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병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의문은 계속된다. 이순신 장군은 왜 운주당의 출입문턱을 낮추었을까?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임명돼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전쟁 대비에 착수했다. 일본의 침략 야욕을 본능적으로 간파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적군은 칼을 휘둘러 상대할 수 있었으나, 해안의 물길과 지형처럼눈에 보이면서도 동시에 보이지 않는 정보는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이순신 장군은 해당 지역에서 태어난 병사는 물론 종종 민간인까지 운주당으로 불러들였다.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그리고 그들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기울였다. 현장에서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031 갔을지도 모른다. 상상력을 발휘해봤으면 한다.

사람의 발이 네모난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닮은 소우주다. 인간의 말은 작은 우주에서 생명을 얻는다. 그러므로 들리는 것을듣는다고 해서 다 듣는 것이 아니다. 귓속을 파고드는 음성에서 숨겨진 메시지를 포착해 본질을 읽어내야 한다. 상대방이 가슴에서 퍼 올린 말을 귀가 아닌가슴으로 느끼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이 책의 낱장을 넘기면서 곰곰 생각해봤으면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본 적 있는지,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를 귀가 아닌 가슴에서 크게 중폭시켜 헤아려본 적이 있는지,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만한 ‘자신만의 운주당‘이 있는지...
삶은 유한하고 죽음은 영원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

앞에서 인간은 늘 무력하다. 다만 살아갈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 덕분에 우리는 지독한 허탈감과 무력감 속에서도 각자의 삶을 이어나가는지 모른다.
여전히 많은 것이 가능하다.
소중한 사람의 마음에 가닿으려는 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가슴 한구석에 작은 운주당을 세워봤으면 한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당신의 입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의 귀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인은 사람 인ㅅ에 두 이를 더해 만든 한자다. 여기에는 단순히 ‘마음 씀씀이가 야박하지 않고 인자하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여기는 마음가짐 혹은 그러한 행위까지 내포한다.
그래서 일찍이 공자는 ‘인‘을 인간이 지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 간주했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관계 속에서 ‘인‘을 실천하면서 비로소 인간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인의 반대는 ‘붙인‘이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 등 동양 의학 서적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종종 등장한다.
"신체 일부가 마비되면 불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타인과 정서적으로도 감정이 통하지 아니한다."
사람은 몸과 마음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으면 자신의고통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아픔과 속사정을 짐작하

거나 공감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전방위적 지식인으로 불리는 한나 아렌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메마른 가슴에 약품이 깃들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 참관하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개념을 구체화했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을 체포해 수용소로 이송하는 일을 총괄한 책임자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전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은 "의무를 준수했고 명령에 따랐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의 변명에는 죄의식은커녕 고민의 흔적조차묻어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한나 아렌트는 거악을 창안하는 것은 히틀러 같은 악인이지만, 거악과 손을 잡거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인지 모른다

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일갈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있습니다."
나는 학창 시절 어느 시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책을넘기다가 그녀의 주장이 지닌 무게가 너무 무거워책 모서리를 쥔 채 그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한나 아렌트의 이야기가 과장된 것일까? 그녀가 거창한 단어를 문장 곳곳에 집어넣어서 자신의 주장을 부풀린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녀의 말처럼, 악은 인간의 내부에 잠입해 똬리를틀고 앉아 우리의 윤리적 고민과 성찰을 방해한다.
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내 행동과 말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상황에 따라 우리는 얼마든지 제2, 제3의 아이히만

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공감과 무공감, 사유와 무사유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틈틈이 내면의 민낯을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언어가 이러한 그루밍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것은 구성원 간 친밀감 형성이 주된 목적이며, 큰 틀에서 보면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누일 곳이 필요하다.
몸이 아닌 마음을 누일 곳이물론 그 공간은 물리적인 장소뿐만이 아니라 사람의마음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가슴에 품고 있는 고민을종종 타인에게 털어놓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고민을 해결하려는 목적보다는 마음을 쉬게 하려는 목적으로 말이다.
나 역시 세상살이에서 생기는 근심과 답답함을 주변사람과 나눌 때가 있다. 그런데 이때 형식적인 위로나 격려보다는 마음의 장막을 먼저 풀어헤치고 다가와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어"라고 덤덤하게 말해주는 이들의 위로가 더 가슴에 와닿는다. 마음 깊은

피지 않을 수 없다. 싸워야 할 때와 싸우지 말아야할 때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또한 <손자병법》 <모공> 편에서는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不戰而居人之"라고 말하기도 했다. 싸우지 않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상의 전략임을 강조한 것이다.
손무가 강조한 상책 가운데 하나가 협상이 아닐까싶다. 서로의 흠집과 맹점을 찾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공세의 대결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과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싸우지 않고 양측 모두가 이기는방법을 찾는 합세의 대결말이다.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라는 용어가 있다. 원래는테니스 라켓이나 골프채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을 가리킨다. 골프채의 스위트 스폿으로 공을 쳐야 최대비거리를 낼 수 있다.
협상학에도 스위트 스폿이 존재한다. 다만 비거리를

최대화하는 게 아니라 협상의 환경을 최적화하는 역할을 한다.
양측의 이익이 하나로 포개지고 협상 참여자들이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심리 타점이라고도 한다.
극단 사이에서 절충의 지점을 찾는 일은, 중국 노나라 때 학자 자사가 주창한 중용中庸과 맥이 닿아있다.
여기서 ‘중‘은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도리에 맞는상태를 일컫는다. ‘용‘은 보편적이면서 변하지 않는성질이다. 그러므로 중용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양극단 사이에서 절충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이를 서구적 시각으로 풀어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다. 중용은 한쪽이 이득을 보면 반대편이 무조건 손해를 보는 제로섬 zero-sum 게임이 아니다. 이해 당사자 모두가 실리를 챙기는 포지티브섬 positive-sum 게

임에 가깝다.
중용은 기계적 중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용은 단순히 중간 지점에 눌러앉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여건에 맞게 합리적으로 위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유연한 흔들림이라고 할까.
바다를 떠다니는 배도 중용의 힘으로 파도를 밀쳐내고 물살 위에서 버티는 게 아닐까 싶다. 대개 선박은출항 전 배 밑부분에 평형수平衡k, ballast water 를 집어넣는다. 파도를 만나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 가만히있던 평형수는 반대 방향으로 이동해서 선박의 무게중심을 잡는다. 평형수가 제 위치를 절충중용하는 덕분에 배가 뒤집히지 않고 순항할 수 있는 것이다.
절충과 협상 과정에서 나름의 전제 조건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무엇일까? 상대에 대한 완벽한 이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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