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지옥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금까지 ‘너는‘ 잡아온 것이다. 헌데 어째서 오직 ‘나쁜 쪽으로만 기억을 붙들어 둔 것일까? 그건 사건 자체의 강도가 아니라 내가 그 기억을 떠나보내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 지점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또 어떤 비극도 시간이 지나면 전후좌우 맥락이 파악되는 법이다. 그걸 깨달으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 것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가 그 기억을 계속 ‘동일한 방식으로 곱씹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미 그 기억은 원래의 사건과는 무관한 나만의 ‘자의식‘이되어 버린다.
자의식이 공고해질수록 외부와의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아주 역설적이게도 소위 상처받은 이들일수록 그걸 빌미로(1) 타인에게 마구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 대상 또한 엄마(혹은 가장가까운 가족)인 경우가 많다. 원인제공도 "엄마"요, 한풀이 대상도 "엄마"인 것.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모성이 무슨 동네북도 아니고 이렇게 툭하면 호출대상이 되다니 말이다.
종기를 제거할 때는 인정사정 두지 말고 가차 없이 짜내야 한다. 그래야 뿌리가 뽑힌다. 마음의 종기 또한 마찬가지다. 상처의 언저리만 건드리지 말고 가차 없이 발본색원해야 한다.
그 온상은 보다시피 ‘모성‘, 그리고 모성을 둘러싼 가족주의다. 헌신과 배려, 희생과 자책감 등 모성을 둘러싼 표상들은 대부분 20세기 이후 권력과 자본에 의해 구성된 것들이다. 이 ‘만들어진‘ 모성을 전제하는 한 모든 이들은결핍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중국 문학의 내가 루쉰은 한 잡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자애로운 엄마가 있는 것이 행복할지라도, 그렇다고 어미 없는 자식이되었다 해서 전적으로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거꾸로 더욱더 용감하고 장애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남아로 자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은 결코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상처 또한 스펙처럼 쌓이고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 개의 길 천 개의 고원‘을 향해 열려 있다.
아기를 업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아기는 당연히 없어서 키워야 한다. 헌데, 언제부턴가 아기가 업힌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모든 엄마들이 아기를 품에 안고 다니기 때문이다.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심지어 할머니조차 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대체 왜?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 참 아름답고 세련되어 보인다. 그럼 아기를 없게 되면? 왠지 촌스럽고 덜떨어져 보인다. 그렇다. 포인트는 거기에 있었다. 미적 욕구가 모성을 압도해 버린것이다. 미시족을 위한 육아상품들이 쏟아지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모가 중요하다 한들 아기의 생명력을 억압해서야되겠는가. 생명의 이치상 아기는 무조건 업어야 한다.
첫번째 이유. 아기는 양기 덩어리다. 온몸이 불덩이에 가깝다. 따라서 음양의 이치상 음기가 필요하다. 아기들이 ‘할머니의 품‘을 좋아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할머니는 여성인 데다 노인이라 음기의 결정체에 해당한다. 당연히 아기들과는 ‘찰떡궁합‘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는 이런 육아법이 나오기도 한다. "아이에게 70~80세 노인이 입던 헌 잠방이나 헌 웃옷을 고쳐 적삼을 만들어 입히면 진기를 길러 주어 오래 살 수 있다." 업어야 하는 이치도 비슷하다. 심장은 특히 불이
다. 그런데 안고 있으면 엄마의 심장과 아기의 심장이 서로 마주보게된다. 곧 맞불이 붙는 형국이다. 그렇게 되면, 아기는 양기가 더욱 함진될 것이고, 엄마 또한 열이 올라 그 자세를 오래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또 각종 상품들이 등장했다. 아기를 오랫동안 안고 다닐 수 있는 우아한 베이비 상품들. 하지만 과연 아기도 그걸 좋아할까? 아니, 그 전에 그런 패션은 엄마의 허리에 엄청 무리를 준다.
두번째 이유. 등은 서늘하다. 족태양방광경이라는 경맥이 지나가
기 때문이다. 이 경맥은 신장과 방광으로 이어진다. 신장, 방광은 들을주관한다. 해서 등에 업히면 아기의 심장뿐 아니라 몸 전체의 양기가차분하게 수렴된다. 아기의 시선도 훨씬 넓어진다. 엄마의 등에서 보는 세상은 흥미진진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온갖 색깔들, 움직이는 물체들. 아기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혼융되어 있다. 그래서 마법의 천지다. 그 파노라마를 음미하는 것이 아기한테는 최고의 놀이이자 공부에 해당한다.
