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한편 이곳 캠프장의 사람들과는서로 벽을 쌓고 사는 느낌이었다. 링고와 친구가 된 개를 키우는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않고 있었다. 캠프장에서는 철저히 익명의 상태로 사람들과 별교류 없이 지냈지만, 이메일과 페이스북에는 메시지가 넘쳐나고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접한 수천 명의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었다.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우리는 메시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읽었다. 코네티컷Connecticut에 사는 주부는 어머니 이야기를 읽고 덕분에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용기를 얻었다고 감사 편지를 보내왔다. 암병동에서 일하는 어떤 간호사는 말기 암노년 환자들이 침습적이며 고통스럽고 힘든 수술과 치료를 받는대신 어머니처럼 평화롭게 말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좋겠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그 간호사는 노년 환자들이 치료를받으면 얼마간 더 살 수는 있겠지만 여생의 즐거움은 상실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어떤 이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고 온 가족이 함께 2주 동안 1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장정의 여행길에 오르기로 계획을 세웠다며 "살아 있는 동안 온전히 삶을 느끼고 싶어서요."라고 했다.
호주 서부 퍼스에 사는 남자는 우리에게 진심 어린 축복의 메시지를 보냈고, 아르헨티나에 사는 사람은 우리에게 큰 포옹을 선사했다. 또 최근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며 어머니를
‘할머니‘

라고 불러도 되겠냐고 묻는 메시지도 있었다. 이런 메시지들이끝없이 도착했다.

사람들이 보낸 뭉클한 편지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마음이 벅차올라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응원해주었고, 응원의 목소리는 새로운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이면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두려움과 상실감, 희망을 토로했다. 환자를 돌보면서 느끼는 어려움, 병을 진단받고 찾아온 괴로움, 후회, 회한 같은 것을 우리에게 하소연하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밀한 감정을 쏟아부었다. 
꿈에 그리던 여행을 실행에 옮기거나,
최근 세상을 떠난 부모님과 진정으로 화해하거나,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의 의미에 대해, 질병과 나이 듦에 대해, 그리고 사랑에대해 전 세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의 장 한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마주할 때마다 어떻게 마음을 열어야 하는지 그때그때 배우고 있었다. 처음부터 잘했던것은 아니었다. 초반에는 정신없고 겁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관심을 가져주자 책임감 같은 게 생기면서 동시에 이러다가 우리 자신을 잃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여행지와 휠체어로 갈 수 있는 경로를 검색했다. 
항상 식사는 잘하고 계신지, 잠자리는 편안하신지 걱정이 앞섰다. 어머니가 원기 왕성하고 기분이 좋은 날은 소풍이나 산책을 갔고, 그렇지 않은 날은 그냥 한곳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퍼즐을 풀었다. 
모든 것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졌다. 어머니의 기분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우리의 하루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지치고 힘들어 우울해지면, 또는 지금까지 우리가 그렇게 애써서 성취한 자유를 포기하기로 한 결정이 과연 잘한 것이었는지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순간이면, 우리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그들은우리에게 응원단 같은 존재였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것만 같을 때, 그들 덕분에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불던 2월의 어느 날 아침, 나는 플로리다 세인트오거스틴비치에서 우리가 보는 몇 안되는 뉴스 가운데 하나인 GNN에 메일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우리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이 520명이나 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에 고무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것이다. GNN이라면 우리의 이야기를 뉴스로 다룰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식이 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했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며 이제 막 시작하려는 새로운 모험에 대해 설렘과 긴장을 함께 나누었다.

인터뷰 질문,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상실감에 빠진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어머니의 답, "매일 기도하세요. 하나님이 돌봐주실 겁니다."
인터뷰 질문,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조언 한마디 부탁합니다."
곱씹고 고민하는 스타일이 아닌 어머니의 즉각적인 답, "그냥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거예요. 그러면 돼요."
인터뷰 질문, "살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어떻게 극복합니까?"
포트마이어스비치에서 만난 릭과 조가 떠오른 듯한 어머니의답, "서로 이야기를 나누세요. 정말 큰 도움이 돼요."

나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어머니의 답변과 함께 많은 사진을 첨부하여 GNN에 이메일을 보냈다.
그다음 일요일, 휴대폰에 이메일이 왔다는 알람이 울렸다. 
이메일은 GNN에서 온 것이었는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드라이빙미스 노마Driving Miss Norma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고 GNN 뉴스를 확인했다. 
GNN에서 올린 우리 기사는 훌륭했다. 
우리의 시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본 우리이야기를 읽는 것은 신선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우리 어머니가 아기 판다보다 인기가 많을두 수 있는 거지?
치솟는 숫자를 보며 우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팀과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5년 전, 팀과 나는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여러 가지 뉴스를 수동적으로 흡수하며 휘둘리는 삶이 싫어 일반 대중 매체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우리들이 선택한 것만을 받아들이며 우리 중심의 삶을 살고 싶었다. 테러 소식, 총기 사용 폭력 사건, 정치 스캔들 등 온갖 부정적 뉴스가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뉴스는 우리의 신경을 갉아먹고 우리의 사고에까지 영향을끼쳤다. 그래서 TV 뉴스를 보지 않았고 신문과 잡지를 모두 끊었으며, 페이스북의 경우 뉴스가 들어오는 경로를 차단해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바로 그 뉴스가 되었다. 게다가 수백 명에달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그네들의 인생에 들어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내가 너무 대답했어. 나 때문에 우리 세 사람 인생이 무너지고 있어.‘
나는 좋아요가 하나 더 추가될 때마다 이렇게 후회했다.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사생활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나에 대한 팀과어머니의 신뢰는 사라졌다. 나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괴물을 키운 셈이었다. 자는 동안 들리는 심장 소리에도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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