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은 언제나 그랬듯, 4교시 중간쯤 학교에 왔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반장인 형주의 손에 이끌려 교무실에 온 유림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짙게 풍겼다. 단추가 벌어질 정도로 작게 줄인 블라우스와 걸을 때마다 속옷이 보일 듯 말듯 아슬아슬한 교복 치마 대신 남색 체육복 바지에 박스티셔츠 차림이었다. 기말고사 문제 오류로 재시험을 3번이나 치르는 바람에 성적처리업무가 폭주해 유림의 옷차림이 달라졌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라고 했다면서요?"
치켜뜬 눈으로 묻는 아이에게 다가오라 손짓했다. 두꺼운 아이라이너를 그린 눈이 찌푸려지고 새빨간 틴트를 칠한 입이 비죽인다. 유림은 먼발치에서 되물었다.
"왜요?"
연우는 일어서 유림에게 다가갔다. 유림이 뒷걸음쳤다. 연우는 유림의 어깨를 재빨리 붙잡는 동시에 배에 손을 댔다.
‘아이 씨팔 뭐 하는 거예요?"
순식간에 연우의 팔을 밀어내며 유림이 소리를 질렀다.


‘정유림? 이름이 익숙한데? 학교폭력위원회에 몇 번이나 가해자로 올라왔던 애잖아. 게다가 3월에 임신했다고 6개월이 넘어서 낙태하기 힘들다고 태아 뼈 녹이는 주사까지 맞고 수술한 애개 맞지?"
약속이 있다며 빨리 끝내라고 닦달했던 교감은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짜증을 내며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도대체 학생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로 시작한 잔소리의 결론은 모든 게 연우 탓이라는 거였다.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교감이 화를 내는 이유는 뻔했다. 학생의 징계사안을 교감을 거치지 않고 교장에게 직접 보고해 일처리를 한 괘씸죄였다. 남자인 교감보다는 여자인 교장에게 임신에 관한 말을 꺼내기가 쉬워서였고, 학교명예 실추를 염려한 교장이 조용히 넘어가자고 결정했다. 하지만 교감은 연우의 변명 따위는 무시했다. 그렇게 건방지게 교칙과 절차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일처리를 하니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게 아니나는 교감의 잔소리를 끊으며 교장이 입을 열었다.
"한번 유급당한 애라 이번에는 졸업할 수 있게 봐달라고 해서 모르는 척 넘어가 줬더니 초등학교 옆에서 삥 뜯다가 걸린 애 맞지? 초등학생 부모와도 합의 보고, 워낙 큰일 겪어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봐달라고 해서, 학교 평판도 걸리고 어차피 눈감아주기로

한거 봐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그때 임신한 것도 성매매하다그랬다고 소문났었잖아! 그런 년이 무슨 성폭행을 당했다고 지랄이야? 그걸 믿어? 서 선생 너, 바보야?"
미술 전공이라 성대가 혹사당하지 않아서인지 교사치고는 꽤높은 교장의 음정이 파르르 떨렸다.
3월, 유림이 중절수술을 받고 퇴원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발생한 사건이었다. 후미진 골목길에서, 유림은 지나가던 초등학생을 붙잡아 돈을 요구했다. 돈이 없다는 아이에게는 피우던 담배를 가래를 뱉어 끄고는 삼키라고 시켰다. 겨우 가래 묻은 담배를 입에 한 번 넣었다 뺀 초등학생은 구역질을 하며 도망쳤다. 담배 냄새 가득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울어대며 집에 돌아온 아이를 본 엄마는 당장 경찰을 대동하고 골목길로 향했다. 유림은 또다른 초등학생의 돈을 빼앗는 현장에서 연행되었다. 저녁 8시, 안곡경찰서에 걸려온 전화를 받던 순간을 연우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일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하지만 유림이 말로는...……."
교장이 피식 웃으며 말을 막고 나섰다.
"반 애들 여섯 명이 강간을 했다고? 그럼 당했을 때는 왜 가만히 있었대?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왜 난리야?"
"그 아이들이 임신한 유림이를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폭행까지 하는 바람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답니다. 들은 이상 저도

