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신경림(庚林 1935~ )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절창이다. 보지 않는 듯 하면서 다 보고 계셨구나. 어려운 말 하나 쓰지 않고 깊은 곳을 찌른다. 어떤 경지에 오른 시인만이 그런 거룩한 살인을 할 수 있다. 1990년대, 마포와 인사동 언저리에서 신경림 선생님과 어울린 적이 있었다. 술자리든 어디서든 언성을 높여 누군가와 다투는 선생님을 본 적이 없다. 한국 문단에서 보기 드문 분이었다. 시집 <돼지들에게》를 펴내며 신경림 선생님에게 추천사를 부탁드렸다. 세대는 다르지만 내 시를 편견 없이 봐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추천사를 주신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
술 노래 A Drinking Song 에이츠(W. B. Yeats 1865~1939)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우리 늙어 죽을 때까지 알아야 할 진실은 이것뿐. 술잔을 들어 내 입술로 가져가며 그대를 바라보고, 나 한숨짓노라. Wine comes in at the mouthAnd love comes in at the eye;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마다젊은 날, 술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소리내어 암송했던 예이츠의 술 노래, "입으로(at the mouth)" "눈으로 (at the eye)" 1행과 2행이 대구를 이루고 "comes in " 이 반복되어 노래가 되었다. 마지막 행에 나오는 ‘그대‘는 예이츠가 평생 사랑했던 모드 곤이리라. 술과 사랑의 진실을 이토록 간결하게 묘하다니. 20세기가 낳은 가장 뛰어난 시인이라는 찬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우리가 늙어 죽을 때까지 알아야 할 진실이 어찌 이것뿐이랴. 그러나 이렇게 사랑에 죽고 사는 시인이 나는 좋다. 그녀 없이 행복할 수 없다는 예이츠의 말에 모드 곤은 이렇게대답했다지. "아, 그래 당신은 당신이 말하는 그 불행으로부터아름다운 시를 만들지. 그래서 그 시를 보며 당신은 행복하지. 결혼은 따분한 일이야. 시인은 결혼하면 안 돼. 당신과 결혼하지않은 것에 대해 전 세계는 내게 고마워해야 해."
<이소>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정치가이며 중국 최초의 시인이라고 알려진 굴원屈原의 대표작이다. 총 375개의 구에 2,490 글자로 이뤄진 장편시의 제목인 이소(騷)는 근심을만나다‘ 혹은 "이별과 근심의 의미를 담았다. "저는 하늘의 신 고양의 후손으로 시작하는 <이소〉는높고 아름답게 태어나 왕을 보필하다 모함을 받고 쫓겨난 굴원자신의 처지를 구구절절 읊는다. 자신을 버린 님 (왕)에 대한 사랑과 원망이 너무 진해 쓰고 또 써도 눈물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소의 마지막은 ‘이제 그만 하리! 이 나라에는 알아주는 사람 없으니 고국에 무슨 미련을 두리. 훌륭한 정치를 함께 할 사람이 없으니 나는 팽함이 있는 곳으로 가리라."로 끝난다. 팽함은 은나라의 충신으로 임금에게 직간했다 듣지 않자 물에빠져 죽었다. 초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굴원은 멱라강에투신해 죽었다.
목욕하는 사람아 이백(李白 701-762)
향수로 머리 감았다 해서 갓티끌 튕기지 말 것이며, 난초 담근 물로 몸 씻었다 해서 옷먼지 털지는 마소. 사람사는세상 지나친 결백은 삼가하나니. 도에 지극했던 사람들 제 본색 감추기를 귀히 여겼더라네. 창량(流浪) 물가에 고기 낚던 이 있었다니. 내사 그이나 찾아 가려네.
이범한 옮김
이백의 시들을 읽다가 술 타령 달 타령에 염증이 나 술이 나오지 않는 시를 찾다 <목욕하는 사람아>를 발견했다.
"새로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갓의 먼지를 털고, 새로 몸을씻은 자는 반드시 옷의 티끌을 턴다"는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되받아치며 이백은 지나친 결백을 삼가고 본색 감추기를 귀히 여기라고 말한다.
창랑(滄浪: 한수이강의 지류)에 고기 낚던 이는 굴원과 대화를 나누던 어부, 고결한 몸에 세속의 먼지를 묻히지 않겠다는굴원에게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노래를 남기고 어부는 사라졌다. 청렴결백을 자랑 말고 세상에 따라 변하라, 깨끗함에 집착하지 말라는깊은 뜻 아니던가. 지나친 결백은 나에게도 불편하고 타인에게도 불편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진면목‘이라는 말은 소동파의 시에서비롯되었다. 여산을 두루 구경한 뒤 서림사의 벽에 그가 남긴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가로로 보면 산마루, 옆에서 보면 봉우리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건 내가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 밖에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그가 유배되어 밖에 있었기에 도달한 이치가 아닐까. 시문학뿐 아니라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던 소동파, 자유로운 듯하나 절제된 아름다움, 그의 작품은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힘이 있다.
