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넌 요새 좀 변했어.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말했을 무렵부터." "응...... 그럴지도 몰라. 아주 좋은 애거든." "그래, 좋은 사람을 만나서 다행이구나. 그 뭐냐, 잘해줘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상처 입는 걸 겁내면 안 된다… 맞는 말이구나." 마치 아주 오랜만에 술에서 깨어난 듯한 목소리였다. "말이 너무 심했으면 미안. 죄송해요." "아니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나지. 집안일부터 시작해서 모든 걸 사나에하고 너한테 떠넘기고 난 도망치고있었어. 게다가 응모까지 그만뒀어. 네 말대로 상처 입는게 두려웠던 거야. 네 어머니를 잃고, 나한테 재능이 없다는 걸 아는 게 두려워서. 계속 도망만 쳤다." 아버지가 힘이 빠진 것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도 망설이다가 옆에 앉았다. 아버지도 나도 어떻게 하면좋을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마시다 만 발포주 캔을 가볍게 쥔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부자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면 두 사람은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현실은 픽션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현실은 언제나 이렇게 건조하고 당황스럽다. 주저앉아 꼼짝도 못 한다. ‘그래도 현실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뭔가 먹을 걸 만들까 하고 묻자 아버지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우리는 중요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건 진보라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아버지를 정면에서 대할 것이다.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대로 그때 무슨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침묵이 이어진 끝에 아버지가 "그래, 뭣 좀 만들어줄래?"라고 말했다. 나는 얼굴을 들었다. 아버지가 서툴게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곰보 달걀이 오랜만에·· - 생각나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로, 누나가 종종 만들곤 했다. 원래는 어머니 본가에서 만들던 것이라고 한다. 13
"사나에 축하한다. 정말 축하해." 몸속 깊은 곳이 떨려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잠깐 울었다. "누나가 집에 찾아온 것은 아쿠타가와상이 발표되고 열홀 이상 지났을 때였다. "집이 참 깨끗하네. 우리 동생은 역시 다른걸." 며칠 전 누나에게서 또 연락이 온 뒤로 아버지는 내내들떠 있었다. 그때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이튿날 아침부터 아버지는자진해서 집안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요리에 도전했다가 실패하는 등 내게 조금씩 집안일을 배우고 있다. 오늘은 아침부터 열심히 청소하더니 저녁은 아버지가하겠다고 호언했다. 우리 집 상태에 감탄하는 누나에게 나는 말했다. "나 혼자 청소하는 게 아냐. 아버지도 거들어주거든." 누나는 정말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가 부끄러운 듯 말을 이어받았다. "그 뭐냐.....… 여러모로 미련이 없어졌어. 요리도 청소도해보니까 즐거운 면이 있고 말이지. 소설 쓰는 건 당분간
그만둘까 한다. 도피 수단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정면에서대하듯 소설을 대할 수 있게 되면・・・・・・ 그땐 써볼까 하는 생각도 있고, 사나에, 원하는 책이 있으면 가져가라. 초판본이든 뭐든 상관없어. 책도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니까." 누나가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제가………… 제가 소설을 쓰려고 한 건 아버지 영향이에요 소설을 쓴다는 행위는 아버지 덕분에 가까이에 있었어요. 그렇지만....… 처음엔 저도 그랬거든요. 지금의 자기자신한테서 도망치고 싶어서 썼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그게 아니게 된 거예요. 자기를 확장해가기 위한 걸지도모르겠다, 자기 자신의 새로운 말, 새로운 생각을 만나는장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누나의 말에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감격해서 울 것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쳐다보던 누나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명랑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네요・・・・・・ 이 집은 책이 너무 많아서 위생적으로안 좋은 면도 있었으니까 좀 가져갈까요. 그래도 돼요. 아버지?"
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어." 가미야가 잇는 슬픈 말들에 나는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죽다니. 그런 일 없어. 괜찮아." "그렇지만.. "응, 알아. 하지만 인간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렇잖아, 굉장하지 않아? 공업 제품이랑은 다르다고. 거기엔 설계도도, 숙련된 작업자도 없어 어머니 배 속에서 자라서 세상에 툭 나와서, 그때부터, 아니그 전부터 살아 있지. 그건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로봇처럼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든 게 아니니까 이상이 생겨도 바로 모르고 움직이지 않아도 부품을 교체해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아냐. 어떻게 이렇게 살아 있는 건지 실은 잘 알 수 없어. 이해할 수 없고, 굉장하고, 동시에 겁나는 일이야." 가미야는 자신의 왼쪽 가슴 언저리를 바라봤다. 그때 가미야에게 무슨 말인가 할 걸 그랬다. 가미야에게 무슨 말인가 해주었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러지 못했다. 가미야의 말에 약간, 아주 약간, 맞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안정했을 때 마오리가 어땠는지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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