제가 할 일을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유림이 평소 행실이 불량했다고 해도・・・・・
‘입 닥쳐라 어디서 훈계질이야? 내가 그냥 교장 된 줄 알아? 나도이일 저일, 별의별 일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어. 딱 보면 몰라?
그년이 어디서 또 몸뚱이 험하게 굴리다 임신하고서는 겁나니까히 멀쩡한 애들 물고 늘어지는 거잖아! 그 여섯 명 학부모 중학교운영위원회 위원이 두 명이야. 한 명은 학년 대표고"
한국대 의대 교수, 유명 로펌 대표, 재벌 방계 대기업 임원・・・・・・술집을 운영하면서 사이비 교회에 다니는 유림의 어머니와는 사회적 지위가 달랐다. 교감이 당연하다는 듯 교장의 편을 들고 나섰다.
"게다가 걔들은 공부도 잘해. 전부 한국대 가능성 있는 애들이라고 내가 공부 잘하고, 부잣집 애들이라고 편드는거 같아? 걔들단 한번이라도 교칙 어겨서 걸린 적 있어? 지각 한 번 한적 없고,
교복 깔끔하게 입고, 수업 시간에도 당연히 열심히 하겠지. 선도부아니면 학생자치부에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야. 형주는게다가 반장에 전교 회장이잖아. 나 볼 때마다 90도로 인사하는애들이야. 다른 선생들이 이 얘기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 거 같아?"
모르겠다. 연우는 자신이 말할 틈도 없이 다다다다 쏟아지는 교장과 교감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말 내내 고민하느라 시간도 자지 못했다. 노려보는 교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드는데종이 울렸다. 그새 5교시가 끝나 있었다. 월요일 7시간의 수업

정 중 연우의 유일한 공강 시간이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지?"
"저, 다음 시간에 수업이 있어서요."
"대답 안 해?"
"일단 수업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꾸벅하고 교장실을 나섰다. 쯧쯧, 말귀를 못 알아들어, 저렇게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서야, 교장의 투덜대는소리가 연우의 뒤로 바짝 따라왔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유림이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성폭행범으로 지목된 학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주말자율학습을 하러 학교에 나왔다. 아침 8시 자습에도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었다. 제일 먼저 범행을 벌였다는 형주는 언제나처럼 나서서 교사들의 일을 도왔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교사가있으면 달려가 대신 들어주고,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교사들의 심부름을 했다. 사흘간 제대로 잠들지 못한 연우가 멍한 채로있다가 수업에 늦었을 때, 학생들을 조용히 자습시키고 있던 사람도 형주였다. 한국대 의대 교수 아버지를 둔 형주는 모든 것을 간섭하고 통제하는 부모 밑에서도 바르게 자란 특이한 케이스라고생각했었다. 기특하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형주는 속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요즘 너무 까칠해 보이세요. 그냥 오늘은 제가 청소시키

고 문잠글 테니까 쉬시는 게 어때요?"
종례 전, 형주는 먼저 다가와 물었다. 연우 대신 옆자리의 교사가 방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역시 우리 형주는 뭐가 달라도 달라 어쩌면 저렇게 배려심이깊을까? 너 같은 애가 의사가 되면 얼마나 환자들을 위할까? 진자 한국대 의대 교수들이 눈이 빼지 않은 이상 넌 붙여줄 거다.
"그렇지, 서 선생?"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세상은 모호하고 흐릿해졌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동화 속 선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우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죽도록 사랑하는 이였고, 다른 이에게 악한 짓을 저지른 인간이 연우에게는 은인이 되기도 했다. 그 불분명함이 언제나 연우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생각했다. 무엇이 옳은 걸까? 잠도 자지 않은 채 고민했다. 무엇이 아이들을 위해 가장 좋은 길일까?
하지만 오랜 시간 고민한다고 해서 판단이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선과 악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계와 전염력이다. 선은 제한된 범위에서 지루하고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전파되는데, 악은 한계를모르고 기하급수적으로 악을 재생산한다. 형주 무리가 그랬던 것.
처럼 여러 명이 모이면 잠재되어 있던 악은 팽창해 폭발한다. 판단력은 흐려지고, 죄책감은 뭉개진다. 현실에서는 권선징악 따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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