기대지 않고 이바라기 노리코(木子 1926~2006)
더이상 기성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이상 기성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이상 기성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이상 그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속 깊이 배운 건 그 정도 자신의 눈과 귀 자신의 두 다리로만 서 있으면서 그 어떤 불편함이 있으랴 기댄다면 그건의자 등받이뿐
-성혜경 옮김
내 삶과 동떨어진 학문이며 사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기대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노리코 여사는 엄청난 독서를했음에 틀림없다. 이런저런 사상과 학문을 섭렵했던 자만이 그처럼 쉽게 버릴 수 있다. 내가 조선 여자라 노리코의 시에 격하게 공감할지도 모른다. 성리학과불교, 모더니즘을 수입해 얼른내 몸에 둘러야 했던 변방의 먹물들. 서재 가득한 책에 포위된지식인들의 사진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내 나라 안방을 점령한 무슨무슨 클래스에 열광하는, 무슨무슨 논리에 영혼을 바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유튜브의시대, 내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자신의 다리로 서 있지 못하고 부화뇌동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말이 없어진다면 삶은 더 간단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겠지. 호주오픈 테니스가 시작되기 전에 편하게 앉을 소파를 사야겠는데 아직 맘에 드는 소파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 맘에 딱 드는 물건이 아니라면 사지 말자. 오래 살면서 내가 배운 건 그정도.
피 이바라기 노리코(木07子1926~2006)
이라크의 가수가 노래 불렀다 열렬히 허리를 비틀어 가며 "사담에게 이 피를 바치자 사담에게 이 생명을 바치리"
어딘지 귀에 익은 노래 45년 전 우리도 불렀다 독일 어린이들도 불렀다 지도자의 이름을 걸고 피를 바치자 따위의 노래를 부를 땐 변변한 일은 없는 법
피는 온전히 자신을 위해 써야 하는 것 굳이 바치고 싶다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이야말로
- 성혜경 옮김
변변한‘이라는 형용사가 절묘하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를번역한 성혜경 선생의 탁월한 언어 감각에 감탄이 나온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쓸 피가 내게 남아 있나? 내 자신을 위해 쓸 피도부족한데…. 피처럼 선명한 언어들, 허튼 수식어 없이 꼭 필요한 말만 엮어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려고 노력했던 위대한 시인. 일본군국주의를 예리한 ‘여자의 말‘로 비판했던 노리코 여사에게 조선은 아름다운 피해자, 알고 싶은 이웃나라였다. 한국어를배우고 윤동주의 시를 일본에 소개했던 이바라기 노리코, 어떤문학상 수상도 거부했고 장례식도 조의금도 거부한다는 편지를남기고 그가 타계한 몇 달 뒤 일본을 방문했다. 아사히신문 기자에게서 노리코 여사의 집에 배용준의 사진이 크게 붙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이도 지식인인 척하는 남자들에게 어지간히 실망했던 게다.
유언 김명순(1896~1951)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 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이 사나운 곳이 사나운 곳아.
내가 조선이 나를 영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영결할때이다. 그만큼 주체적이고 활달한 자아를 엿볼 수 있다. 죽은시체에게도 학대해 달라니, 자학적인 표현에서 그녀에 대한 집단가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된다. 평양 갑부 소실의 딸로 태어난 김명순은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공부하다 1917년 최남선이 주간하는 《청춘》의현상응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창조‘ 동인으로 시와 소설을 발표했는데 일본 유학 중에 데이트 강간을 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심한 비난에 시달렸다. "부정한 혈액" "처녀 때 강제로 남성에게 정벌받았다" 남성문인들의 모욕에도 굴하지 않고 김명순은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간행했고 매일신보사의 기자로도 일했다. 최초의 여성 소설가 근대 처음으로 시집을 간행한 여성 시인. 그 찬란한 처음을연 그의 마지막은 불우했다. 궁핍한 생활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땅콩을 팔아 연명하다 도쿄의 뇌병원에서 죽었다고 한다.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나혜석(錫 1896~1948)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서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처음부터 격하게 시작하는 나혜석의 유언과도 같은 시. ‘살러가자가 아니라 죽으러 가자" 다. 비장한 내용이나 문체는 사뭇당당하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파리로 가서 죽고 싶다는 시를 쓰고 왜 못 떠났을까? 죽으러‘는 ‘살러‘의 역설적 표현 아닌가 얼마나 시달렸으면….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조선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를 했던 나혜석은 파리에서 만난 남편이 아닌 남자와의 관계가 알려지며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세간의 비난과 조롱을 받는다. ‘부도덕한 신여성‘은 가난과 병에 시달리다 행려병자가 되어 52세에서울시립자제원 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다. 1934년 나혜석이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고백장의 한 문장이 내 귀에 메아리친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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