고 첨예한 협상이 벌어졌습니다. 자원 순환 구조와 경제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야 했고, 더 효율적으로 바꾼 나라들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환경주의와 페미니즘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처럼 기능했습니다. 언젠가는 마을 가장자리에 서서 비명을 지르는 마녀 취급을 받았던사람들이 끝내는 모두를 구했습니다. 인공 포궁과 바이오 필름형 피임도구의 보편화가 기술적으로 발맞추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인공 포궁에 대해서는 제도적으로 여러 각도의 접근이 있었으나, 이내 정부가 관리하되 사용은 오로지 개인이 할 수 있도록 정비되었습니다. 인공 포궁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양육자 교육기관에 등록하여 능동적인 생명권 교육과 인권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냉동실에서 야산에서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되던 학대와 살해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그렇게 사회는 드디어 트라우마 없는 시민들을 키워냈습니다.
필터 주전자형 정수기로 걸러 전기 포트로 끓여 마시기 때문에 탈이 난 적은 없었다. 씻는것에도 큰 변화를 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더 잘 씻었다. 예전에는 뜨거운 물이 금방 끊겨서 샤워하다가 찬물을 맞기 일쑤였는데, 아래층에 걸어 다니는 좀비들은 이제 샤워를 하지 않으니 늘 온수가 나왔다.
전기 포트, 전기 플레이트, 가습기, 다리미, 드라이기헤어 아이론, 노트북, 전화기가 있었다. 머리를 감고 나서는 드라이기와 아이론을 여유 있게 썼다. 자기 전에 감으면 피곤해서 대충 말리고, 일어나 감으면 새벽 훈련 때문에 대충 말리곤 했는데 몇 년 만에 완전히 건조해질 때까지 말릴 수 있었다. 처박아두기만 했던 아이론으로 매일 머리카락을 반듯하게 폈다. 하루에 15분이라도 집중할 거리가 더 필요해 시작했는데, 반복하다 보니 경건해졌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오래 남는 것 중 하나가 머리카락이라고 하지 않았나? 누군가에게 나중에 발견될 때, 해골에 화살처럼 곧바른 머리카락이 붙어 있으면 발견하는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윤이 끝까지 살아 있으려 노력했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를테면 수업시간에 배웠던 ‘존엄‘을 지키려 했다는 것을. 그러나 존엄이란 게 가지런한 머리카락 따위로 지켜지는 것은 아닐 것같고 어쩌면 허영심일지도 모르겠다.
악역을 제외하면 이 단편집의 남성들은 대체로 무해하며, 실제로 액션을펼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이 단편집에서는 딱 한 편의 예외가 있습니다). 뭔가를 할 때는 거의 조력자로서 움직이죠. 그들의 주 역할은 주인공에게 액션의 원동력을 제공하는것입니다. 여성 뮤즈들이 남성 화자(그리고 그 화자와 동일시되는 작가와 엮이는 방식이 역전된 겁니다. 이렇게 역전된 관계가 정치적인 장치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략적인 장치로 보기에는 너무 눈에 잘 띕니다. 이 단편집의 여러 주인공이 서로 닮아 있는 것처럼, 남성 뮤즈들이 서로 닮아 있는 것도 작가의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결과물로 보입니다. 주로 ‘남자다운 특성‘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공격적인 특성을 지니지 않은 남성들에 대한 호감 말이죠.
반대로 주인공이 맞서는 존재들은 모두 선제공격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며, 때로는 그런 공격성을 숭앙하는 현대문명 자체입니다. 독자들은 "이런 세계라면 그냥 사라져버려도 상관 없다"는 독백을 서로 다른 인물들로부터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더 암울하게 만드는 문명이라면 당연히 스스로 몰락하고 망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 아니겠냐는 주장을 쉽게 기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편집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풍으로 쓰인 작품들은 묘한 안도감 같은 것을 안겨줍니다.
이 이야기를 표제작으로 삼은 것은 요새 가장 자주 하는 고민이 한 사람 안의 유해함, 공동체와 시민 사회 안의 유해함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유해함을 신중하게, 더불어 기꺼이 제거하기로 마음먹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받아 적고 싶었다. 그리고 몇 년전에 반복해서 "정세랑 소설은 <목소리를 드릴게요> 말고는 다 갖다 버려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지웠다 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아니, 제가 정말 다작하는 편인데 정말로 다요? 이제와선 웃지만, 창작자들에게 조금만 너그렇게 대해주시길 부탁드린다.
<7교시>는 <리셋>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초단편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지구의 절반>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 나는정말로 여섯 번째 대멸종이 두렵다. 조류 관찰을 좋아해서 전 세계의 관련 단체 소식을 받고 있는데, 모두 개체 수 급감에 아득하게 절망하고 있다. 요새 ‘극단적인 환경주의자‘ 라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새들이 다 사라져가는 세계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치우친 게 아닌지 항변하고 싶다. 욕망은 점점 단순하게 수렴해서,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를 누비는 작은 새들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와 닮은 존재가 아닌 닮지 않은 존재를 사랑
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사랑의 특성은 번지는 것에있으므로 머지않은 날에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는 어려운 희망에 대해 쓰고 싶어서 썼던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데, 내가 이 이야기를쓸 때의 기억보다 어떤 분이 웹진 거울에 "그런데 헬기가 구해주지 않고 또 통조림만 주고 가버려" 하고 농담을 남기신 게 강렬했다. 그 농담만 생각하면 매번 웃음이 터진다. 별개로 나는 살아남은 정윤이 먹고 싶어 하던 채소로,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한 작은 화단을 가지게 되었을 거라고 상상한다.
2020년은 SF 단편집을 내기에 완벽한 해가 아닌가 싶고, 세계는 더디게 더 많은 존재들을 존엄과 존중의 테두리 안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 너무늦지만 않으면 좋겠다.
2020년 1월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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