세번째 이유.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게 되면 ‘내 아이는 특별해!‘ ‘오직 내 아이만을!" 등의 감정에 휩싸이기 쉽다. 하지만 그것만큼 지독한 편견은 없다. 가족주의를 심화시킬뿐더러 엄마가 자식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는 망상이 싹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성과 자본이 만나면 이 망상은 ‘하늘만큼 땅만큼 커진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엄마와 아기는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아기를 업으면 엄마는 아기한테 집중하기보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 청소를 하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아기가 등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엄마 또한 자신의 일상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되는 관계, 엄마와 아기가 각자자신의 삶을 확충해 갈 수 있는 관계, 엄마의 등은 그것을 훈련할 수있는 최고의 현장이다. 그러니 부디 안지 말고 업어라!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자자마하트마 간디, 비폭력의 상징이자 위대한 영혼으로 추앙받는 이다. 하지만, 그가 설파하는 진리는 극히 단순하다. 스와라지(Swaraj), 자치‘가 곧 그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힘으로 노동하고, 그 노동의 힘으로 정신적으로 자립하고, 그 자립하는 정신들이 상호호혜의 관계를 맺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상적인 꿈. 그걸 위해서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나 대량생산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오히려 다양한 수공업들이 리바이벌되는 작은 ‘마을들‘의 연합. 간디가 꿈꾼 인도의 미래였다."(이희경,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인물톡톡, 북드라망, 2012, 323쪽)바야흐로 글로벌리즘의 시대다. 동의하는 않든, 전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이 흐름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하나는 전 세계가 거대한 제국으로 흡수통합되는 것, 조지오웰이 1984」에서 예견한 ‘디스토피아‘가 그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국경과 인종, 종교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마을 단위로 헤쳐모여 하는것. 특히 가족과 혈연을 뛰어넘는 ‘작은 마을들‘의 연합으로서의 지구촌! 간디의 비전과 지혜를 되새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을은
공동체의 최소단위다. 마을을 움직이는 동력은 제도나 시스템이 아니다. 자치와 자율이다. 전자가 경제적 자립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윤리적 주권에 대한 것이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길, 가족주의의늪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게 과연 가능하겠냐고? 여기 하나의 사례가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남산강학원&감이당)가 그것이다. 우리 공동체에는 10대에서 6080까지 다양한 세대가 공존한다.
지역도 제주도 문경, 청주, 춘천 등 그야말로 전국적이다.
그럼 이들은 숙식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물론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공동체 주방의 밥값은 2천 원이다(아침은 공짜니까 하루 두 끼씩이면 한 달에 12만원 정도). 요리는 학인들이 돌아가면서 한다. 2천 원으로 어떻게 유지되느냐고? 그 비밀은 ‘선물의 경제학‘에 있다. 전국 각지에서 쌀과 과일, 반찬 등이 무상으로 도래한다. ‘사람과 공부가 있는 곳엔 밥이 온다‘는 이치를 실감하기에 충분하다.
그럼, 숙식은? 다양한 방식의 공동주택을 마련하면 된다. 청년들이 함께 거주하는 ‘기숙사형 공동주택‘ (청년학사)도 있고, 6~7인이 동거하는 주택들도 있고, 혹은 가까운 고시원에 개별공간을 얻는 방식도 있다. 집은 최소한의 휴식만 가능하면 된다. 공부하고 활동하고 놀고, 그 모든 것이 다 공동체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숙박에 드는 비용은 16만 원에서 20만원정도. 요컨대, 한 달에 40~50만 원이면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 너끈히 살아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는 최고의 길이 바로 공부다. 물론 이때의 공부는 자기 삶에 대한탐구, 곧 지혜를 의미한다.
또한 공부는 노년과 청년이 조우할 수 있는 최고의 장이기도 하다. 춤이나 노래, 스포츠 등은 세대공감에 한계가 있다. 또 핵가족에서 다시 대가족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가족과 혈연의 틀을 넘어 ‘세대공감의 네트워크‘를 열어 가는 수밖에는 없다. 공부가 최고의 대안이라는 건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공부는 모든 세대를 망라할뿐더러 나이가 들수록 더 잘 어울린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말했다. 노년기의 젊음이란 청춘으로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대에 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고
지혜를 일구는 것보다 더 창조적인 활동은 없다. 그 열정의 네트워크 속에서 ‘세대 콤플렉스‘를 벗어나 청년들과 떳떳하게 교감할 수 있는 ‘다른 노년의 탄생‘을 기획해야 할 때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른다. 당연하다. 아직 피부와 뼈와 근육이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마음과 뜻이 결정될 수 있겠는가. 이들에겐 10년, 20년 뒤의 미래보다 지금 몸에서 일어나는 ‘신체적 변 ‘화‘가 더 절실하다. 어제는 이것이 되고 싶다가 내일은 또 저것이 되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음‘ 그 자체가 곧 청춘이다. 하지만 ‘꿈의 정치경제학‘은 이 욕망의 다양한 흐름을 성공이라는 ‘깔대기‘로 빨아들인다. 그래서 꿈을 가지게 되면 주변의 모든 것이 수단이 되어 버린다.
