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황토를 화폭에 담다
처음에 변시지는 제주에 내려가면서 한두 해 정도 머무를 계획이었지만, 점차 제주의 마력에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변시지가 제주를 그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제주가 변시지를 완성한 것이다. 제주는 변시지에게 어린 시절 원시 자연과 어우러진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태풍으로 잃고 절부암에 몸을 던진 아낙네의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었고, 역사적으로 늘 본토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핍박의 땅이었다. 추사김정희와 같은 선비들에게는 유배의 땅이었으며, 4·3 항쟁으로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은 얼룩진 역사의 현장이었다. 절절한 사연을 안고서, 오늘도 바람을 맞으며 처연하게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고장이었다. 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폭풍‘의 섬이었다. 변시지는 ‘바람‘으로 시작된 제주의 역사, 그리고 그 속에 살아남은 사람을 그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미술 양식을 전부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원의 고요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그리는방식으로는 도저히 제주의 원시적이고 척박한 미학을 담아낼 수 없었다. 그는 거친 바람을 피하는 법이 아니라, 그것과 마주하는 법을배워야 했다. 화가는 조금만 더 하면 뭔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혼자 제주 생활을 이어갔다.
될 듯 말 듯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는몇 날 며칠을 술에 빠져 지내며 별도봉 자살바위를 배회하곤 했다.
숨을 참고 바다 깊이 힘차게 뛰어들어 고기를 잡은 후,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해녀의 모습이 액자 틀을 따라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
때로 목숨을 걸고 생을 영위하는 보통 사람의 모습에서, 문신은 스스로 살아나갈 에너지를 얻었을 것이다.
나중에 쓴 문신의 회고록에서 특히나 인상적인 대목은 그가 자신의 가난한 아버지에게 보낸 존경과 찬사이다.
그의 아버지는 탄광 노동자, 푸줏간 점원 등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늘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한때 아버지가 마산 추산동 언덕 위에서 온실 재배를 한다고, 거름을 만들기 위한 분뇨통(장군)을 져다 나른 적이 있었다. 친척들은 냄새나고 창피하다며 아버지를 욕하고 분뇨통을 엎질렀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을 계속했다.
문신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삶을 헤쳐나가는 아버지 모습에 깊은감명을 받았다. "그 모습이 지금도 내 눈앞에 생생히 살아나면서 나에게 그 무엇인가의 용기를 갖게 해준다"고 문신은 썼다.
화가에서 조각가로
그가 바라본 삶이 이러할진대 못 할 것이 무엇이랴. 1961년 문신은 무일푼으로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비싼 비행기 값을 지불하고 파리에 도착하니, 주머니에 달랑 50달러가 남았다고 한다.
구사일생으로 화가 이용(1904~1989) 부부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후 마찬가지로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화가 김홍수(1919~2014)가 알선해 준 일자리에 문신은 정착했다. 파리 외곽에 있는 라브넬의 고성(城)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석공, 미장, 복수 등 격렬한 노동의 종합판이었지만, 문신은 이 일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스스로도 이 경험이 화가에서 ‘입체‘를 다루는 조각가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파리에서도 뭐든지 잘해내는 그를 찾는 이가 많아졌다. 존 크라븐이라는 전시기획자의 눈에 들어, 문신은 1970년 프랑스 남쪽 항구도시 발카레스에 거대한 나무 조각상을 설치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가봉의 대통령이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에게신물한 아비동 나무를 예술가들에게 나눠주면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문신은 그중 가장 큰 통나무를 골라, 가장 깊이까지 파 들어가는작업을 시도했다. 45도 온도의 모래사장에서 높이 13미터, 직경1.2미터의 나무 둥치와 무려 8개월간 사투를 벌이다가, 전기톱에 손목을 다쳐 피가 철철 흐른 적도 있었다. 문신은 이 경험을 통해 "하나의 창조라는 생명의 잉태를 위해서는 붉은 피가 엉기어 떨어지는고통과 아픔을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썼다. 그는 진정 상처를 통해 성장하는 인간형이었다. <태양의 인간>이라 불리는 이 작품으로 문신은 유럽 화단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0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할 때까지 10여 년간100여 회의 전시회에 참여했고, 작품도 꽤 잘 팔렸다.
통상 ‘시머트리(대칭)‘를 특징으로 한다. 나무, 브론즈, 스테인리스 스털 같은 재료로 좌우가 서로 대칭이 되는 알 수 없는 형상들을 그는자꾸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의 조각이 개미나 나비 같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씨앗이나 식물처럼 보인다고도 했다. 아주 오래 전 고대인이 만들었을 법한 토템 같다고도 하고, 훨씬 멀리 미래의 우주에서 날아온 미지의 생명체 같다고도 했다.
문신 자신은 사람들이 이 창조물을 무엇이라 불러도 상관없었다. 다만, 그는 어떤 대상을 의도적으로 재현하려 하지 않았고, 단지 그것이 무엇이든 작업하는 동안 이 형태들이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게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문신의 작품에 프랑스의 권위 있는 평론가 자크 도느는 ‘생의 철학‘이 보인다고 말했다. " 도판느가 말한 생의 철학은 베르그송이나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의 개념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문신에게 ‘생은 훨씬 더 실재적이라는 집에서 그들의 철학, 그 이상이다. 문신의 ‘시머트리는 땅에단단하게 발 딛고 선 어떤 존재가 어떻게든 중력을 거슬러 자라는동안 생겨나는 형상이다. 이 형상은 위로 자라면서도 옆으로는 좌우 균형을 유지하려고 실은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견고한 안정감과 극도의 긴장감이 절묘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태어나는 존재라고나 할까 생은 바로 그런 극단적인 힘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균형감각이다. 그러하기에 우주에 던져진 어떤 존재에게나, 생은 그만큼 어렵고, 신비롭고, 기적 같고, 엄중하다.
"나는 금산도 싫고, 금도 싫다. 나는 화가가 될 것이다!" 유영국
식민지 암흑기와 전쟁의 비극 속에 삶은 부서졌지만 예술을 향한 그들의 집념과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근원으로 돌아가 삶의 열망과 존재의 이유를 뜨겁게 되묻는 한국 근대 예술가들의 슬프도록 찬란한 유산
몇 해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라는 전시회는 암울했던 우리의 근대 시기에 그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영롱히 꽃피운 문학과 예술의 애잔한 향연이었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김인혜가 근대 문학인과 미술인들의 예술적 열정과 시대에 대한 고뇌, 그리고 따뜻한 우정을 생생히 기록한 이 책은 우리 근대문화사의 소중한 증언록이라는 찬사를 보내게 된다. -유홍준 (미술사가 명지대 석좌교수)
봄이 움트는 덕수궁 찻집에서 우리는 ‘거사‘를 도모했다. 김인혜는 폄훼된 한국 근대미술의 위대한 여정을 지상에 전시하기로 했다. 이상, 구본웅, 박태원을 시작으로백석, 김기림, 나혜석, 이중섭, 박래현 등 ‘경성 천재들의 파란의 삶과 예술, 뜨거웠던사랑을 천일야화』로 써내려간 원고를 읽으며 나는 울고 웃었다. 엄혹한 고난의 시대를 역동의 르네상스로 꽃피운 모더니스트들의 낭만과 투지는 경이로웠다. - 김윤덕 (조선일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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