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그냥 알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엔 어릴 때부터 키우던 꿩을 만나 반가워서 그런가 싶었는데, 꿩들이모두 지나가고 나서도 장희 씨는 계속 울었다. 준은 장희 씨 곁으로 다가서서 손을 잡았다. 준이 잡은 손을 장희 씨가 마주 잡았다.
그런데 장희 씨와 손을 꼭 쥔 순간 준은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고 했다. 울 기분도 아니고, 울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아닌데 울음이 나서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까지 했다.
나는 어렴풋이나마 준의 심정을 이해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예전과 달라진 환경에 겁을 먹었을 것이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결정을 아버지 혼자서 하고 결행해 버렸다. 
우리는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눈치를 보면서 숨죽였다. 갑자기닥친 상황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두려운 마음을 다잡을 시간. 하지만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기란 쉽지 않았다. 숨기고있던 두려움이 어제 그 산속에서 터져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준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종려와 자작도 따라서 울고 달래던 장희 씨도 울음을 터뜨리게 되었다. 결국에는 넷이 서로를 끌어안고 주저앉아서 울었다고 했다.

준은 남의 이야기를 하듯 말하고 나서 약간 멍해진 표정으로엄마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엄마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아들이 제대로 속을 텄네."

엄마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내가 다른 걸 물어보려다가 말을 바꾼 걸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그때 나는 엄마도 아버지처럼 속았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속았다‘는 말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지도 몰랐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이 정말로 아버지를 속였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세상이 아버지 계획을 방해했다고 믿었다. 아버지는오래전부터 생각하고 계획해 왔다. 성실하게 살며 차근차근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려는 계획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사고를 계기로 그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속았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속았다.‘
아버지가 울분에 차서 뱉은 말은 고스란히 내 어깨에 얹혔다.
그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울분을 건네받은 짐이었다. 아버지가 장원으로 내려갈 때 나는 함께 갈 수도 있었다. 함께 가자고 엄마와 동생을 설득할 수도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했으면, 엄마는 더 쉽게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혼자서라도이곳에 남겠다고 우겼다. 나한테 울분에 찬 목소리를 들려준 아

감당하기 힘든 짐을 얹어 준 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시를 핑계로 방학에도 장원에 가는 일을 되도록 피했고, 내려가도 아버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나는 장원이 아니라아버지를 거부했던 것이다.

‘속았다‘ 외치던 아버지를 피하고 싶었던 건 ‘그럼 아버지는 왜속았어요?‘라는 말이 터져 나올까 봐서였다.
왜 속았어요?
바보같이 왜 속았어요?
나한테서 그 말이 칼날처럼 튀어나와 아버지를 해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아버지와 전처럼 친밀해질 수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결코 예전처럼 친밀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 마음속에 용기가 싹튼 날이 바로 서백자 할머니 가족과 저녁 만찬을 하던 날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인생을 두고 너무 아름다운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인생이 분명히 있을 테지만,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름다운 인생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불쑥 물었다.
"그럼 어떤 게 아름다운 건데요?"

마치 아버지를 향해 왜 속았어요?라고 묻는 투였다. 할머니가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맘먹은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달렸지. 암,

거기에 달렸지."
할머니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중얼거린 그 소리 끝에서 어떤 기운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을 나는 알고 있다.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덩어리가 점차 풀리고 따듯한 바람이 부는것만 같던 그 순간 그 순간을 만난 다음부터 나는 아버지와 다시 전처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계획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게 아니라고 생각해 왔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억지를 써왔던 자신을 받아들이는 말이 바로 ‘속았다‘였을 것이다. 아버지를 가장 많이 속인 건 아버지 자신이라는 걸 인정하는 말.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지평선을 넘을 수 있었을 것이다.

먼저 경계를 넘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그리고 나와함께 경계를 넘으려고 기다린 엄마, 나보다 먼저 용기를 낸 동생.
평생을 살 거라 여겼던 집에서 호쾌하게 떠난 서백자 할머니. 그들의 마음이 나한테 전해진 게 그날이었다.

*
이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잠자리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미닫이문을 열었다. 미닫이문을 여는 것과 같은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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