친구도 스승도 자기 자신도 그래서 (꿈이 있는 사람은 있어서 괴롭고 없는 사람은 없어서 괴롭다. 생리적으로 보면 둘 다 불면증의 원인이다.
실제로 우리 시대 청춘들은 깊이 잠들지 못한다. 머리가 뜨겁기때문이다. 그러면 각종 꿈에 시달리게 된다. "간기(氣)가 성하면 성내는 꿈을 꾸고, 폐기(氣)가 성하면 울부짖는 꿈을 꾸며, 심기(氣)가 성하면 잘 웃고 두려워하는 꿈을 꾸며………."(『동의보감』) 한마디로 꿈은 병증이다.
"머리는 차갑게, 발바닥은 뜨겁게!"—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의학의 기본명제다. 헌데, 밤에도 여전히 머리가 뜨겁다면 그건 망상에 시달린다는 뜻이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전적으로 주입된 것이다.
성공과 소유에 대한 꿈을 놓치지 말라는 주술들! 이런 주술에 빠져 있는 한 청춘은 시들어 버린다. 눈빛이 사그라들고 사지가 풀리고 혹은 폭력충동에 시달리고・・・・・・ 나무의 목표는열매가 아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잘 살다 보니 열
매가 달렸을 뿐이다. 삶 또한 그렇다. 무엇이 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잘 살다 보니 어떤 성취를 이루는 것뿐이다.
어제는 history, 내일은 mistery, 오늘은 present!" 영화 <쿵푸팬더>에 나오는 명대사다. 현재는 그 자체로 선물이라는 뜻이다.
생로병사의 전 과정이 선물이지만, 청춘은 그 중에서도 최고의 선물이다. 이 선물을 만끽하려면 무엇보다 주술에서 벗어나라! 꿈을 가져야 한다는, 혹은 꿈을 이루어야 한다는
동양 최초, 혹은 세계 최대 등등. 무슨 활동을 하느냐고 하면 역시 아주 크고 럭셔리한 규모의 축제나 이벤트를 나열한다. 그럼 평소에는? 그냥 건물 관리만 한다. 이런! 삶은 이벤트나 오디션이 아니다. 숫자나 사이즈는 더더욱 아니다.
삶은 네트워크요, 길이다. 그러므로 이 화려한 공간으로 인해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사람과 사람, 일상과 일상이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그것이 알고 싶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지극히 빈곤해 보인다. 아니, 그 이전에 거기에 대한 욕망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과 공간이 마주치면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들의 퍼레이드가 서사다. 이야기 혹은 스토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정치란 바로 이 ‘서사‘를 창안해 내는 활동이다.
따라서 최첨단의 공간과 시설을 갖추었다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서사가 탄생되어야 한다. "형(形)과 기(氣)가 서로 맞으면 장수하고 서로 맞지 않으면 요절한다. 피부와 살이 서로 잘 맞물리면 장수하고 잘 맞물리지 않으면 요절한다. 혈기와 경락이 형을 감당하면 장수하고 감당하지 못하면 요절한다."(『동의보감』)즉, 장수하려면 무조건 크고 튼튼한 것이 아니라 몸의 형태와 기운이서로 어울려야 한다. 언행일치, 지행합일 등이 불멸의 윤리인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런 점에서 스펙터클의 과잉과 서사의 부재는 치명적이다. 스펙터클의 정치는 삶의 구체적 현장이 아니라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리얼리티가 아니다. 이미지가 현장을 압도하면 거기에는 엄청난간극과 균열이 발생한다.
서사는 그와 반대다. 서사는 공간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공간이 일상의 현장으로 탈바꿈되는 순간, 그때 서사가 탄생한다. 하여, 서사의 파노라마 속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주동자건 관찰자건 주연이건 조연이건 모두 자기의 능력과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발휘할 수있는 까닭이다. 스펙터클은 수량과 속도를 경쟁하지만 서사는 그런경쟁과 위계 자체를 해체한다.
화려한 시설의 구경꾼이 될 것인가? 아니면 생동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인가? 이보다 더 정치적인 질문은 없다!
*은언급했듯이, 스펙터클의 정치는 수량과 속도를 척도화한다. 다다익선 혹은 더 크게, 더 빨리! 헌데, 그렇게 경쟁을 하다 보면 결국 모든 차이들이 증발된다. 성형미인들이 다 엇비슷하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서울과 지방, 도시와 시골의 특성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다시 원점이다. 이 첨단의 시대에 끊임없이 혁신과 창의성을 외쳐대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다.
더 큰 비극은 이제 스펙터클은 더 이상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혁명은 ‘천기누설‘에 가까운 광경들을 전방위적으로 쏘아댄다. 사람들은 이제 아마존 정글과 세렝게티대초원, 심지어 별들의 탄생과소멸까지 ‘손 안에서‘ 감상할 수 있게되었다. 아니, 스마트폰이 없어도 무방하다. 그냥 가까운 지하철역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