듯 부모는 우리 자신의 은유이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 인정을 통해우리는 스스로를 돌보고, 아끼고, 받아들인다.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 당신의 자녀나 형제에게 장애가 있고 당신이 그를 수용하기 어려워하더라도, 그들은 어머니, 아버지, 누나, 동생인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당신이 장애를 수용하고 역경을 돌파하는 당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부모, 형제, 연인, 친구, 이웃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좋은 이유를 가질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삶이 존중받을 만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투쟁 속에서 어느 순간 강인한 투사의 모습이 아니라면 결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외로운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좋다. 장애를 예쁘지 않은 얼굴을 가난을 차별받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도 모든 것을 당당히 부정하고, 자신의 ‘결핍‘을 실천적으로 수용하고, 법 앞에서 권리를 발명하는 인간으로 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얼마나 될까? 그렇게 서야만 우리가 존엄하고 매력적인 존재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수용하고 돌보려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하지는 못할 이 ‘취약함‘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집단에 속해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일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개인적인 체험』의 마지막 장을 자신으로부터도망치기를 느닷없이 그치고, 병원으로 달려가 아이를 구하는 버드의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결국 아이는 수술을 잘 마치고, 중증의 장애가 있기는 하지만 예상보다는 건강한 모습으로 버드에게 안긴다.
하고 탁월한 자아를 구축하게 한다. 그러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함께 모여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을 언어화하고, 법적인 권리로 만들고, 품위와 겉모양만 중시하는 품격주의자들의 세계에 구멍을 낸다.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이제 법률이 되고, 헌법이되어 우리 공동체의 최고 규범이 된다. 그런 규범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다시 자신의 친구에게 "피부 관리해야 돼"라는 귀엽고, 뭉클하고, 놀랍도록 탁월한 상호작용 기술을 발휘해 인간의 존엄성이모든 이념의 중심에 오는 세상을 향한 긴 순환을 시작한다.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상대방을보고 그를 더 존중하게 되고,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사랑받을 가치가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나는 그동안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의 의미를, 내가 무한히 강해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살았다. 부모는 약하다. 그들은 자녀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자녀가 온전히 자기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당당히 살아가며 그 역경을 돌파하는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가 ‘잘못된 자녀를 낳았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고,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런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도 생각한다(그 생각 때문에 또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된 나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조건을 받아들이려는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말로 청각장애나 골형성부전증, 연골무형성증이 객관적으로 좋은 가치를 가졌음을 우리 부모에게, 나자신에게, 이 사회에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들은 분명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얼마간은 객관적으로도 산물적인 가치를갖지만, 설령 이러한 질병과 장애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부정적인경험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수용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애쓰는 모습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나의 부모에게(연인에게, 친구에게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이 사회에게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이는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위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저신장장애인 딸이 "나는 내 모습이좋아요"라고 말할 때, 그녀가 정말로 자기 모습을 좋아하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사실은 그 말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분투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딸이 "내 모습이 좋아요"라고 말할 때, 딸이 자신과 달리 큰 키로 평범하게 사는 모습을 바라기보다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응원해줌으로써 자신의 ‘특별하게 강인한 자아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이고자 애썼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우스가 지적하듯이 그렇게 사랑받기 위해 강인한 존재가 되어 ‘장애 정체성의 수용‘을 위해 달려갔던 삶은 한편에서 우리를 ‘괴물‘로 만든 것은 아닌가? 푸른잔디회의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는 선언은 엄청난 충격을 일으켜 우리를 각성시키지만, 많은 경우 당신과 나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하고 살 만큼 강하지 않다. 내가 장애를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애쓰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통합되고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나 자신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키 작은 딸이 엄마 앞에서 "나는 내 몸이 좋아요" 라고 선언할때, 이는 엄마의 걱정과 사회의 편견에 맞서 독립적이고 당당한 자신을 구축하려는 실천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계속 받고싶어 하는 아이의 발버둥은 아니었을까? 앤드류 솔로몬이 지적했
. 과다. 그때 나는 친했던 친구가 끝나 갈 무렵, 선생님은 학급 단합 시간을 마련하셨다. 우리를 교실에동그랗게 앉히고는 한 학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힘들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을 적으라고 하셨다. 후회스러웠던 것. 속상했던 것. 모든 것이 뒤섞인 문장을 적었다. 내 마음은 바닥이었다. 나는 지난 학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학교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쓴 말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쓰고, 잘 버텨낸 자신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를 적으라고 하셨다. 나는 지난 학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선생님은 나에게 수없이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되었다. 나는 힘들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가서 마음을 쏟아 냈다. 고
생각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구타당해서 혼자 울고 있을 때의 슬픔. 밤길을 걷다가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올 때의 긴장.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내 가슴을 툭 쳤을 때, 고의가 아닐거라고 내가 예민한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때의 모멸감. 공중화장실에서 카메라에 찍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의 공포. 이 모든 감정 뒤에곧바로 따라오던 울분. 이 기억이 내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왈칵 넘쳐흐를것처럼 고여 있는 감정적 기억은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여성의 집단적 기억이다.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느낀 공포와 분노의 기억을 공유하는 이상, 나는 어떤 여성도 나와 다른 자리에 있다고 믿지 않았다.
글을 다시 보니 이제 이 이야기는 내가 벗어버린 허물처럼 보인다.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낯선 여자의이야기 같다. 만나면 겨우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여자,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여자가 자기 나름대로 삶을이해하려고 발버둥쳤다는 사실뿐이다. 그 고된 헛발질이 나에게 연민을 일으키지만 이제는 이 슬픔과도 이별하고 싶다. 가끔 길을 걷다가 이유 없이 신날 때가 있다. 미래의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겠지 생각하면 밀려오는 환희. 언젠가는 작가, 페미니스트, 한국인, 여자, 사람, 동물, 생명체라는 정체성과 조건마저 모두벗어버릴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을 상상하면 기대된다. 자신이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낯설게 느껴지는순간의 감각, 그 이질감을 사랑한다. 2021년 10월 배윤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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